"聖書 베끼는 수도승처럼.. 수행하듯 만화 그리죠"

정상혁 기자 입력 2017. 7. 24.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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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노블 작가 크레이그 톰슨
예술만화의 세계적 '젊은 거장'.. 대표작 '담요' 국내서 10쇄 찍어
순수함·개성 살린 흑백 그림 고수 "차기작은 수묵화로 그린 '인삼'"

'신성한 펜에서 최초의 잉크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 한 방울에서 강이 흘렀다.' 그것은 개별의 이야기가 돼 흐르고 끊어지고 다시 이어진다. "세상은 이어져 있습니다. 사람과 자연과 종교 모두 마찬가지죠. 고립이 아니라 연결을 그리는 이유입니다." 미국 만화가 크레이그 톰슨(42)이 말했다.

예술만화를 뜻하는 그래픽노블 '담요'(2003) '하비비'(2011) 등으로 이미 국내에서도 유명한 그가 부천국제만화축제 참석차 21일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하비상·아이스너상·이그나츠상 등 굵직한 트로피를 석권하며 일찌감치 '젊은 거장'의 칭호를 얻은 작가다. "운이 좋았죠. 가족과 사랑에 대한 주제의식이 폭넓은 공감을 산 것 같아요."

22일 만화영상진흥원에서 만난 크레이그 톰슨. "젊음은 아주 단순한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를 향해 돌진하게 하죠." 가난한 예술가였던 그는 "'하비비'의 성공으로 5년간 아무것도 안 해도 될 정도의 수익을 얻었다"고 귀띔했다. /성형주 기자

대표작 '담요'는 시골 마을 기독교 근본주의 집안에서 자란 톰슨의 유년과 청년 시절을 관통하는 자전적 이야기다. 2012년 수입돼 국내시장에선 이례적으로 최근 10쇄를 찍었다. 여린 왕따 소년이 규율의 가면과 억압에 환멸을 느끼고, 사랑을 경험하고, 끝내 기독교를 버리는 과정이 담겨 있다. "신앙을 버리긴 했지만 무교(無敎)는 아닙니다. 모든 믿음 안에 유사한 인간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의 종교가 아닌 종교 간의 연결고리를 탐색했죠."

그리고 '하비비'가 탄생했다. 비선형의 서사 구조를 띤 만화는 코란과 아랍 문자를 만화적으로 활용해, 무슬림 노예 소녀와 그의 입양아 하비비가 겪는 15년의 파란만장과 사랑을 그려낸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700쪽의 이 대서사시에 대해 "창의성의 승리"라고 평했다. "그리느라 7년이 걸렸는데 픽션은 자전 만화보다 자유롭지만 신경써야 할 게 훨씬 많았다"고 말했다. 성경과 코란을 거쳐 지금은 도교와 유교를 공부하고 있다. "도교가 강조하는 '자연과의 합일'은 예수가 말한 '사랑'과 맞닿는 것 같아요. 유교의 '예(禮)'는 '도그마(dogma)'를 연상시키죠. 서로 이어져 있다는 느낌입니다."

'하비비' 한 장면. /미메시스

데뷔작 '안녕 청키라이스'(1999) 이후 그의 작업은 종교적 수행에 가까웠다. "끊임없이 그리죠. 가끔은 붓을 잉크로 적셔가며 성서를 베끼는 수도승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아직 붓이랑 잉크로 그리거든요." 에드몽 보두앵 등 프랑스 만화가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림체를 세공했다. 부지런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니 건염(腱炎)이 그의 손에 깃든 건 필연. "돌이켜보면 내 청춘의 상징 같다"고 했다.

걸작이라는 찬사에도, 모두가 환영하는 건 아니었다. 2006년 미국 미주리주(州) 마셜에서는 "'담요'를 공립도서관에서 몰아내자"는 청원이 제기됐고, 지난해 미국도서관협회 역시 축출 만화 10개 작품 중 하나로 '하비비'를 선정했다. 노골적인 성애 묘사 등이 그 이유였다. 그는 "'만화는 어린애들이 보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은 여전히 아쉽다"고 했다. "그래픽노블은 문학의 시각화예요. 한국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그림으로 옮기면 그게 바로 그래픽노블이죠."

어른이 더 열광하는 그의 작품은 내년 초 국내 발매 예정인 근작 '스페이스 덤플린'(2015)을 제외하면 모두 흑백이다. "어린이 독자와 디지털 환경을 고려해 처음 채색 작업을 했다"면서도 "흑백이야말로 그림의 순수성과 개성을 담보하는 작법"이라고 말했다.

흑백은 수묵화로 나아간다. 차기작은 지난해부터 준비 중인 '인삼(人蔘)'. "한의학은 통증의 원인을 다른 기관과의 연결선상에서 추론하죠. 한약의 주요 약재인 인삼에 눈길이 갔어요. 땅과 맞닿아 약효를 키우면서 결국 사람을 닮아가는 식물요." 그는 '인간과 땅의 연결'을 토대로 유년의 기억을 길러낼 계획이다. "화요일에 충남 금산으로 내려갑니다. 인삼 공부 하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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