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자 키 파악?..경찰과 편의점 주인만 아는 '신장측정표'

심동준 2017. 7. 23.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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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심동준 기자 = 21일 서울 강북구의 한 편의점에 신장측정표가 붙어 있다. 서울 강북경찰서는 지난 3월 중순 관내 편의점과 금은방 약 245곳에 절도 범죄 예방을 목적으로 신장측정표를 배포했다. 2017.07.22 s.won@newsis.com

올초 전국 편의점·금은방 입구 부착…"절도 범죄 예방"
심리적 위축감 유발해 범죄 줄이는 CCTV 효과 기대
미국 사례 계기…부착 사실 대부분 몰라 실효성 의문
시민들 "내 키를 왜 몰래 재나" "기분 나빠" "동의 구해야"
불특정 다수를 '잠재적 범죄자'로 상정…인권 침해 우려

【서울=뉴시스】 심동준 채윤태 기자 = 전국 일부 편의점과 금은방 입구에는 경찰이 절도 범죄 예방을 위해 배포한 신장측정표가 붙어 있다.

올해 초 경찰이 "업소를 출입하는 용의자의 키를 측정해 신원을 파악하거나 심리적 위축감을 줘 범죄 예방 효과를 거둘 수 있다"면서 배포한 것이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의 신체 정보를 임의로 측정한다는 점에서 인권 침해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시민들이 신장측정표가 부착된 것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실효성 논란도 제기되고 있다.

뉴시스 취재 결과 신장측정표가 붙은 편의점을 오가는 시민들은 대체로 부착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평소 드나들던 동네 편의점 등에 신장측정표가 붙어 있다는 사실을 기자에 의해 뒤늦게 알게 된 시민들은 자신도 모르게 키가 측정됐다는 것을 기분 나빠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장측정표가 부착된 서울 강북구 한 편의점 이용자 김병현(40)씨는 "용의자를 찾는다는 취지는 좋을지 몰라도 누가 몰래 내 키가 얼마인지 들여다본다는 것이 기분 좋지는 않다"며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 불심검문을 하는 차원이면 몰라도 평소에는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박지민(27·여)씨는 "신장측정표가 있는지도 몰랐다. 키만 안다고 잡힐 것 같지도 않은데 필요한 것인지 의문"이라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내 키를 슬쩍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는 않다. 사우나에서 누군가 내 몸무게를 쳐다보면 기분 나쁘지 않나"라고 말했다.

김순철(67)씨는 "신장측정표를 본 것은 같지만 뭐에 쓰는 물건인지 몰랐다. 이용자가 목적을 모르는데 범죄 예방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라며 "효과가 충분하지 않은데도 사람들이 기분 나빠할 스티커를 부착한다는 것은 반대다. 불편해 할 사람이 있다면 동의를 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황현주(18)양은 "내 키가 나도 모르게 측정된 것 아니냐.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다"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60대 전직 경찰 박모씨는 "범인도 신장측정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범죄 예방 효과가 있는 것 아니냐. 다른 손님들도 이런 게 붙어 있는 줄 모를 것"이라며 "키 재는 도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을 받는데 기분 좋을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경찰에 따르면 신장측정표가 전국 편의점 등에 부착된 계기는 내부망에 '미국의 세븐일레븐에서 신장측정표를 부착해 효과를 본 사례가 있다'는 내용의 게시물 때문이었다. 환경 개선으로 범죄 발생을 억제하는 기법인 '범죄예방환경설계'의 사례로 소개된 것이다.

해당 게시물을 토대로 일선 경찰서는 자체적으로 신장측정표를 도입했다. 실제로 서울 강북경찰서는 지난 3월 중순 관내 편의점과 금은방 약 245곳에 신장측정표를 배포했다. 지방 경찰서에서도 신장측정표를 활용하고 있다.

【대구=뉴시스】박준 기자 = 대구 서부경찰서는 4일 대구 서구 북부정류장 일대 외국인 출입업소, 편의점, 은행, 노래방을 대상으로 범죄 신고 방법과 홍보 문구가 프린트된 신장측정표를 배포했다. 신장측정표는 폐쇄회로(CC)TV에 찍힌 범인의 영상으로 인상착의를 특정하는 데 중요한 수사단서로 활용 가능하고 범인들에게 자신의 키가 노출되는 심리적 부담감을 줌으로써 범죄율이 시행 전보다 감소하는 효과를 줄 수 있다. 2016.10.04.(사진=대구 서부서 제공) photo@newsis.com

경찰은 신장측정표가 심리적인 위축감을 유발해 범죄 가능성을 줄이는 이른바 '동기 예방 효과'를 불러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CC(폐쇄회로)TV가 설치된 곳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스스로 행동을 조심해 범죄 발생이 감소하는 것과 같은 맥락의 예측이다.

신장측정표를 배포한 한 일선서 관계자는 "내부망에 올라온 미국 사례를 보고 자체적으로 도입 결정을 했다. 관내 편의점과 금은방 등에 취지를 설명하면서 스티커를 배부했으며 주기적으로 훼손되지 않았는지 관리도 한다"면서 "용의자 검거에 실제 활용된 적은 없다. 그렇지만 지출이 적은 데 비해 범죄 예방 효과는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 편의점을 이용하는 시민 상당수가 존재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신장측정표가 범죄 심리를 억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범죄 예방을 불러오는 심리 효과는 어디까지나 '저 곳에는 내 신원이 드러날 수 있는 스티커가 붙어 있다'라는 점을 용의자가 인지하고 있을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장측정표를 배포한 경찰서와 일선서 사이에 부착 개수조차 서로 달리 파악하고 있어 추후 범죄 예방 효과를 제대로 검증할 수 있겠느냐는 비판도 나온다. 실제로 강북서는 송천동과 송중동 일대에 배부된 신장측정표 개수를 30개로 파악하고 있었으나 해당 지역을 관할하는 파출소에서 실제로 배부해 관리하고 있는 측정표 개수는 27개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신장측정표라는 표식만으로 예비 강도의 심리를 자극하는 효과를 보겠다는 것인데 부착 사실을 경찰과 편의점주만 알고 있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라며 "신장측정표의 예방 효과라는 것은 아직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부착만 여러 곳에 많이 한다고 효과가 커진다고 보긴 어렵다"고 분석했다.

신장측정표가 불특정 다수 시민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도 문제시되는 부분이다. 해당 업소에 드는 사람 전부가 '잠재적 범죄자'일 가능성을 전제하고 배포된 도구이기 때문이다. 키가 개인에 따라 민감한 신체정보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인권 침해 우려가 상당하다는 비판도 나온다. 부착 사실을 모르는 시민들은 결국 인식하지 못한 채 신체정보를 측정당하는 셈이 된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편의점 고객들을 모두 예비 범죄자로 간주하는 발상 자체가 문제"라며 "범죄 예방과 범인 검거 효과가 뚜렷하게 입증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불특정 다수의 신체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경찰의 잘못된 인식이 반영된 반인권적인 행위"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도 "생체정보일 수도 있는 정보까지 왜 수집하느냐는 비난도 충분히 가능하다. 키 작은 사람이면 더 싫어할 수도 있겠다. 불쾌해하는 손님들이 업소를 방문하지 않을 수도 있다"며 "신장측정표를 도입하려는 발상 자체가 조금 검증되지 않은 것 같다. 그렇게 해야 할 명분과 논리도 부족해 보인다"라고 지적했다.

s.won@newsis.com
chaideseul@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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