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검찰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환상 또는 함정

김준기 사회부장 2017. 7. 23. 21:0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새 정부의 본격적인 검찰개혁을 앞두고 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대통령 주재 반부패관계기관협의회에 검찰총장이 참석하는 것을 놓고 검찰 독립이 훼손된다고 우려한다. 청와대가 발견한 박근혜 정부 ‘캐비닛 문건’을 검찰이 수사하는 것은 정치보복이 아니냐고 한다. 과거 정치검찰과 손잡았던 이들이 주로 거론한다는 점에서부터 검찰의 중립성이라는 말에 뭔가 꺼림칙한 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수십년 동안 들어왔던 소리다. 그럼에도 또 제기되는 것은 아직도 이뤄진 게 없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한국 사회를, 한국 정치를 쥐고 흔들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검찰은 그 존재 자체로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기 어렵다는 점이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는 한국 검찰은 어떤 수사를 할지, 말지부터 수사를 어느 방향으로 끌고 갈지, 최종적으로 무슨 결론을 낼지까지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검찰은 수사를 해도 정치적이고, 수사를 안 해도 정치적이다. 그 이유로 어떤 혐의든 검찰 수사를 받는 정치세력들은 정치탄압이라는 말을 쉽게 꺼낸다.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검찰은 정치적 거물이 돼 있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 겉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공허한 이유다.

검찰이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하면 인권과 정의 구현을 위한 검찰권을 행사할까.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정권과 유착되지 않는 것이라고 한정한다면 한국 정치사에 그런 비슷한 적이 있긴 하다. 참여정부 때다. 당시 정권과 검찰의 연결고리인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검찰과 사실상 소통이 없었다. 박근혜 정부 때 우병우 민정수석이 검찰총장을 비롯해 검찰 핵심 간부들과 수백차례 통화한 것과 비교해 보라. 국민들이 선택한 정권으로부터 독립한 당시 검찰은 그야말로 정권의 정체성이나 의지와는 독립된 수사를 했다. 대표적 예가 재독 사회학자 송두율 교수 사건이다. 친북인사로 찍혀 37년간 입국이 금지됐던 송 교수는 김대중 정부에서 참여정부로 남북화해 분위기가 이어지던 2003년 9월 드디어 귀국했다. 그러자 검찰은 그에게 국가보안법상 간첩 혐의를 대거 적용해 구속 기소해 버렸다. 송 교수는 2심과 대법원을 거치며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를 받았다. 안 그래도 정치적 비판을 받았던 수사에 사법적으로도 잘못된 수사라는 결론까지 더해졌다. 지금 검찰의 중립성을 강조하는 이들은 문재인 정부 검찰도 참여정부 때처럼 이런 ‘독립적인’ 수사를 해 주길 바랄 것이다.

검찰은 이후 정권에서 다시 정치권력과 유착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검찰은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을 경고한 MBC <PD수첩>, 정부에 비판적인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정연주 전 KBS 사장 등에 대해 정치 편향이 노골적인 수사를 했고, 이들 모두 법원에서 무죄가 났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청와대 비선 실세를 폭로한 이른바 ‘정윤회 문건’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묻혀 버렸고, 정권과의 유착 의혹이 있는 한국우주항공산업(KAI) 비리 수사는 질질 끌었다. 검찰은 독립해 있을 때나, 정치적으로 유착됐을 때나 문제가 있긴 마찬가지다.

새 정부 들어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 파격적으로 임명될 때도 정치적 중립이 논란이 됐다. 박근혜 정부에서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건을 수사하다 좌천된 전력 때문이다. 그러나 법조계에서는 윤 지검장이 현 정권의 목을 조를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윤 지검장이 정치적 성향이 진보적이거나 박근혜 정권을 싫어해서 국정원 사건을 그렇게 철저히 수사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냥 수사에 목숨 거는 강골 검사일 뿐이다. 문재인 정부에 불리한 사건이 터진다면 국정원 수사 때처럼 밀어붙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사회적으로 파장이 큰 사건을 맡아 성과를 내려는 것은 검사들의 뼛속 깊이 유전자처럼 새겨진 본능이다. 과거 시골 검사가 출세를 위해 ‘한 건’을 노리는 대상은 군수와 경찰서장, 세무서장이었다. 이 중 하나만 제대로 잡아넣으면 일 잘하는 검사로 인정받고 상경해 서울지검, 대검찰청, 법무부를 쳇바퀴처럼 돌며 에이스로 부상할 기회를 잡게 되는 것이다.

검사들이 다 정치적이거나 권력지향적이어서 검찰의 정치적 중립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검찰의 권력이 너무 크기 때문이고, 그 검찰이라는 존재는 검사들의 의식을 결정한다. 선량한 독재는 없다. 정권의 선의, 검찰총장이나 검사 개개인의 정의감으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검찰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환상이 아니라 검찰의 권력을 분산시키는 현실적 노력이다.

<김준기 사회부장>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