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김춘미 옮김 |비채 | 431쪽 | 1만4000원
여름휴가 때 무슨 책을 읽을까 고민하는 당신에게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비채)를 처방해 드립니다.
지난봄, 서점을 열고 나서 처음으로 방학이라는 것을 가져 보았습니다. 쉬는 날 하루 없이 7개월 동안 바쁘게 달려온 자신에게 주는 이른 휴가였던 셈이지요. 고민 끝에 휴가지는 베트남 다낭으로 정했습니다. 여행조차 ‘해야 할 일 목록’에서 끝마친 일들을 빨간펜으로 긋는 것처럼 여기저기 발 도장 찍으며 다니기 바빴던 저에게 생애 첫 휴양지였던 다낭에서 보낸 일주일은 쉬어가는 시간이었습니다. 매일 조식을 든든히 챙겨 먹었고, 오전엔 산책을 했고, 오후엔 수영을 했고, 애프터눈 티를 마시며 책을 읽다 졸리면 까무룩 잠이 들었지요. 충전기를 꽂아 놓은 휴대폰처럼요. 서울로 돌아온 후에도 다낭에서 보냈던 고요한 시간이 그리워질 때면,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책 한 권을 꺼내 읽었습니다. 여백을 음미하며 읽게 되는 장편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입니다.
이 책의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건축설계 사무소의 여름 별장을 배경으로, 인간을 격려하고 삶을 위로하는 건축을 추구하는 노건축가 무라이 스케와 그를 경외하며 뒤따르는 청년 사카니시 도오루의 아름다운 여름날을 담고 있습니다. 큰 기복도 드라마틱한 전개도 없지만, 무라이 선생의 소박하고 단아한 건축철학과 별장의 여름 풍경이 영화처럼 생생하게 펼쳐지며 소설의 풍미를 더하지요.
“해가 뜨기 얼마 전부터 하늘은 신비한 푸른빛을 띠며, 모든 것을 삼킨 깊은 어둠 가운데에서 순식간에 숲의 윤곽이 떠오른다. 일출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아침은 싱겁게 밝아온다. 침대에서 일어나 가운뎃마당에 면한 작은 유리창 블라인드를 올린다. 안개다. 어느 틈에 어디에서 솟구쳤는지 하얀 덩어리가 계수나무 가지와 잎사귀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움직인다. 조용했다. 새도 포기하고 지저귐을 그만두었나보다. 유리창을 열고 코를 멀리 밀 듯이 얼굴을 내밀고 안개 냄새를 맡는다. 안개 냄새에 색깔이 있다면 그것은 하얀색이 아니라 초록색일 것이다.”(10쪽)
“비는 한 시간 남짓해서 그쳤다. 유리창을 열자 서늘하고 축축한 공기가 흘러 들어왔다. 비에 씻긴 초록에서 솟구치는 냄새. 서쪽 하늘이 이상할 정도로 밝아지면서 일몰 직전의 광선을 숲에 던진다. 완전히 황혼에 가라앉아가던 나무들의 잎사귀 가장자리가 오렌지색으로 빛난다.”(151~152쪽)
이 책을 펼치면 비가 그친 숲의 흙냄새가 납니다. 문장에서 풀 냄새를 머금은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옵니다. 페이지를 넘기면 연필이 도면 위를 스치는 소리, 사각사각 연필 깎는 소리, 장작이 타고 튀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름다운 언어, 잔잔한 서사, 느리게 흐르는 시간.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온전한 휴식이 필요할 때, 제가 찾는 쉼 같고 숲 같은 소설입니다. 티케팅도 숙소 예약도 필요 없는 아주 간단한 여름휴가인 셈이지요. 이번 여름엔 숲내음이 가득한 여름 풍경 속으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