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미의 도시&이슈]식민도시서 세계문화유산으로..현대건축의 실험장 '아스마라'

김보미 기자 2017. 7. 23.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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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아프리카 에리트레아

에리트레아 수도 아스마라의 시네마임페로 극장. 전기회로판에서 외관을 본뜬 이 건물은 아르데코 디자인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아스마라 | AP연합뉴스

전기회로 모양 외관의 영화관, 비행기 날개를 얹은 주유소, 입체주의를 구현한 주택.

홍해 연안 동아프리카 작은 나라, 에리트레아의 수도 아스마라는 1930년대 건축가들이 머릿속으로만 그렸던 설계를 현실로 구현한 도시다. 해발 2300m 고지대, 서울 서초구와 비슷한 크기의 땅엔 이탈리아식 건물 400여채가 가득 차 있다. 유네스코가 지난 7일(현지시간) 현대건축의 도시, 아스마라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했다. 도시 전체가, 그것도 현대적 건축물을 보존하기 위해 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처음이다. 유네스코는 “20세기 초기 현대도시를 구현한 이례적인 예”라고 평가했다.

아스마라가 아프리카의 ‘작은 로마’로 불리며 20세기 초 유럽에서 꽃피운 모던 건축의 상징적 도시가 된 데는 오랜 식민의 역사와 맞물려 있다. 아스마라는 1889년 이탈리아가 에리트레아를 점령한 뒤 1897년 수도로 정하고 1911년 인근 항구도시와 연결하면서 본격적인 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야자수와 사바카 나무를 양쪽으로 가지런하게 심은 넓은 도로, 기능별로 구역을 나눠 정비된 골목뿐 아니라 광장과 카페들까지 모두 계획에 따라 들어섰다. 특히 베니토 무솔리니는 아프리카에 제2의 로마 제국을 세우겠다며 아스마라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에티오피아 침공을 앞두고 이탈리아인들이 이웃한 에리트레아로 넘어와 이곳에 정착했다. 1939년 거주민 9만8000명 중 이탈리아인이 절반이 넘었다.

이때 건축가들이 현실의 한계에 부딪쳐 꿈으로 남겨둔 설계도를 들고 이 도시로 찾아들었다. 아스마라는 현란하고 기상천외한 현대건축물의 실험장이 됐다.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 주유소로 지어진 피아트 탈리에로(Fiat Tagliero) 빌딩이다. 항공기를 본떠 설계했는데, 중앙에 사무동을 두고 양쪽에 각 15m짜리 날개 모양 지붕이 얹혀있다. 지지대 없이 힘의 분산만으로 콘크리트 지붕을 설계한 미래파 건축이다. 당국은 안전을 우려해 기둥을 추가하라고 했지만 건물은 1938년 설계대로 완공돼 지금도 온전하다.

아스마라의 주유소 피아트탈리에로 빌딩. 항공기를 본떠 지지대 없이 양쪽 각 15m 길이 날개 모양 콘크리트 지붕을 얹었다. 위키피디아

다른 거리엔 전자기기의 회로판에서 영감을 얻어 외관을 만든 영화관 시네마 임페로(Cinema Impero)가 있다. 지금도 영화를 상영 중인 이 극장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에 둘러싸인 볼링장은 대표적인 아르데코 건축으로 꼽힌다. 오페라하우스는 절충주의를 실험했다. 건물을 두른 기둥엔 사자머리 석상과 파인애플이 새겨져 있다. 입체주의 주택으로 꼽히는 아프리카 펜션과 신로마네스크 풍의 로사리오 성모교회도 있다. 1938년 지어진 세계은행 건물은 세계은행이 본부 사무실로 사들여 이름을 붙였는데 아르데코와 미래파 건축양식이 복합적으로 구현돼 있다. 우체국과 시청, 정부청사는 말할 것도 없고 식당과 가게까지 모두 당시에 지어진 이탈리아식 건축물이다.

그러나 도시의 현대화는 2차 세계대전과 함께 멈췄다. 1952년 유엔이 에티오피아연방을 만들면서 수도 자리도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에 넘겨줬다. 이후 에리트레아는 에티오피아에 맞서 오랜 전쟁 끝에 1991년에야 독립했다. 30년간 이어진 전쟁에도 고지대였던 아스마라는 크게 파괴되지 않았다. 지형적 이점과 함께 건축물들을 지켜낸 것은 역설적으로 에리트레아의 정체였다. 런던대에서 건축을 가르치는 에드워드 데니슨은 “다른 아프리카 나라들은 식민 지배의 유산을 도시개발로 청산해버렸지만 연이어 이탈리아, 영국, 에티오피아의 통치를 받은 에리트레아는 이 과정이 점진적이어서 건축물들이 잘 보존됐다”고 가디언에 말했다.

하지만 26년 독재에 인권 수준이 최하위권을 맴도는 에리트레아는 ‘아프리카의 북한’으로 불리기도 한다.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350달러에 한달에 4000~5000명씩 먹고살기 위해 유럽으로 넘어간다.

<김보미 기자 bomi8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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