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앞뜰에 홈런을 날린 사나이

박정훈 입력 2017. 7. 2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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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는 포퓰리스트로 집권했다. 지배 엘리트와 대중을 대립시키는 이분법적 전략을 구사했다. 유럽과 미국에 맞서 중남미 고유의 기구를 만드는 일에도 앞장섰다.

포퓰리스트의 대명사로 불리는 후안 도밍고 페론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에게 열광한 파시스트였다. 하지만 가난에 찌든 노동자들의 임금을 인상하고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데 앞장서면서 도시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았다. 브라질의 제툴리우 바르가스 전 대통령은 부유한 목장주였지만, 산업화를 주도하고 노동자들의 임금을 인상해 노동계급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멕시코의 라사로 카르데나스 전 대통령도 한국 면적의 2배(4500만 에이커) 가까운 규모의 땅을 농민에게 분배하고, 노동계급의 요구에 관대했다.

세 지도자의 공통점은 정당정치를 철저하게 불신하고 직접 대중과 소통하는 정치를 추구한 것이다. 페론은 “저들은 정치가 뭔지도 모른 채 평생 정치를 해온 사람들이다. 반면 우리는 정치를 해본 적이 없지만 무엇인지 잘 안다”라고 호언했다. 이들은 모두 기득권층을 거침없이 공격하면서 대중을 선동하는 카리스마를 과시했다. 아무도 이들을 뚜렷한 이념과 강령을 갖춘 정당의 지도자로 기억하지 않는다. 이들은 대중이 두루 수용할 만한 반미주의·민족주의·근대화·경제발전 수사학을 모두 활용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좌파는 아니었다. 이들은 노동조합의 요구는 들어주었지만 그 대신 행동의 자유는 모조리 빼앗았다. 브라질의 바르가스는 문맹을 핑계로 다수 노동자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았다. 또한 중상류층에게 세금을 더 거두는 대신 자기 나라에 넘치는 천연자원, 농축산물과 같은 1차산품의 수출 소득을 나눠주었다.

ⓒEPA 2007년 슈퍼마켓 체인의 국유화 선언을 하고 있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도 그들처럼 포퓰리스트로 집권했다. 그는 타고난 카리스마로 정부가 국민을 학살하고, 정당이 국민을 대변하기를 포기한 나라, 노동조합마저 사회복지 민영화에 동의하는 나라에서 지배 엘리트와 대중을 대립시키는 이분법적 레토릭을 효과적으로 구사했다. 기득권층 전체를 향해 ‘학살자들’ ‘매국노들’ ‘부패 집단’ ‘과두제 세력’이라고 거세게 공격하면서 가난하고 지친 대중에게 다가갔다. 그러면서도 ‘구체제’ 전체를 제헌의회로 무너뜨리겠다고 약속하고, 미국이 강요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폐지하겠다며 매우 급진적인 공약을 내걸었다. 그렇게 6년 만에 무명의 군인에서 공화국 대통령으로 변신했다.

차베스는 1998년, 2000년, 2006년, 2012년 대선까지 무려 4차례나 연거푸 당선되었고, 재임 14년간 자신이 ‘볼리바르 혁명’ 혹은 ‘21세기 사회주의’라고 명명한 개혁을 추진했다.

먼저 차베스는 새로운 유형의 민주주의를 실험했다. 그의 행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자유민주주의만 아니면 뭐든지 좋다!’ 정치학자 아담 셰보르스키는 민주정부가 독재정권보다 확실하게 낫다고 주장할 수 있는 건 정부가 국민을 살해하지 않는 점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차베스라면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1989년 2월27일 카라카스에서 빈민을 학살한 것은 독재정권이 아니라 시민들이 직접 선출한 ‘민주’정부였기 때문이다. 이는 차베스가 ‘자유민주주의’에 그토록 큰 반감을 갖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자유민주주의만 아니면 뭐든지 좋다!’

그렇다고 차베스가 선거를 폐지한 것은 아니다.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차베스의 집권 기간에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표결에 참여했다. 대선·총선·지방선거는 물론이고 국민투표에도 참가했다. 제헌의회 소집 국민투표 1회, 대통령 소환 국민투표 1회, 헌법 개정 국민투표 2회 등 여러 차례 국민투표가 개최되었다. 동시에 차베스는 여러 정치적 대안을 실험한다. 브라질의 참여예산제처럼 대의제도와 공존을 추구하는 급진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거나, 국민소환제나 마을평의회(Consejo Comunal) 제도와 같은 직접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하기도 했다.

또한 차베스는 새로운 경제모델도 실험했다. 이 또한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신자유주의만 아니면 뭐든지 좋다!’ 차베스는 미국과 국내 기득권 세력이 결탁해 신자유주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빈민들을 살해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발전모델의 대안을 찾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 일환으로 외국 자본이 지배하는 기업들을 국유화했다. 석유와 같은 천연자원, 통신과 같은 필수 서비스는 물론이고 슈퍼마켓 체인까지 국유화했다. 아예 국가가 공기업을 신설하기도 했다. 국영 부문도 시장 부문도 아닌 사회적 경제에도 투자를 급격히 늘렸다. 노동자가 직접 소유하고 경영하는 협동조합 기업의 수가 1997년 766개에서, 2007년에는 무려 7만 개로 급증했다.

차베스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신자유주의 모델의 최대 피해자인 도시 빈민을 위한 정치를 펼친다. 국부의 원천인 석유에서 얻은 소득으로, 빈민층의 삶을 개선하는 대담한 복지 정책을 추진했다. 교육, 건강, 영양 상태, 주택 등 생활의 모든 분야를 망라한 전방위적 복지 서비스를 제공했다. 가령 빈민에게 무상의료를 제공하기 위해 전국에 의료센터 1만 개를 신설했다. 이 같은 정책 덕분에 빈민층은 차베스의 든든한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빈민들의 전폭적 지원이 없었다면 4번 재선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33세 빈민 여성 타마라 론돈은 영국 <가디언>과 인터뷰하면서 차베스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내게 집을 주었다. 그것이 내 인생을 바꾸었다.”

ⓒ연합뉴스 2004년 8월15일 진행된 차베스 대통령에 대한 소환투표 현장에서 무장군인이 보초를 서고 있다.

차베스 정부의 성과는 뚜렷했다. 국민의 절반가량은 차베스의 민주주의에 만족감을 표시했다. 1999년부터 2007년까지 베네수엘라 국민의 민주주의 만족도는 48%를 기록해 중남미 평균 32%에 비해 매우 높은 편이었다. 또한 재임 기간 부유층의 소득은 줄어들었고, 하층의 소득은 늘어났다. 한때 전체 국민의 60%에 달하던 빈곤층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2011년에는 미국 중앙정보국(CIA)도 빈민의 수가 반으로 줄어들었다고 인정했다.

차베스는 유럽과 미국에 맞서 중남미연방공화국을 세우려다가 실패한 시몬 볼리바르의 꿈을 되살리고자 했다. 볼리바르조차 말년에 “바다에서 쟁기질을 하는 것과 같다”라고 한탄했지만, ‘현대의 볼리바르’를 자처한 차베스는 결코 그의 비관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차베스는 중남미도 유럽연합처럼 하나의 통화를 쓰고, 하나의 여권을 갖는 하나의 대륙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를 위해 카리브 해와 안데스 지역의 빈국들이 2004년부터 천정부지로 치솟은 고유가로 어려움을 겪자 저렴한 가격으로 석유를 공급하며 유대를 강화했다. 또한 볼리비아·에콰도르·니카라과·쿠바의 좌파 정부들과 ‘아메리카를 위한 볼리바르동맹(ALBA)’을 결성해 경제 교류와 정치적 단결을 도모했다.

그는 남미 12개국 모두가 참가하는 남미국가연합(UNASUR), 중남미 33개국 모두가 참가하는 ‘중남미·카리브해 국가공동체(CELAC)’를 만드는 데 엔진 구실을 했다. 또한 미국이 주도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항하는 남아메리카 국가들의 공동 방위 기구인 남미국가연합의 방위이사회, 미국이 지배하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요해온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미주개발은행 등에 대항하는 남미은행(BANCOSUR)의 창설을 주도했다. 미국이 배제된 중남미 고유의 기구를 만드는 일이어서 그는 매우 감격스러워하곤 했다.

차베스는 재임 기간 내내 대중과의 직접 소통을 중시했다. 가장 파격적인 소통 채널은 국영방송국의 <안녕하세요, 대통령님(Aló Presidente)>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매주 일요일 11시부터 시작되는 이 프로그램은 종영 시간이 미리 정해지지 않은 채 진행되었다. 때론 밤늦게까지 진행되기도 했지만 대체로 오후 5시쯤에 끝이 났다.

ⓒEPA 2011년 11월26일 가이아나 수도 조지타운에서 개최된 남미국가연합(UNASUR) 정상회의에 참석한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가운데 엄지손가락 든 사람).

이 프로그램의 사회자가 바로 차베스 본인이었다. 그는 때론 군복을 입고, 때론 대평원 농민들의 전통복장을 입고 출연해서는 직접 초대 손님을 인터뷰하고, 연설도 하고, 민요도 부르는 등 자신이 가진 모든 재주를 뽐내곤 했다. 자신이 열대초원 지역 출신으로 야자수 이파리로 지은 가난한 농가에서 자랐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흑인과 원주민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강한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출신성분’을 강조하는 소통 전략은 베네수엘라 빈민층의 다수를 차지하는 혼혈인·흑인·원주민의 자긍심을 북돋우는 데 기여했고, 무엇보다 정치적 기반을 튼튼히 다지는 데 효과 만점이었다. 차베스는 통합보다는 기득권층과 대결하는 정치를 추구했다. 차베스가 2001년 11월, 석유 국유화를 비롯해 49개 개혁 법안을 비상시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입법권을 활용해 통과시키자 야권은 총공세에 나섰다. 급기야 2002년 4월11일에는 재계 지도자, 노동계 지도자, 가톨릭 상층부, 군 상층부, 기존 정당의 지도자 그리고 미국이 손잡고 쿠데타를 일으켜 48시간 동안 차베스를 감금하기도 했다. 쿠데타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빈민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 대통령을 돌려달라고 시위를 벌였고, 차베스 충성파 장교들은 헬리콥터를 타고 날아가서 카리브 해의 작은 섬에 갇혀 있던 대통령을 직접 구출해왔다.

쿠데타 실패 후에도 반대파의 기세는 꺾일 줄 몰랐다. 2002년 12월2일 ‘차베스 없는 크리스마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재계·노동계가 공동으로 ‘파업’을 벌였다. 국부의 원천인 국영 석유회사를 마비시킨 파업은 베네수엘라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차베스 대통령은 경영진과 파업 참가 노동자들을 전원 해고하는 초강수로 대처했다.

2004년 야권은 새로운 해법을 모색한다. 야권은 차베스 대통령이 주도한 신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소환투표 제도를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세계 정치 사상 유례가 없는 대통령 소환투표가 실시되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 국민의 과반수가 대통령을 신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2004년 6월3일 저녁, 국민소환투표에서 승리를 거둔 차베스는 대통령궁 발코니에 나와 이렇게 연설했다. “국민 여러분, 오늘 우리는 홈런을 날렸습니다. 우리가 때린 공이 백악관 앞뜰에 떨어졌습니다.”

쿠데타 때 충성파 장교들이 차베스 구출

미국 정부가 자신이 패배하기를 바랐다는 것을 딱 꼬집어서 비꼬았다. 미국은 1998년 대선 때부터 집요한 방해꾼 노릇을 해왔다. 미국은 당시 유력 대선 후보였던 차베스 후보의 여권 발급도 거절했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는 원수지간이었다. 대통령 시절 부시는 냉전 시대의 반공 전사들을 라틴아메리카 담당 차관보로 임명했는데, 이들이 반차베스 쿠데타 모의에 가담했다.

차베스도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다. 2006년 유엔총회장에서 “어제 여기에 악마가 왔었나 보다. 아직도 유황 냄새가 난다”라고 독설을 날렸다. 그 전날 유엔총회장에서 연설한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맹렬하게 공격한 것이다.

이 같은 격렬한 대결의 정치에서 승자는 단연 차베스였다. 그는 대통령 재임 기간 치러진 13차례 전국 단위 선거나 국민투표에서 11번이나 승리를 거두었다. 11승 2패의 화려한 전적에는 허약한 반대파와 미국이 톡톡히 기여했다.

박정훈 (중남미 연구자)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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