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병' 캐스팅보트 쥔 일성신약 "삼성이 은밀한 제안해왔다"

2017. 7. 21.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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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conomy | 법정 위에 선 삼성

[한겨레]

뇌물공여 등 혐의로 구속영장이 재청구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6일 오전 구속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으러 법원으로 가기 전 서울 대치동 박영수 특별검사 사무실에 들어서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2) 금품 제공은 필수?

<베테랑>에선 죄를 지은 재벌 3세를 보호하기 위해 온갖 편법을 동원하는 모습이 나온다. 최 상무는 수사를 맡은 형사를 설득할 수 없자 그의 아내를 만난다. 명품백 안에 5만원짜리 돈다발을 넣은 채로. “최근에 집 때문에 은행 대출도 받았다고 들었는데, 많이 힘드시죠.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자녀분 교육도 대학 입학 때까지는 저희 회사 교육사업부에서 충분히 지원해드릴 수 있고요. 남편분 설득 좀 해주세요.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고려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삼성물산 합병 과정에선 국민연금 이외에도 대주주인 일성신약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2015년 기준 매출 617억원인 작은 제약회사에 눈길이 쏠린 것은 이 회사가 보유한 삼성물산 주식 때문이었다. 삼성물산 합병 당시 일성신약은 삼성물산 지분 2.11%(약 330만주)를 보유했다. 이건희 회장(1.37%)보다도 지분이 많았다. 당시 주주총회 결과 찬성이 출석 주식 중 69.53%가 나와 마지노선인 66.66%를 겨우 넘긴 것을 고려하면 무척 중요한 지분이었다.

일성신약은 원래 삼성과 인연이 깊다. 창업주인 윤병강 회장은 1950년대 들어 항생제 수입 등 무역업을 하면서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이 회장의 사업 수완에 감복해 존경심을 가졌다고 한다. 한때 일성신약에서 사용하는 제품이나 서비스에 ‘삼성’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고는 결재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이병철 회장의 흥업은행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몰수돼 한일은행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81년 민영화되는 과정에서 윤 회장이 한일은행 대주주로 참여한 것도 이 회장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윤 회장은 미래에셋대우증권(옛 대우증권)의 전신인 동양증권을 창업한 ‘증권업계 1세대’이기도 하다. 그는 제약회사를 운영하면서도 주식시장에 큰 관심을 기울여 에스케이(SK)와 한국전력공사, 현대오토넷 등 투자로 큰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대주주인 만큼 삼성물산과 접촉도 잦았다. 2015년 3월 경남 남해에선 삼성물산 최고재무책임자(CFO)가 바뀐 것을 계기로 골프 모임이 열렸다. 그해 1월, 이영호 경영지원실장이 미래전략실에서 자리를 옮겨왔던 것. 김신 사장, 이영호 부사장 등이 함께한 이날 골프 모임에서 윤 회장은 삼성물산 합병으로 이재용 부회장의 승계 작업이 진행될 때 소액주주에게 손해가 안 가는 방향으로 해달라는 취지의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성신약과 삼성물산의 관계에 금이 간 건 그로부터 두달 뒤인 5월. 윤 회장의 바람과는 달리 삼성물산 주주에게는 손해 볼 수 있는 1(제일모직):0.35(삼성물산)라는 비율로 합병을 결정해서다. 이어 미국계 헤지펀드인 엘리엇매니지먼트가 등장해 팽팽한 표대결이 예상되면서, 일성신약은 구애의 대상이 됐다. 엘리엇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총괄 투자책임자인 제임스 스미스 대표가 직접 일성신약을 방문해 합병 안건을 반대하도록 설득했고, 삼성물산 김신 사장(상사부문) 등 임원들도 하루가 멀다 하고 회사를 찾아 찬성표를 종용했다.

삼성은 그해 6~7월에는 윤병강 회장은 물론 윤석근 부회장을 자주 만났다. 합병을 결정할 주주총회가 열리기 대략 한달 전이다. 윤 회장은 삼성 임원을 두차례, 아들 윤 부회장은 네차례 만났다. 일성신약 쪽은 당시의 잦은 만남에서 삼성 쪽이 은밀한 제안을 해왔다고 주장한다. 일성신약 윤석근 부회장과 관계자들의 법정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해보면 이렇다.

삼성: 오래전부터 남영동 낡은 건물을 새로 올리려고 하는데 잘 안 됐다고 들었다. 우리가 신사옥 건설을 맡겠다.

일성: 38층 정도 지을 계획이라 약 1500억~1800억원 정도 들 텐데. 서울 용산구 남영동 부지에 예상 건축 비용 500억원(땅값 제외) 정도의 40층 건물을 지으려고 계획하고 있지만 구청이나 서울시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아 10년째 답보 상태다.

삼성: 건설 비용은 전혀 받지 않겠다.

일성: 우리가 찬성하면 소액주주들은 손해를 보게 되는데 이런 식은 정당하지 않다. 뒤로 이렇게 보상하는 것은 언제든 문제가 될 것이다.

신축 건물 건설 제안은 거절당했다. 주총 날짜가 임박한 7월이 되자 삼성 쪽은 보유 주식을 비싼 값에 사주겠다는 새로운 카드를 꺼냈다.

삼성: 일성신약이 보유한 주식을 9만원에 사겠다. 다만, 케이씨씨(KCC)가 삼성물산 자사주 매입 때 7만5천원으로 해서 그 이상으로 하기는 어렵다. 장외 거래를 통해 주당 7만5천원의 가격으로 하고, 차액인 1만5천원에 대해서는 4가지 방안에 대해 사이드로 보상하겠다.

일성: 말도 꺼내지 말라.

삼성: 그것도 합법적으로 한다.

하지만 만난 장소는 같아도 주고받은 얘기에 대해선 서로의 주장이 180도 다르다. 하나의 사건을 각자에게 유리하도록 기억하는 <라쇼몽>처럼. 삼성 쪽은 일성신약과는 정반대 주장을 편다. 삼성물산 김신 사장과 변호인 쪽의 법정 주장은 다음과 같다.

삼성: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하면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성장시킬 수 있고, 시너지 효과가 있다. 합병에 찬성해달라.

일성: 우리 사옥을 새로 개발해야 하는데.

삼성: 2013년에 삼성이 지급보전을 해서 건물 지어주면 어떠냐 제안했는데 그때 저희 실무팀에서 하기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살펴볼까?

일성: 아니, 됐어요.

삼성: 합병 찬성의 대가로 일성신약 주식을 비싸게 사면, 엘리엇이 즉시 삼성물산 이사들을 배임 및 상법 위반죄로 고소하고 손배소가 확실하다. 도저히 들어줄 수 없다.

일성: 엘리엇이 울타리 안에 들어왔는데 그냥 나가겠느냐? 보상해줘라. 그럼 다른 주주들도 좋아한다.

삼성: 법적으로 불가능하다.

일성: 삼성이 법을 고칠 수 있지 않냐?

엇갈리는 기억은 또 있다. 윤석근 부회장은 국회 청문회와 법정에서 “7월9일 식사에서 ‘국민연금이 반대하면 내 찬성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으니 김신 사장이 ‘국민연금은 다 됐다’고 말했다. 그 말 듣고 아직 결정나기도 전인데 그렇게 말해 ‘역시 삼성은 다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밝힌 바 있다. 반면 김신 사장은 법정에서 “7월9일이면 7월10일 (국민연금 기금운영본부의) 투자위가 열리기 전인데 의사결정도 안 된 것을 단정적으로 어떻게 말했겠나. 말도 안 된다”며 이를 부인했다. 두 사람 가운데 한명은 위증을 하고 있는 셈이다.

양쪽이 서로 다른 주장을 펴고는 있지만, 잦은 만남 자체는 사실이다. 특히 윤석근 부회장은 2015년 3월 김신 사장을 골프장에서 처음 만난 뒤 4개월이 지난 7월초에만 네차례나 만났다. 7월6일 서울 청담동 일식당 만남을 시작으로, 7월9일에는 김신 사장과 김태한 삼성바이오로직스 사장과 저녁을 함께했다. 이어 7월13일과 15일에는 김신 사장과 김종중 삼성 사장을 만났다. 일성신약의 찬성표를 얻고자 애가 탔던 삼성 쪽의 분위기를 잘 엿볼 수 있다.

“이러면 후회하실 텐데요.” <베테랑>에서 최 상무가 돈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은 서도철 형사의 아내에게 한 말이다. 하지만 결말에서는 오히려 최 상무가 감옥에 갔다. 윤병강 회장은 지난해 <한겨레>와 만난 자리에서 “삼성이 부당하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안다. 또 삼성이 어떻게 강한지도 안다. 한데 이번에는 좀 심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1년 뒤,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해 삼성 관계자들은 줄줄이 법정에 서 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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