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감옥살이 꿀팁 전수' 차수련, 27년만에 간호사로 돌아오다

2017. 7. 21.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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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차수련 전 보건의료노조 위원장

'5번 투옥' 노조운동의 살아 있는 전설
차 전 위원장 해고 27년 만에 원직 복귀

"오래 걸려도 제자리로 갈 수 있다는 선례
후배들 앞에 놓인 장애물 치우는 일 할 것
해직 언론인 복직 투쟁에 동참하고 싶어"
[한겨레]
해고 27년 만에 한양대병원으로 원직 복직한 차수련 전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이 20일 오후 서울시 성동구 행당동 병원에서 수술실 근무를 마친 뒤 나오고 있다.
무려 27년차 해고노동자가 마침내 복직했다. 노조 활동을 하다가 쫓겨난 31살의 대학병원 간호사는 58살이 되어 환자 곁으로 돌아왔다. ‘병원 노조운동의 거목’ ‘해고노동자의 아이콘’ 차수련 전 전국보건의료산업노조(보건의료노조) 위원장이 지난 17일 원직에 복귀했다. 복직 나흘째인 20일 오후 서울 성동구 행당동에 위치한 그의 직장, 한양대병원에서 ‘간호사 차수련’을 만났다.
바지와 웃옷 세트인 진녹색 수술복과 수술모, 얼굴을 거의 다 덮은 마스크. 막 일과를 마친 그가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는 말을 전하는 1분 남짓 사이 환경미화 파트 노동자가 익숙하게 웃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차 전 위원장은 놓치지 않고 그분을 소개해줬다. “같이 일했던 분이에요.” “27년 전에 여기서요?” “그럼요.”

5층 수술실을 내려와 1층 정문을 나오는데 나란히 걷던 차 전 위원장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로비에서 마주친 또 다른 동료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퇴근한 그와 한양대 캠퍼스를 잠깐 걸었다. 스키니한 청바지에 스니커즈, 면 티셔츠 위에 백팩을 멘 58살 현역 간호사의 차림은 대학생들과도 별 차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너무 잘 웃었다. 낮 최고기온 34.9도, 이날은 서울에 올해 첫 폭염경보가 발효된 날. ‘마포구 소찬휘’라는 별명을 가진, 이글대는 열기를 즐기는 ‘잔인한 여자’인 기자조차 이건 아닌데 싶었던 날씨에도 그는 긴팔 재킷을 자주 여몄다. 건강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오랜 해직, 수배, 농성, 단식, 투옥이 몸에 새겨진 탓이다. 해직 기간 그는 딱 두 번 한양대병원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응급실에 실려 왔을 때.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수배 생활을 시작했는데요, 임신 초기부터 양수막이 터져서 위험했던 적도 있고, 급성 신우신염도 생겼죠. 무리한 단식으로 심부전을 앓아서 심장도 약해요. 간호사들이 처한 열악한 환경, 그에 비례해서 떨어지는 의료서비스, 그럼에도 블루칼라도 아닌 간호사가 환자의 생명을 볼모로 이익을 취하려 한다는 시선… 그 울분과 스트레스가 다 화병이 된 거겠죠.”

차수련 전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이 20일 오후 업무를 마치고 병원 정문을 나서는 모습. 경쾌한 스니커즈, 청바지 차림에 백팩을 멘 58살 현직 간호사의 표정이 무척 밝다.

“잘해줄 시간이 없었어!”

“박근혜씨, 유 캔 두 잇! 감옥에서도 고무줄로 머리 묶을 수 있어요.”

파면된 대통령 박근혜씨가 서울중앙지법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받던 지난 3월30일, 차 전 위원장이 박 전 대통령에게 쓴 ‘옥살이 꿀팁’이 에스엔에스(SNS)에서 화제가 됐다. 1989년 한양대병원 노조위원장으로 병원 파업을 이끌면서 단일호봉제를 쟁취한 뒤 처음 구속된 이후,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으로 전국 15개 병원의 파업을 주도하다 구속되어 옥살이를 마친 2004년까지 그는 5번이나 감옥을 드나들었다. (▶관련기사 : 전직 노조위원장이 전하는 감옥살이 노하우 “박근혜씨 당신은 할 수 있어요!”)

- 노동운동가 중에서도 5번 투옥된 분은 드물지 않나요?

“한번은 남편한테 자잘한 불만을 얘기한 적이 있어요. 나름 심각한 상황인데, 남편 대답이 너무 맞는 말이라 확 웃어버렸죠. ‘잘해줄 시간이 없었어!’”

- 처음 구속될 때 돌을 갓 넘긴 아이를 두고 자진출두 하셨다고요.

“남편(윤윤규 한국노동연구원 고용정책연구본부장)이 옥바라지 하면서 아이들을 키웠어요. 둘째 아이가 4살, 첫째 아이가 6살일 때도 남편이 자기가 아이들 돌볼 테니까 다녀오라고 하더라고요. 남편이 아니었으면 이 길이 더 어려웠겠죠. 제 일을 한 번도 막지 않았어요. 남편은 학생 때 운동권이었는데 연구자가 됐고, 저는 운동권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됐어요. 남편은 계속 운동을 하지 못한 부채의식이 컸대요.”

- 원래부터 투사형이었나요?

“운동권이 아니었어요. 대학 입학하자마자 노래하는 게 좋아서 밴드 보컬이 됐고, 대학가요제도 나갔던 딴따라였죠. 제가 이런 삶을 살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 간호사로 모교인 한양대 병원에 취직한 뒤로 달라졌죠. 이제 와 돌이켜보니 노조운동은 제 팔자였다 싶어요. 운명. 한양대병원노조 위원장,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이었던 게 제 삶에서 가장 보람 있고 명예롭고 자랑스러워요.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

‘수술실’ 복귀를 고집한 까닭

- 27년 만의 복귀예요. 적응하는 데 힘든 점은 없나요.

“간호사들이 예전보다 훨씬 힘들어졌어요. 숨도 못 돌리고 일을 해요. 점심시간, 퇴근시간이 잘 지켜지지도 않고요. 병원의 가장 큰 문제가 인력 문제거든요. 수술 방식이나 기구는 첨단화됐지만 시스템이나 의료인의 삶은 별로 변하지 않았네요.”

- ‘수술실’ 간호사로 복귀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간호사 5년차인 1987년 수술실 간호사로 있었거든요. 그때 노조 결성을 준비했고, 당시 한양대의료원(한양대병원의 옛 명칭) 노조위원장을 맡아 전임을 했죠. 임기가 끝나면 원대 복귀가 원칙이기도 했지만, 수술실 간호사로 돌아가는 게 제 바람이었어요. 끈질기게 요구했죠. 옳은 길을 가면 27년이 걸려도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기고 싶었어요. 그동안 정치권 입문 권유도 적지 않게 받았지만 정치를 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 수술실 근무가 많이 힘들다고 들었는데….

“수술실은 스페셜한 영역이에요. 병동 간호사는 한 달 정도 훈련받으면 일을 수행할 수 있는데, 수술실 일은 적어도 일 년 이상 훈련을 받아야 하거든요. 지금 와 보니까 잘 훈련된 중간 연차 간호사들이 많이 그만둬서 너무 모자라요. 여전히 노동환경이 노동을 못 받치고 있어요.”

차 전 위원장은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민주노총의 전신) 활동으로 사전구속영장이 청구돼 1년간 수배 생활을 했다. 병원 사쪽으로부터 ‘근무지 이탈’을 이유로 해고됐다. 1994년 해고자 신분으로 한양대의료원 노조위원장에 다시 당선됐다. 1995년 노조는 그의 복직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섰다. 사쪽은 차 위원장을 2년 후 복직시키겠다고 약속했으나 지키지 않았고, 1997년 노조는 다시 단식투쟁과 파업으로 맞섰다. 병원에 공권력이 투입됐다. 이듬해인 1998년, 조정에 나선 중앙노동위원회는 ‘차수련 위원장이 업무에 복귀하지 않고 그의 임금 전액을 지급한다’는 내용의 별도합의서를 사쪽에 내밀었다. 당시 병원 쪽은 구조조정을 밀어붙이면서 노조 간부들 해고, 대량 징계, 손해배상, 가압류로 노조를 뿌리째 흔들고 있었다.

- 중앙노동위 제안(별도합의서)을 사쪽도, 위원장도 받아들였나요?

“별도합의서 내용은 상급단체 활동만 하라는 의미였죠. 만약 현장에 복귀하면 해고라는 뜻이고요. 저를 현장과 노조로부터 격리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처음엔 거절했어요. 저는 수술실 간호사로 돌아가야 했으니까. 하지만 제가 이걸 받아들이면 구조조정을 하지 않고 조합원의 고용을 보장하고 간부들의 징계와 손배가압류도 풀어주겠다고 했죠. 결국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어요. 지난 4월 <한국일보>가 ‘이면합의’라고 보도했던데, 그건 행정기관인 중앙노동위원회가 제시한 조정안이었거든요. 그 보도로 제 명예가 크게 훼손됐어요.”

- 2년 뒤인 2010년 타임오프제가 시행됐습니다. 그해 11월 사쪽과 비로소 ‘원직 복귀 잠정합의서’를 작성했고요.

“제게 임금은 주면서 일은 하지 말라는 요구는 타임오프제(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기준으로 볼 땐 부당노동행위거든요. 노동부가 법에 따라 부당노동행위라고 규정하지 않고 사쪽을 묵인해줬어요. 그때 생각하면 노동부가 가장 괘씸해요. 노동부 적폐도 드러내야 합니다. 노동부가 법대로 조정만 해도 쉽게 풀릴 수 있는 노사갈등이 많아요.”

차수련 전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이 20일 오후 서울시 성동구 행당동 한양대 교내 카페에서 해직과 복직까지의 27년을 털어놓고 있다.

“다음 차례는 해직 언론인 복직”

- 대학생 때 밴드 보컬이셨죠. 음악을 좋아하신다면서요.

“클래식을 잘 모르지만 두루두루 좋아합니다. 힙합은 아이들이 좋아해서 같이 귀동냥해요. 노조 활동 하기 전엔, 그러니까 27년 전에는 제가 좋아하는 음악 테이프를 녹음해 와서 수술팀에 들려주곤 했어요. 수술실 분위기가 참 무겁고 차갑거든요. 균이 번식하면 안 되니까 습도는 60% 정도로 유지해요. 여름이면 습도를 맞추느라 실내온도가 더 차가워야 하고. 그런 수술대에서 오늘 만난 한 환자분은 몸을 덜덜 떨면서 땀을 흘리세요. 얼마나 두렵겠어요.”

- 음악 외에 또 무엇으로 힘든 시기를 견디셨어요.

“걷기, 좋아하세요? 이명박 가고 박근혜 당선됐을 때 믿기지가 않더라구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났어요. 비행기 안에서 내내 울기만 했어요. 진보진영과 시민이 하나가 돼서 일궈온 민주주의의 토대가 그렇게 휩쓸려가는 걸 인정할 수 없었어요. 건강도 더 악화돼 몸도 마음도 최악이었습니다. 35일 동안 걸었어요. 잔광이 비치기 시작하는 새벽부터 걷고 또 걸었어요. 신비하게도요, 걸으면서 치유가 어느 정도 됐어요. 한국에 돌아왔을 땐 이만했던 울분이 훨씬 작아지데요. 꼭 가보세요.”

- 출근 나흘째인데 낯설거나 힘들지는 않으세요.

“아침 7시30분부터 수술실 일과가 시작되거든요. 그러려면 7시까진 도착해야 하고요. 집이 좀 멀어서 일찍 나오는데, 이 나이에 새벽에 출근하는 게 어렵지 않냐고 주변에서 걱정이 많아요. 그런데 아침마다 저를 낫게 해준 그 순례길 생각이 나거든요. ‘그때도 새벽에 걸었잖아.’”

- 차수련의 복직이 우리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한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돌아왔을 때 노조원인 교환원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위원장이 복직했으니 다른 해고노동자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겠냐’. 이제 해고 언론인들 차례입니다. 해고 언론인 복직 투쟁에 제 모든 역량을 걸 준비가 돼 있습니다. 그런데 시민사회에서 너무 조용해요. 전국언론노동조합은 도대체 뭘 하나요? 사장을 구속시키라는 요구가 시민사회에서 분출해야 하는데 너무 고요한 거예요. 성명으로는 약해요.”

- 언론인들과 특별한 인연이라도….

“수배 중에 남장을 하고 숨어 다닐 때, 명동성당에 진입하려는 저를 양심적인 언론인들이 회사 차량에 태워서 들여보냈어요. 저는 해직 언론인 복직투쟁 촛불집회에 거의 빠짐없이 참가했어요. 병원 노조를 하면서 언론 적폐 청산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언론 적폐가 모든 적폐 청산의 시작이에요.”

- 보건의료 노동자, 간호사로서는요.

“대한간호사협회 체질 개선입니다. 아직도 회장을 간선제로 뽑아요. 간호사들의 인권을 증진시키고 노조로 힘을 키우려면 간호사협회가 바뀌어야 해요. 저보다 훌륭한 간호사, 의료계 후배가 많아요. 후배들 넘어지지 않게 앞길에 놓인 돌 먼저 보고 치워놓으려구요. 정년이 2년밖에 안 남았지만….”

글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그래픽 강민진 디자이너 rkdalswls@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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