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SNS 타고 호시절(好詩節)..수만부 찍는 '스타 시인' 잇따라

심성미 입력 2017. 7. 21. 17:38 수정 2017. 7. 22.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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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시 시인가
심보선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 출간 일주일 만에 1만부 찍어 화제
"1년 넘게 걸리던 중쇄, 요즘엔 석달"
SNS로 시라는 장르 친근해져..몇 구절 필사하거나 사진 찍어 공유
시 낭독회 통해 팬덤 형성하기도

[ 심성미 기자 ]

시(詩)의 부활은 ‘시 읽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과 함께 시작됐다. 이들은 심각하게 시를 분석하며 읽기보다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자신이 공감하는 시 구절을 공유하거나 시 낭송회에 참여해 시인들과 직접 소통하기를 즐긴다. 2030세대만의 새로운 시 소비 방식이다. 아이돌처럼 시인을 따르는 ‘팬덤 문화’까지 생겼다. ‘시집은 중쇄(초판이 다 팔려 책을 다시 인쇄하는 일) 찍기 힘들다’는 말이 있었다. 3~4년 전만 해도 초판 1500~2000부가 다 팔리고 중쇄를 찍는 시집은 중량감 있는 시인이나 우수도서 선정 시집이 아니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는 옛말이 됐다.

올해 시집을 낸 시인 중 심보선, 천양희, 임솔아, 서효인, 허은실, 김개미, 김상미, 김준현 등 많은 시인이 중쇄를 찍었다. 지난 7일 출간된 심보선 시인의 《오늘은 잘 모르겠어》는 1주일 만에 1만 부를 찍었다. 지난 1월 출간된 허은실 시인의 《나는 잠깐 설웁다》는 8500부 넘게 판매됐다.

시집 전문 서점 위트앤시니컬(왼쪽), 시·소설 습작 아카데미 처음학당


“중쇄 속도 빨라져”

서효인 민음사 팀장은 “예전엔 중쇄 찍는 데까지 1~2년 걸릴 만한 시집이 요즘은 3~6개월 만에 중쇄에 들어가는 등 속도가 빨라졌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시인선(選)인 《문학과지성 시인선》은 지난주 통권 500호를 돌파했다.

시의 인기는 세계시인선으로 번졌다. 태학당, 청하, 솔 등의 출판사들이 한때 내놓다가 수요 부족으로 맥이 끊겼던 세계시인선이 1인 출판사를 중심으로 부활하고 있다. 1인 출판사 봄날의책은 지난 1월 세계시인선 시리즈 첫 시집으로 노르웨이 시인 울라브 하우게 시선집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를 냈다. 펴낸 지 6개월 만에 중쇄를 찍었다. 1인 출판사 ?다 역시 그간 국내에 잘 소개되지 않은 유명 외국 시집을 엄선해 두 달 간격으로 펴내기로 했다. 박지홍 봄날의책 대표는 “최근 국내 시 독자층이 탄탄해지면서 시에 대한 관심이 다른 문화권으로도 넓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대현동 위트앤시니컬, 한남동 다시서점, 대구 칠성동2가 시인보호구역 등 시집만 파는 동네서점도 늘어나는 추세다. 유희경 위트앤시니컬 대표는 “한 달 평균 1200권가량 판매된다”며 “‘오늘은 시집을 사겠다’며 작정하고 오는 손님이 많다”고 말했다.


SNS로 시 소비하는 2030

시의 인기가 높아진 데는 2030세대를 중심으로 SNS를 통해 시를 공유하는 문화가 크게 작용했다. 시는 길어도 A4 한 장 분량을 넘지 않는 만큼 SNS의 ‘한 컷’에 담기 좋은 장르다. 박준 시인은 “혼자 읽고 즐기던 시의 독서법이 SNS에 올리고 ‘좋아요’를 누르며 상호교류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고 전했다. SNS를 통하면서 ‘시는 고급문화’라는 고정관념이 줄어들고 시라는 장르를 좀 더 친근하게 여기게 된 것도 시집 판매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

누구나 다 아는 스타작가보다 독특한 감수성을 지닌 시인의 시를 ‘소비’한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2030세대의 ‘문학적 과시욕’이 영향을 미쳤다는 재밌는 분석도 있다. 이광호 문학과지성사 대표는 “시를 공유하며 ‘나는 다르다’고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라고 설명했다.

2030세대는 시인의 의도를 파악하려 애쓰기보다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시를 즐기고 소비한다. 전체 시 가운데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공감할 수 있는 몇 구절만 필사하거나 사진으로 찍어 공유하는 식이다. 이 대표는 “시집을 내기만 하면 몇 만 권씩 팔리는 시대가 도래한 건 아니지만 시를 소비하는 새로운 흐름과 세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시의 부활’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했다.

시의 치유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청년실업과 ‘헬조선’ 논란, 사회 구석구석의 ‘갑질’ 행태 등 한국 사회의 각박한 현실에서 시가 위로를 준다는 것이다. 김소연 시인은 “경쟁으로 각박해진 세대에 시는 ‘먹고사니즘’ 말고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고 설명했다.

‘팬덤 문화’로 발전

최근 등단한 젊은 시인들은 두문불출하며 시만 쓰는 대신 SNS나 서점이 주최하는 시 낭독회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독자와 만난다. 젊은 시인들을 아이돌처럼 따르는 ‘팬덤 문화’까지 등장했다.

황인찬 시인이나 박준 시인이 대표적이다. 지난 3월 말 위트앤시니컬에서 열린 황 시인 낭독회에서 그가 읽은 시만 묶어 만든 한정판 시집 《놀 것 다 놀고 먹을 것 다 먹고 그 다음에 사랑하는 시》 500권은 독자들이 줄을 서서 사갈 정도로 순식간에 매진됐다. 9500원짜리 이 한정판 시집은 온라인 중고 시장에서 8만원에 거래되기도 했다. 이수명 시인의 한정판 시집 200권 역시 거의 다 팔렸다. 문학동네는 최근 이런 ‘팬’들을 겨냥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박 시인 등의 ‘리커버판 시집(내용은 같지만 표지만 다르게 입힌 책)’을 발간했다. 이소연 시인은 “작품뿐 아니라 시인의 평소 말하는 습관 등 시인의 캐릭터 자체를 좋아하는 수만 명의 강력한 팬덤이 이들을 지탱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글=심성미/사진=신경훈 기자 smsh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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