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찬의 軍] 어느 군인의 탄식.. "군대에 사람은 많지만 군인은 없다"

박수찬 2017. 7. 23.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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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군대를 보면 사람은 많은데 진정한 군인을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만난 한 군 관계자가 탄식을 담아 기자에게 한 말이다. 60만명에 가까운 병력을 보유하고 있는 군이지만 그들 중 진정으로 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게 임하며 근무하는 군인들은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군인을 군인답게.’ 2000년대 이후 집권한 정치권력들이 이념의 성향과 관계없이 강조했던 사안이다. 노무현정부는 강력한 국방개혁을 통한 ‘판 흔들기’를, 이명박정부는 파이트 투나잇(Fight tonight)을 외치며 군 전력을 강화하려했지만 항공모함처럼 거대한 군 조직은 쉽게 바뀌지 않고 있다. 하나회나 알자회 같은 군 내 사조직은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사라졌지만 군인을 군인 본연의 임무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은 지금까지도 갖춰져 있지 않다. 오히려 군인은 일반인처럼, 끈끈한 전우애에 기반한 공동체 의식은 ‘나부터 살고 보자’식의 경쟁의식으로 바뀌는 것이 현실이다.

과학화훈련에 참가한 육군 병사가 전방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다.
육군 제공
◆ “1등을 해도 진급한다는 보장이 있나”

매년 영관급 장교들의 진급심사가 시작될때마다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가 있는 서울 용산 일대에서는 군인들의 저녁 모임이 심심치 않게 열린다. 육해공군 본부가 있는 계룡대 인근에서도 마찬가지다. 모임의 대부분은 진급을 앞둔 사람들을 위한 초조주(焦燥酒) 모임이다. 자신이 진급할 수 있는지 탈락할 것인지를 걱정하며 초조해하는 진급대상자를 위해 동료나 선후배들이 술을 사주는 자리다. 어떤 경우에는 ‘넌 진급이 확정됐을 것이니 걱정마라’는 의미에서 확신주를 마시기도 한다. 진급심사 결과 진급이 확정되면 축하주, 떨어진 사람은 위로주가 기다린다.

초조주와 확신주는 군인들에게 진급이 얼마나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가를 잘 보여준다. 군에는 계급정년제도가 있다. 진급을 하지 못하면 일정 기간 후 전역해야 한다. 그런데 육군 기준으로 중령이 되지 못하면 전역을 해도 군인연금을 수령하지 못하고 전역일시금을 받는 경우가 발생한다. 20년 이상 복무하고 퇴역한 사람에게 지급한다는 군인연금 규정 때문이다. 안정적인 군인연금을 수령할 여건을 만들고, 사교육비 등 씀씀이가 커진 가정을 부양하며, ‘기왕 직업군인이 되었으니 장군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합쳐지면, 군대는 신성한 국가안보의 보루에서 생존경쟁의 장으로 바뀐다. 사관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해 소위로 임관하면 20년 이상 근무한 뒤 장군이 되고, 장군으로 전역했다가 사망하면 국립현충원에 묻히는 것 외에는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육군 수색대원들이 비무장지대를 순찰하고 있다.
육군 제공
문제는 조직을 위해 열심히 일해 거둔 성과가 진급심사에서 제대로 반영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내가 속한 조직에서 1등을 하면 반드시 진급한다’는 보장이 있을까. 실상은 다르다. 국회 국방위 소속 국민의당 김동철 의원의 지난해 국회 국방위 육군본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2015년 육군 준장 진급자 58명 중 국방부, 합참, 한미연합사, 육군본부 등 정책부서 출신 진급율(12.9%)이 야전(5.1%)에 비해 2.5배나 높았다. 육군 소령→중령 진급도 육사 출신은 진급율이 50%대 이상이었으나 비(非)육사 출신은 10% 수준에 그쳤다. 중령→대령 진급도 육사 출신은 진급율이 16%였으나 비육사 출신은 3%에 불과했다.

1등이 진급한다는 보장 대신 출신이나 근무지 등이 진급에 더 영향을 미치다보니 진급심사를 앞둔 시점에서는 음해가 난무한다. 위관급 장교 시절에는 친한 동기생이 영관급 장교 때는 진급 경쟁자가 되고 장군이 되면 북한군 못지 않은 적이 되는 것이 대한민국 장교단이다. 진급에 실패해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경쟁자인 동기생의 약점을 들춰내거나 자신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상급자가 요직에 부임하는 것을 막기 위해 투서를 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남이가’식의 공동체 문화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눈치보기도 판을 친다. 대장급 군 수뇌부 인사를 앞두면 야전부대에서는 총장은 누가 되는지, 야전군사령관이나 군단장, 사단장에 임명될 사람은 누구인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운다. 서울에 근무하는 장교들은 일선에서 걸려오는 문의전화에 대응하느라 몸살을 앓는다. 어떤 사람이 장관, 총장이 되는가에 따라 생사가 결정되는 풍토에서 진급하려면 “줄을 잡아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이 군에 확산되어 있는 것이 원인이다. 결국 장교들의 시선은 그들이 주적(主摘)이라고 말하는 북한 대신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 청와대가 있는 서울로 향한다. 기무사령부와 헌병, 검찰 등 감찰기관들이 장교들의 신원을 관리하면서 그 결과가 진급심사에 반영되는 점을 의식해 ‘관리’에 들어가기도 한다. 이 과정에는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동원된다. 선후배들을 찾아다니는 것은 기본이다. 이렇게 군인들이 한눈을 파는 사이 군대는 서서히 활력을 잃고 관료조직으로 바뀌어버린다.

육군 포병부대원들이 훈련이 시작되자 사전에 정해진 위치로 달려가고 있다.
육군 제공
◆ 궂은 일 도맡는 군인이 인정받는 군대가 필요하다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군에서 전역해도 안정적인 지위를 얻을 수 있다’는 인식을 장교들에게 심어줘야 한다. 군인연금을 수령할 수 있는 ‘군복무 20년 이상’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채 전역해도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대안이 있다면 진급과 복무연장에 필사적일 이유가 없고, 진급 경쟁도 치열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제대군인 취업 지원 정책은 국방부 차원에서도 중시하는 대표적인 방안이다. 제대군인 취업박람회를 열고, 전역 예정자에게 직업교육과 재취업을 알선하며 자격증 취득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지원책이 시행중이다.

하지만 제대군인 취업 지원이 확실한 대책이 되기는 어렵다. 영관급 장교 상당수가 해당되는 40대는 생애주기에서 지출 규모가 급증하는 시기다. 자녀가 초등학교, 중학교에 입학할 시기로 교육비 부담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전역해서 재취업을 해도 영관급 장교로서 받는 급여와 수당, 복지혜택보다 같거나 더 크다는 보장은 없다. 창업을 할 경우 실패할 가능성이 더 크다. 자녀가 대학에 진학하는 50대가 되면 지출규모는 생애주기에서 최고 수준에 이른다. 무조건 중령, 가능하면 대령까지 진급해야 가정을 부양할 수 있다. 오랫동안 군에서 생활해 사회에 진출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심리도 군생활에 대한 집착을 키우는 요인이다.

특전사 대원들이 무술 시범을 보이고 있다.
육군 제공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모두가 승복할 수 있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인사제도의 확립이다. ‘내가 속한 조직에서 1등을 하면 진급한다’는,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궂은 일도 묵묵히 해내는 장교가 우선적으로 진급하는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군의 인사 제도 개선은 군 조직은 물론 국가의 안보와도 직결된 중대한 문제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의 경우 그 시작은 승진에 불만을 품은 육사 8기생들이 고위 장성들을 공격한 ‘하극상 사건’이 시초였다. 국가로부터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느낀 장교들이 무력으로 민주주의 헌정을 뒤엎었다는 점에서 군 인사 문제는 국가안보의 위협 요인이기도 하다. 

국군 장병들이 2013년 10월 1일 국군의날 행사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옛날에는 군이 사회의 변화를 이끌었다. 민간 사회보다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지닌 군은 사회 변화와 발전을 주도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민간 사회가 다양한 배경과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하나로 뭉쳐 대통령을 탄핵하는 건강한 공동체 의식을 보여주는 동안 군 조직의 구성원들은 살아남기 위해 동기생과 '너 죽고 나 살자‘식의 치킨게임을 벌였다.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군과의 대결에 전념해야 할 군대가 인사 문제로 홍역을 앓으면서 군은 공동체 의식마저 흔들리고 있다.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는 군인들이 왜 시민들보다 낮은 수준의 공동체 의식을 보여주는 것일까. 지금 당장 전쟁이 터지면 군대의 핵심 가치인 전우애와 단결력을 기대할 수 있을까. 군사력의 근간은 첨단 무기가 아닌, 구성원의 사기와 헌신에 있다. 그리고 합리적인 군 인사제도 확립은 군대를 진정한 군인들의 집단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다. 이 문제에 대해 군인들도 정부도 더 이상 무관심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적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는 동기생과 진급과 보직을 놓고 경쟁하는 데 골몰하는 군대는 내부에서 무너진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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