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병' 앞두고 연줄 총동원..국민연금 기류 알아내 '전략' 수정

입력 2017. 7. 21. 17:16 수정 2017. 7. 2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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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conomy | 법정 위에 선 삼성

[한겨레]

그래픽-장은영
2015년 7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안을 처리할 임시 주주총회를 앞두고 삼성그룹의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은 분주히 움직였다. 두 회사의 합병비율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승계에 유리하도록 잘못 산정됐다는 논란이 일었고,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서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에 찬성을 종용한 사실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와중에 밝혀졌다. 이재용 부회장의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영화 속 한 장면과도 같은 삼성의 행태를 3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영화는 현실을 투영한다. 실제로 벌어졌거나 앞으로 있을 법한 일을 다룬다. 재벌이 등장하는 영화도 마찬가지다. 재벌 3세가 등장한 <베테랑>에서 경찰청장 출신의 회사 고문을 활용해 로비에 나서는 모습, <내부자들>이나 <범죄와의 전쟁>에서 연줄이 큰 힘을 발휘하는 장면은 우리 사회의 현실과 정확히 포개진다. 반면 결론에서는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 영화에선 정의가 승리하거나 ‘착한 편’이 역경을 딛고 이기곤 한다. 현실에선 정의가 무릎을 꿇거나 이긴 쪽이 정의의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다반사다. 그래서일까? <내부자들>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정의? 대한민국에 그런 달달한 것이 남아 있긴 한가?”

지난 2월 구속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뇌물’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국내 최대 재벌 삼성의 행태는 여러 영화에서 그려진 재벌의 모습과 정확하게 겹친다. 몇몇 영화와의 비교 형식을 빌려, 이재용 부회장의 재판 기록을 재구성해봤다. 기사에서 언급된 인물의 직책은 모두 당시의 것이다.

(1) 연줄이 힘이다

“내가 인마, 느그 서장이랑 인마. 어저께도 같이 밥 묵고, 사우나도 같이 가고. 다 했어.”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익현이 자신을 잡아들인 형사의 기를 누르려 꺼낸 말이다. 또 ‘경주 최씨 충렬공파’라는 혈연을 들먹이며 깡패에게까지 연을 넓혔다. <내부자들>에서 우장훈 검사가 출세하려고 악다구니를 쓴다는 인식을 주변에 주는 것도, “자격지심 보이고 그러지 말어. 그냥 추하니까”라는 핀잔을 기자한테서 듣는 것도, 이렇다 할 학연을 만들지 못한 탓이 컸다.

이재용 부회장의 재판 과정에서도 ‘연줄이 곧 힘’이라는 공식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중 하나가 한양대 파워다. 등장인물은 법대(81학번) 출신인 이수형 삼성 미래전략실(미전실) 기획팀장(부사장)을 비롯해 5명이다.

2015년 7월4일 토요일, 서울 서초구 삼풍아파트 근처의 한 일식집. 한양대 동문 세명이 모였다. 홍완선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과 김아무개 한양대 교수(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회 위원장), 원아무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 등이다. 이들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서로 인사를 나눈 적은 있지만, 사석에서 만난 건 처음이었다.(※이날은 삼성물산-제일모직의 합병 안건을 다룰 두 회사의 임시 주주총회가 각각 열리기 약 2주 전이다.)

애초 김 교수는 이날 자리를 피하고 싶었으나, 경제학과 동기인 원 연구위원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관련해 홍(완선) 선배가 김 교수 의견을 들어보고 싶어하니 한번 만나자.

: 합병 관련해 골치 아파 아무도 연락 안 하고 있다. 굳이 만나고 싶지 않다.

: 선배인데 무슨 일이 있겠느냐?

모임에 큰 관심을 보인 다른 한양대 출신 인물이 있었다. 이수형 기획팀장과 손아무개 <매일경제> 국장. 손 국장은 모임 며칠 전에 이를 알게 됐고, 이 팀장에게 알려줬다. 다시 이 전 팀장은 문자메시지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원 연구위원에게 ‘바람’을 전했다.

: 안녕하세요. 저는 법대 81학번입니다. 상대 선배님들도 가깝게 느꼈습니다. 저희 그룹으로서는 다른 어떤 사안보다도 중요해 이 일이 잘못되면 그룹 경영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밖에서는 잘 모를 겁니다. 토요일 선배님들께서 해주시는 일이 정말 중요해, 과장이 아니고 저희 그룹을 결정적으로 도와주시는 겁니다. 뵌 적도 없는데 과중한 부담 드려 죄송합니다.(2015년 7월2일)

다음날 원 연구위원은 답장을 보냈다.

: 김 교수가 위원회 분위기를 잘 이끌어달라고 전달했습니다.

7월4일 못마땅한 식사 자리에 나온 김 교수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판단할 사안이며 삼성의 논리가 부족하고 삼성의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얘기를 두 분이 하셨습니다.

: 잘 알겠습니다. 결례가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은 장충기 삼성 미래전략실 사장에게 곧장 보고됐다.

: 오늘 점심때 홍(완선 기금운용본부장)과 원(아무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박사)이 김 위원장을 만나서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원 박사 이야기 들어보니 김이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홍과 원이 열심히 설득했는데 김은 삼성의 논리가 부족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고 하니 몇 차례 더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 그럼 홍이 책임지면 됨.

장충기 사장의 답신 문자에 대해, 특검은 홍완선 본부장이 의결권 행사 전문위에 부의하지 않고 직접 투자위원회를 열어 국민연금의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원 연구위원은 <한겨레>에 “약속을 알고 있는 이수형 팀장이 계속 메시지로 커피나 한잔하면서 대화 내용을 알고 싶다고 했으나 만남을 피하고 메시지로 원론적인 대화 내용만 전달했다”며 “장 사장에게 설득했다고 보고한 것은 이 팀장의 역할이 동문을 동원하는 것이고, 자신이 노력해 동문들이 만나서 노력했다는 논지를 유지하기 위해 설득한 것처럼 보고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 교수 역시 “원 연구위원은 배석만 했을 뿐 특별한 말은 없었다”고 밝혔다.

국민연금은 삼성물산의 최대주주로 삼성물산-제일모직의 합병 안건을 통과시키는 데 핵심 열쇠를 쥐고 있었다. 국민연금의 입장을 결정하는 건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이지만, 삼성물산 합병 건처럼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경우에는 전문위로 공이 넘어간다. 이 때문에 당시 세간에선 전문위가 열려 국민연금 입장이 결정될 것이라 생각했다.

삼성 쪽 역시 전문위원들의 프로필을 보고 연결고리를 찾느라 분주했다. 이수형 팀장은 동문이라는 이유로 자신이 김 교수를 담당하기로 했다. 비슷한 시기 김종중 삼성 사장(미래전략실 전략1팀장)은 삼성경제연구소장으로 내정된 차문중 박사를 통해 박창균 중앙대 교수를 만나 삼성의 입장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삼성 쪽 변호인은 “합병 성사를 위해서 전사적으로 노력한 것이고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장충기 전 사장이 이수형 팀장에게 보낸 ‘그럼 홍이 책임지면 됨’이라는 문자는 마치 홍이 김 교수를 상대로 설득한 것처럼 오해를 부르지만, 실제로는 설득한 사실이 없다”고 밝혔다.

삼성이 김 교수나 접촉한 전문위원들의 뜻을 바꾸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전략 변경’에 참고가 됐을 법하다. 김 교수를 포함해 9명으로 구성된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전문위에서 5명의 찬성표를 얻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에는 상위기관인 국민연금공단을 건너뛰고 보건복지부에서 직접 나서 압력을 행사했다. 문형표 복지부 장관은 부하 직원에게 합병이 될 수 있도록 “100% sure(슈어)”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김 교수를 포함해 9명의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들 성향을 파악했다. 문 장관은 직접 전문위 명단을 살펴보다 전문위원 가운데 박창균 교수를 안다며 “내가 박 교수한테 전화해볼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복지부의 조남권 연금정책국장과 최홍석 국민연금재정과장은 2015년 6월30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9층 사무실에서 홍완선 본부장을 만났다.

: 복지부에서 기금운용본부 의사 결정을 두고 이런 식의 방문은 없었다. 투자위에서 복지부 압력에 의해 결정했다고 하면 됩니까?

: 삼척동자도 다 그렇게 알겠지만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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