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 듯 영화 아닌 영화 같은..삼성에선 그날 어떤 일이

2017. 7. 22.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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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커버스토리

이재용 재판기록의 재구성

2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 311호 법정. 뇌물공여 혐의 등으로 구속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재판이 열렸다. 지난 4월7일 이후 43번째다. 그동안 재판은 일주일에 두세번씩 열렸다. 길게는 새벽 두세시까지 진행된 적도 있다. 이 부회장의 1심 구속기간(6개월) 만료일은 8월27일, 앞으로 남은 기간은 한달이 조금 넘는다. 예상대로라면 8월초에 결심공판이 열린 뒤 중순께 재판부가 1심 판결을 내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항소심으로 이어져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 100여일간 법정에선 수개월간 수사를 진행한 특검의 창과 삼성 쪽 변호인들의 방패가 날카롭게 맞섰다. 이 부회장의 재판 과정에선 특히 지금껏 수십명의 증인이 출석해 증언을 했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 각 분야 전문가들은 어떻게 특정 재벌의 이해관계 속에 ‘포섭’됐는지, 핵심부처 고위 공직자 출신으로 삼성 혹은 외곽에 둥지를 튼 고문들은 사실상 총수 일가에 도움을 주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열심히 움직였는지, 그 실상을 가늠해볼 수 있는 생생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동안 베일 속에 꽁꽁 가려진 ‘또 하나의 가족’의 진면모가 법정을 무대로 슬그머니 노출된 것이다. 마치 영화 속 익숙한 장면과도 같은 이재용 부회장의 재판 기록을 재구성해봤다. 사진은 이재용 부회장이 지난 2월26일 오전 서울 대치동 특별검사 사무실로 소환되고 있는 모습이다. 글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2015년 7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안을 처리할 임시 주주총회를 앞두고 삼성그룹의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은 분주히 움직였다. 두 회사의 합병비율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승계에 유리하도록 잘못 산정됐다는 논란이 일었고,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서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에 찬성을 종용한 사실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와중에 밝혀졌다. 이재용 부회장의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영화 속 한 장면과도 같은 삼성의 행태를 살펴보자.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안 처리를 앞두고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의 움직임이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던 당시, 삼성 미래전략실 고위층은 연줄이 닿는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회 위원들을 상대로 총력전을 편 것으로 드러났다. 사진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2월16일 오전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으러 법원으로 가기 전 서울 대치동 박영수 특별검사 사무실에 들어서고 있는 모습.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영화는 현실을 투영한다. 실제로 벌어졌거나 앞으로 있을 법한 일을 다룬다. 재벌이 등장하는 영화도 마찬가지다. 재벌 3세가 등장한 <베테랑>에서 경찰청장 출신의 회사 고문을 활용해 로비에 나서는 모습, <내부자들>이나 <범죄와의 전쟁>에서 연줄이 큰 힘을 발휘하는 장면은 우리 사회의 현실과 정확히 포개진다. 반면 결론에서는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 영화에선 정의가 승리하거나 ‘착한 편’이 역경을 딛고 이기곤 한다. 현실에선 정의가 무릎을 꿇거나 이긴 쪽이 정의의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다반사다. 그래서일까? <내부자들>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정의? 대한민국에 그런 달달한 것이 남아 있긴 한가?”

지난 2월 구속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뇌물’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국내 최대 재벌 삼성의 행태는 여러 영화에서 그려진 재벌의 모습과 정확하게 겹친다. 몇몇 영화와의 비교 형식을 빌려, 이재용 부회장의 재판 기록을 지면으로 재구성해봤다. 기사에서 언급된 인물의 직책은 모두 당시의 것이다.

#1. 연줄이 힘이다

“내가 인마, 느그 서장이랑 인마. 어저께도 같이 밥 묵고, 사우나도 같이 가고. 다 했어.”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익현이 자신을 잡아들인 형사의 기를 누르려 꺼낸 말이다. 또 ‘경주 최씨 충렬공파’라는 혈연을 들먹이며 깡패에게까지 연을 넓혔다. <내부자들>에서 우장훈 검사가 출세하려고 악다구니를 쓴다는 인식을 주변에 주는 것도, “자격지심 보이고 그러지 말어. 그냥 추하니까”라는 핀잔을 기자한테서 듣는 것도, 이렇다 할 학연을 만들지 못한 탓이 컸다.

이재용 부회장의 재판 과정에서도 ‘연줄이 곧 힘’이라는 공식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중 하나가 한양대 파워다. 등장인물은 법대(81학번) 출신인 이수형 삼성 미래전략실(미전실) 기획팀장(부사장)을 비롯해 5명이다.

2015년 7월4일 토요일, 서울 서초구 삼풍아파트 근처의 한 일식집. 한양대 동문 세명이 모였다. 홍완선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과 김아무개 한양대 교수(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회 위원장), 원아무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 등이다. 이들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서로 인사를 나눈 적은 있지만, 사석에서 만난 건 처음이었다.(※이날은 삼성물산-제일모직의 합병 안건을 다룰 두 회사의 임시 주주총회가 각각 열리기 약 2주 전이다.)

애초 김 교수는 이날 자리를 피하고 싶었으나, 경제학과 동기인 원 연구위원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원: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관련해 홍(완선) 선배가 김 교수 의견을 들어보고 싶어하니 한번 만나자.

김: 합병 관련해 골치 아파 아무도 연락 안 하고 있다. 굳이 만나고 싶지 않다.

원: 선배인데 무슨 일이 있겠느냐?

모임에 큰 관심을 보인 다른 한양대 출신 인물이 있었다. 이수형 기획팀장과 손아무개 <매일경제> 국장. 손 국장은 모임 며칠 전에 이를 알게 됐고, 이 팀장에게 알려줬다. 다시 이 전 팀장은 문자메시지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원 연구위원에게 ‘바람’을 전했다.

이: 안녕하세요. 저는 법대 81학번입니다. 상대 선배님들도 가깝게 느꼈습니다. 저희 그룹으로서는 다른 어떤 사안보다도 중요해 이 일이 잘못되면 그룹 경영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밖에서는 잘 모를 겁니다. 토요일 선배님들께서 해주시는 일이 정말 중요해, 과장이 아니고 저희 그룹을 결정적으로 도와주시는 겁니다. 뵌 적도 없는데 과중한 부담 드려 죄송합니다.(2015년 7월2일)

다음날 원 연구위원은 답장을 보냈다.

원: 김 교수가 위원회 분위기를 잘 이끌어달라고 전달했습니다.

7월4일 못마땅한 식사 자리에 나온 김 교수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원: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판단할 사안이며 삼성의 논리가 부족하고 삼성의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얘기를 두 분이 하셨습니다.

이: 잘 알겠습니다. 결례가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은 장충기 삼성 미래전략실 사장에게 곧장 보고됐다.

이: 오늘 점심때 홍(완선 기금운용본부장)과 원(아무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박사)이 김 위원장을 만나서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원 박사 이야기 들어보니 김이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홍과 원이 열심히 설득했는데 김은 삼성의 논리가 부족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고 하니 몇 차례 더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장: 그럼 홍이 책임지면 됨.

장충기 사장의 답신 문자에 대해, 특검은 홍완선 본부장이 의결권 행사 전문위에 부의하지 않고 직접 투자위원회를 열어 국민연금의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원 연구위원은 <한겨레>에 “약속을 알고 있는 이수형 팀장이 계속 메시지로 커피나 한잔하면서 대화 내용을 알고 싶다고 했으나 만남을 피하고 메시지로 원론적인 대화 내용만 전달했다”며 “장 사장에게 설득했다고 보고한 것은 이 팀장의 역할이 동문을 동원하는 것이고, 자신이 노력해 동문들이 만나서 노력했다는 논지를 유지하기 위해 설득한 것처럼 보고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 교수 역시 “원 연구위원은 배석만 했을 뿐 특별한 말은 없었다”고 밝혔다.

국민연금은 삼성물산의 최대주주로 삼성물산-제일모직의 합병 안건을 통과시키는 데 핵심 열쇠를 쥐고 있었다. 국민연금의 입장을 결정하는 건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이지만, 삼성물산 합병 건처럼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경우에는 전문위로 공이 넘어간다. 이 때문에 당시 세간에선 전문위가 열려 국민연금 입장이 결정될 것이라 생각했다.

삼성 쪽 역시 전문위원들의 프로필을 보고 연결고리를 찾느라 분주했다. 이수형 팀장은 동문이라는 이유로 자신이 김 교수를 담당하기로 했다. 비슷한 시기 김종중 삼성 사장(미래전략실 전략1팀장)은 삼성경제연구소장으로 내정된 차문중 박사를 통해 박창균 중앙대 교수를 만나 삼성의 입장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삼성 쪽 변호인은 “합병 성사를 위해서 전사적으로 노력한 것이고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장충기 전 사장이 이수형 팀장에게 보낸 ‘그럼 홍이 책임지면 됨’이라는 문자는 마치 홍이 김 교수를 상대로 설득한 것처럼 오해를 부르지만, 실제로는 설득한 사실이 없다”고 밝혔다.

삼성이 김 교수나 접촉한 전문위원들의 뜻을 바꾸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전략 변경’에 참고가 됐을 법하다. 김 교수를 포함해 9명으로 구성된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전문위에서 5명의 찬성표를 얻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에는 상위기관인 국민연금공단을 건너뛰고 보건복지부에서 직접 나서 압력을 행사했다. 문형표 복지부 장관은 부하 직원에게 합병이 될 수 있도록 “100% sure(슈어)”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김 교수를 포함해 9명의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들 성향을 파악했다. 문 장관은 직접 전문위 명단을 살펴보다 전문위원 가운데 박창균 교수를 안다며 “내가 박 교수한테 전화해볼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복지부의 조남권 연금정책국장과 최홍석 국민연금재정과장은 2015년 6월30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9층 사무실에서 홍완선 본부장을 만났다.

홍: 복지부에서 기금운용본부 의사 결정을 두고 이런 식의 방문은 없었다. 투자위에서 복지부 압력에 의해 결정했다고 하면 됩니까?

조: 삼척동자도 다 그렇게 알겠지만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2. 금품 제공은 필수?

<베테랑>에선 죄를 지은 재벌 3세를 보호하기 위해 온갖 편법을 동원하는 모습이 나온다. 최 상무는 수사를 맡은 형사를 설득할 수 없자 그의 아내를 만난다. 명품백 안에 5만원짜리 돈다발을 넣은 채로. “최근에 집 때문에 은행 대출도 받았다고 들었는데, 많이 힘드시죠.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자녀분 교육도 대학 입학 때까지는 저희 회사 교육사업부에서 충분히 지원해드릴 수 있고요. 남편분 설득 좀 해주세요.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고려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삼성물산 합병 과정에선 국민연금 이외에도 대주주인 일성신약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2015년 기준 매출 617억원인 작은 제약회사에 눈길이 쏠린 것은 이 회사가 보유한 삼성물산 주식 때문이었다. 삼성물산 합병 당시 일성신약은 삼성물산 지분 2.11%(약 330만주)를 보유했다. 이건희 회장(1.37%)보다도 지분이 많았다. 당시 주주총회 결과 찬성이 출석 주식 중 69.53%가 나와 마지노선인 66.66%를 겨우 넘긴 것을 고려하면 무척 중요한 지분이었다.

일성신약은 원래 삼성과 인연이 깊다. 창업주인 윤병강 회장은 1950년대 들어 항생제 수입 등 무역업을 하면서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이 회장의 사업 수완에 감복해 존경심을 가졌다고 한다. 한때 일성신약에서 사용하는 제품이나 서비스에 ‘삼성’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고는 결재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이병철 회장의 흥업은행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몰수돼 한일은행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81년 민영화되는 과정에서 윤 회장이 한일은행 대주주로 참여한 것도 이 회장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윤 회장은 미래에셋대우증권(옛 대우증권)의 전신인 동양증권을 창업한 ‘증권업계 1세대’이기도 하다. 그는 제약회사를 운영하면서도 주식시장에 큰 관심을 기울여 에스케이(SK)와 한국전력공사, 현대오토넷 등 투자로 큰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대주주인 만큼 삼성물산과 접촉도 잦았다. 2015년 3월 경남 남해에선 삼성물산 최고재무책임자(CFO)가 바뀐 것을 계기로 골프 모임이 열렸다. 그해 1월, 이영호 경영지원실장이 미래전략실에서 자리를 옮겨왔던 것. 김신 사장, 이영호 부사장 등이 함께한 이날 골프 모임에서 윤 회장은 삼성물산 합병으로 이재용 부회장의 승계 작업이 진행될 때 소액주주에게 손해가 안 가는 방향으로 해달라는 취지의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성신약과 삼성물산의 관계에 금이 간 건 그로부터 두달 뒤인 5월. 윤 회장의 바람과는 달리 삼성물산 주주에게는 손해 볼 수 있는 1(제일모직):0.35(삼성물산)라는 비율로 합병을 결정해서다. 이어 미국계 헤지펀드인 엘리엇매니지먼트가 등장해 팽팽한 표대결이 예상되면서, 일성신약은 구애의 대상이 됐다. 엘리엇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총괄 투자책임자인 제임스 스미스 대표가 직접 일성신약을 방문해 합병 안건을 반대하도록 설득했고, 삼성물산 김신 사장(상사부문) 등 임원들도 하루가 멀다 하고 회사를 찾아 찬성표를 종용했다.

삼성은 그해 6~7월에는 윤병강 회장은 물론 윤석근 부회장을 자주 만났다. 합병을 결정할 주주총회가 열리기 대략 한달 전이다. 윤 회장은 삼성 임원을 두차례, 아들 윤 부회장은 네차례 만났다. 일성신약 쪽은 당시의 잦은 만남에서 삼성 쪽이 은밀한 제안을 해왔다고 주장한다. 일성신약 윤석근 부회장과 관계자들의 법정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해보면 이렇다.

삼성: 오래전부터 남영동 낡은 건물을 새로 올리려고 하는데 잘 안 됐다고 들었다. 우리가 신사옥 건설을 맡겠다.

일성: 38층 정도 지을 계획이라 약 1500억~1800억원 정도 들 텐데. 서울 용산구 남영동 부지에 예상 건축 비용 500억원(땅값 제외) 정도의 40층 건물을 지으려고 계획하고 있지만 구청이나 서울시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아 10년째 답보 상태다.

삼성: 건설 비용은 전혀 받지 않겠다.

일성: 우리가 찬성하면 소액주주들은 손해를 보게 되는데 이런 식은 정당하지 않다. 뒤로 이렇게 보상하는 것은 언제든 문제가 될 것이다.

신축 건물 건설 제안은 거절당했다. 주총 날짜가 임박한 7월이 되자 삼성 쪽은 보유 주식을 비싼 값에 사주겠다는 새로운 카드를 꺼냈다.

삼성: 일성신약이 보유한 주식을 9만원에 사겠다. 다만, 케이씨씨(KCC)가 삼성물산 자사주 매입 때 7만5천원으로 해서 그 이상으로 하기는 어렵다. 장외 거래를 통해 주당 7만5천원의 가격으로 하고, 차액인 1만5천원에 대해서는 4가지 방안에 대해 사이드로 보상하겠다.

일성: 말도 꺼내지 말라.

삼성: 그것도 합법적으로 한다.

하지만 만난 장소는 같아도 주고받은 얘기에 대해선 서로의 주장이 180도 다르다. 하나의 사건을 각자에게 유리하도록 기억하는 <라쇼몽>처럼. 삼성 쪽은 일성신약과는 정반대 주장을 편다. 삼성물산 김신 사장과 변호인 쪽의 법정 주장은 다음과 같다.

삼성: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하면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성장시킬 수 있고, 시너지 효과가 있다. 합병에 찬성해달라.

일성: 우리 사옥을 새로 개발해야 하는데.

삼성: 2013년에 삼성이 건물 지어주면 어떠냐 제안했는데 그때 저희 실무팀에서 하기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살펴볼까?

일성: 아니, 됐어요.

삼성: 합병 찬성의 대가로 일성신약 주식을 비싸게 사면, 엘리엇이 즉시 삼성물산 이사들을 배임 및 상법 위반죄로 고소하고 손배소가 확실하다. 도저히 들어줄 수 없다.

일성: 엘리엇이 울타리 안에 들어왔는데 그냥 나가겠느냐? 보상해줘라. 그럼 다른 주주들도 좋아한다.

삼성: 법적으로 불가능하다.

일성: 삼성이 법을 고칠 수 있지 않냐?

엇갈리는 기억은 또 있다. 윤석근 부회장은 국회 청문회와 법정에서 “7월9일 식사에서 ‘국민연금이 반대하면 내 찬성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으니 김신 사장이 ‘국민연금은 다 됐다’고 말했다. 그 말 듣고 아직 결정나기도 전인데 그렇게 말해 ‘역시 삼성은 다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밝힌 바 있다. 반면 김신 사장은 법정에서 “7월9일이면 7월10일 (국민연금 기금운영본부의) 투자위가 열리기 전인데 의사결정도 안 된 것을 단정적으로 어떻게 말했겠나. 말도 안 된다”며 이를 부인했다. 두 사람 가운데 한명은 위증을 하고 있는 셈이다.

양쪽이 서로 다른 주장을 펴고는 있지만, 잦은 만남 자체는 사실이다. 특히 윤석근 부회장은 2015년 3월 김신 사장을 골프장에서 처음 만난 뒤 4개월이 지난 7월초에만 네차례나 만났다. 7월6일 서울 청담동 일식당 만남을 시작으로, 7월9일에는 김신 사장과 김태한 삼성바이오로직스 사장과 저녁을 함께했다. 이어 7월13일과 15일에는 김신 사장과 김종중 삼성 사장을 만났다. 일성신약의 찬성표를 얻고자 애가 탔던 삼성 쪽의 분위기를 잘 엿볼 수 있다.

“이러면 후회하실 텐데요.” <베테랑>에서 최 상무가 돈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은 서도철 형사의 아내에게 한 말이다. 하지만 결말에서는 오히려 최 상무가 감옥에 갔다. 윤병강 회장은 지난해 <한겨레>와 만난 자리에서 “삼성이 부당하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안다. 또 삼성이 어떻게 강한지도 안다. 한데 이번에는 좀 심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1년 뒤,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해 삼성 관계자들은 줄줄이 법정에 서 있다.

#3. 고문이 뛴다

<베테랑>에서 신진그룹엔 고문이 한명 있다. 그는 경찰청장 출신으로 조 회장의 아들 일을 무마하기 위해 발 벗고 뛰어다닌다. “그래서 말인데, 정 고문님이 경찰청장 출신이잖아. 정 고문님 찾아가서 관할 서장 라인 통해서 서도철 형사 푸시 좀 해달라고 부탁하려고.”(최 상무) 신진그룹 총수 조 회장도 고문의 씀씀이를 잘 알고 있다. “명성일보 석 회장한테 전화해서 끊었던 광고 다시 트고 기사 막았다. 정 고문은 뭐한 거야? 이럴 때 문제 잘 해결하라고 명함 파준 거 아닌가?”(조 회장)

이재용 부회장 재판 과정에서도 고문들의 평소 역할이 드러났다. 이들은 감사원이나 공정거래위원회 등의 고위 관료를 지낸 뒤 삼성 계열사나 법무법인 김앤장의 고문으로 취업했다. 감사원 출신의 박의명 삼성증권 고문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1979년 감사원에 들어와 감찰담당관실 과장, 재정금융국 과장을 거쳐 감찰관실 국장을 지냈다. 박 고문의 법정 증언과 장충기 사장에게 보낸 문자메시지는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박: 메르스 때문에 감사원이 삼성서울병원을 감사하는데 저는 국장을 맡았고, (감사원 출신의 삼성카드) 정태문 감사는 과장 및 실무자를 맡기로 했다. 전체 총괄은 이수형 팀장이 담당했고, 감사원 수감 부문은 제가 총괄을 맡기로 했다.(증언)

박: 엊저녁 감사원 사회복지감사국장을 만났더니 BH(청와대)에서 전염성 질환 관리 실태에 대한 감사 요구가 있어 메르스가 진정된 후 보건복지부, 삼성의료원 등에 감사를 실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가능한 한 감사 시기를 늦춰주고 착수 전에 미리 얘기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문자메시지)

박: 방금 감사위가 끝났는데 삼성 관련은 예상 문제점 8건 중 7건은 처분 요구 없이 종결. 14번 환자 접촉자 보고지연건 1건만 복지부 장관으로 하여금 전염병 예방법 위반으로 조치하도록 의결됐습니다.(문자메시지)

박: 당초 처분 요구서에는 감염병 관리법 위반으로 고발 등 적정한 조치를 하라고 돼 있으나 제 입장을 고려해 의료법 등 관계 법령에 따라 적정한 조치를 하라고 내용을 수정했다고 합니다. 전염병 관리법 위반이 되면 벌금이 부과되나 의료법 위반이 되면 행정벌이 가능합니다.(문자메시지)

이를 두고 박 고문은 “과장한 면이 있다. (감사원) 대심제도에서 삼성병원 쪽 법률대리인 김앤장 의견이 받아들여져 의료법 위반으로 변경된 것인데, 내가 신(아무개 감사원 사회복지감사국) 국장이 제 입장을 고려해 변경한 것처럼 보고했다”고 밝혔다. 또 삼성서울병원에 대한 감사원 감사 수감을 총괄한 것에 대해선 “감사원이 오해하지 않도록 사안을 잘 설명하는 가교 역할”이라고 밝혔다. 삼성 쪽 변호인 역시 “마치 메르스와 관련해 삼성에서 청탁한 것처럼 오해하고 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박의명이란 사람은 삼성증권 고문으로 일했고, 사실 고문 계약이 끝나는 지위였다. 로비보다 박의명 고문이 자기가 열심히 한다는 피아르(PR) 차원에서 문자를 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특검은 “깨알 같은 로비를 했다”며 “고위직 공무원으로 있다가 삼성그룹 내 계열사 고문, 감사로 온 사람들의 역할이 자기 출신 부처의 인사 동향, 규제 강화 동향 등을 파악해 장충기 전 사장에게 보고하는 것이라는 진술도 있다”고 밝혔다.

당시 박의명 고문은 퇴직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가 떠나면 비슷한 부처 출신 전직 공무원이 자리를 메우는 것이 상식이었다. 지난해 7월 삼성물산 고문으로 자리를 옮긴 서남교 전 공정위 과장의 사례를 보자. 그가 물려받은 자리 역시 공정위 출신인 ㄱ씨가 9년간 맡던 자리다. ㄱ씨 후임으로 서 전 과장이 왔다. 그는 김학현 공정위 부위원장에게 문자메시지로 “삼성물산과 계약했다. 적당한 시일 내에 식사 한번 모시겠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공정위 부위원장 출신인 서동원 김앤장 고문도 삼성 쪽 대리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한때 부하 직원인 김학현 부위원장에게 여러가지 부탁을 했다. 김 부위원장은 공정위 실무 과장에게 “서동원 전 부위원장에게 나중에 연락 오면 잘 들어보라”고 전했다. 또 2015년 12월 열린 공정위 전원회의 뒤에는 김 부위원장과 수차례 전화 통화로 내용을 파악하기도 했다.

“삼성이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을 회유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유일한 곳이고, 그 힘을 오남용하는 삼성 개혁이 우리 사회의 핵심 개혁이다. 삼성은 초일류 기업인데 과거 로비를 바탕으로 삼성에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을 이끌어내는 힘을 실제로 가졌고, 이것 때문에 삼성의 후진적 지배구조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한성대 교수이자 경제개혁연대 소장 시절 특검에 출석해 남긴 말이다. “김 교수의 말은 근거 없는 의견이자 개인적인 코멘트일 뿐이다.” 삼성 쪽 변호인의 평가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6월8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들어오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2016년 12월14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삼성-최순실 게이트 관련 국민연금 손해배상소송 국민청원을 선포하는 기자회견을 마친 뒤 관련자들을 응징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최치훈 삼성물산 건설부문 대표이사가 2015년 7월1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양재동 에이티(aT)센터에서 열린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계약 안건 관련 임시 주주총회를 마친 뒤 총회장에서 나오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재벌이 등장하는 영화에선 총수 일가와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해 고위관료 출신 고문을 활용하거나 금품 등을 제공해 입막음에 나서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영화 <베테랑>(왼쪽)과 <범죄와의 전쟁>의 한 장면. 씨제이이앤엠·쇼박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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