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재의 성덕일기] 영화 〈킬리만자로〉 〈무뢰한〉 오승욱 감독 "굶어죽겠다 싶어 밝은 걸 쓰려는데..첫줄도 못 쓰겠더라"

정리|김형규 기자 2017. 7. 21.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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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범죄와 어둠에 매료된 영화감독 겸 시나리오 작가 오승욱

‘시네필’ 소리를 들을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지만, 나도 꽤나 영화를 사랑한다. 좋아하는 감독과 작가,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찾아 외우는 게 취미다. 그중에서도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의 한국 영화를 ‘최애’(최고로 애정)하는데, 그 취향의 시작에는 오승욱(54)이라는 이름이 여러 갈래로 겹친다. <초록물고기>(1997)와 <8월의 크리스마스>(1998)의 각본, <킬리만자로>(2000)의 감독. 특히 박신양 주연의 누아르 영화 <킬리만자로>는 그 특유의 거칠고 건조한 정서가 지금의 내 어둡고 우울한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가 연출한 다음 작품을 보기까지 무려 15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나온 영화 <무뢰한>(2015)이 흥행에 실패한 뒤 그의 소식을 더 이상 듣기 힘들어졌다. 응원하고 싶은 ‘덕심’ 반, 컴플레인하는 심정 반으로 그를 찾아 나섰다. 정작 마주 앉은 그는 “연출작이 두 편뿐이라 감독이라 불리기도 민망하다”며 겸손해했다.
“젊었을 때 봤던 영화를 지금 다시 보면 그때완 달라진 눈으로 새로운 것들이 보이고 여전히 너무 재밌어요. 제가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거예요.” 영화 이야기를 하는 내내 오승욱 감독의 얼굴엔 함박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 지금도 누가 물으면 <킬리만자로>를 제일 좋아하는 영화로 꼽아요. 제가 본 최고로 우울한 영화. 초반부터 등장하는 ‘피 묻은 밥’ 같은 장면들은 정말 충격적이었죠. <무뢰한> 개봉할 때까지 차기작 언제 나오나 목 빼고 기다렸어요. 그게 15년이나 걸릴 줄이야.

“데뷔작으로 망한 영화 찍었으니까 그다음부턴 뭐 없는 거죠. 그 뒤로 시나리오 많이 준비했는데 하는 것마다 엎어졌어요. <무뢰한>도 처음 시나리오 쓰고 나서 한 네 번은 엎어지고서야 10년 넘게 걸려 나왔으니깐. 그동안 먹고 살려고 이런저런 시나리오도 쓰고 그랬어요.”

- 영화 준비하고 계셨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무뢰배인가, 불한당인가, 제목을 좀 다르게 기억했지만. 말하고 보니 실례인 것 같네요.

“아니 뭐 실례될 것 없죠. 그렇게 미안해하며 조심스럽게 말하지 않아도 돼요. 전 하도 15년 동안 단련이 돼서.(웃음) 첫 영화 망한 데다 제가 쓰는 것마다 내용이 어둡고 그러니까 제작자들이 제 시나리오 보면 다들 난감해했어요. 톱클래스 배우들이 안 나오면 투자가 안 되는데, 많은 남자배우들한테 수없이 거절당했죠.”

- <8월의 크리스마스> 정도를 빼면 감독님이 참여한 영화가 다 폭력과 범죄에 푹 빠져 있어요.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밝은 거 좋아하는 분들이 어두운 거를 해볼 수는 있어도 어두운 거 좋아하는 분들이 밝은 거 하긴 되게 힘든 거 같아요. 저도 버라이어티 예능은 잘 못 하겠어요. 억지로 밝게 꾸미는 나 자신이 되게 어색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저도 한때 만드는 것마다 계속 엎어지다 보니, ‘이러다 굶어 죽겠구나’ 싶어서 좀 밝은 걸 써보자 싶었죠. 아, 그런데 첫 줄도 못 쓰겠더라고요. 굳이 이유를 대자면, 중·고등학교 다닐 때 암울하고 ‘꿀꿀한’ 경험들이 유달리 저한테 깊게 남았나 봐요. 그땐 시대와 사회 전체가 폭력이었잖아요. 어떤 분이랑 얘기하다가 그분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번도 뺨을 안 맞아보고 누구한테 머리도 안 맞아봤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저는 11살 때부터 무지하게 뺨을 맞았는데. 나랑 똑같은 일을 당해도 기억조차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그런 경험을 어딘가 암세포처럼 저장해놓는 것 같아요.”

- 가끔 나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해보곤 하거든요. 어둡고 우울한 이야기로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을까. 달리 말하자면 내가 좋아하는 걸 할 거냐, 대중이 원하는 걸 할 거냐. 근데 그런 질문을 할 때마다 피식 웃게 되는 게, 솔직히 저도 대중이 원하는 게 뭔지 잘 몰라요. ‘사람들은 어두운 거 안 좋아해’라고 말하는 것도 어찌 보면 건방진 생각 아닌가 싶기도 하고. 대중도 좋아하죠. 어둡든 밝든, ‘잘’만 만들면.

“그렇죠. 그건 뭐 최고의 난제죠. 어쨌든 결국은 자기만 재밌어선 안되고 좀 더 그럴듯한 거짓말을 계속 찾아내서 더 재밌는 이야기를 쓰면 되는 건데, 그게 쉽지 않더라고요.”

- 시나리오 쓰실 때 소스는 어디서 많이 얻으세요? 전 아이디어 얻으려고 진짜 별짓 다 하거든요. 화장실에서도 써보고 극장도 가보고. 배가 살살 아프면 재밌는 게 나오는 거 같아서 설사약도 먹어보고.

“저도 뭐 물구나무도 서보고 버스 타고 아무 데나 가보기도 하고.(웃음) 또 하나는 충실한 사전 인터뷰. <무뢰한> 할 때도 사전에 형사들이랑 전직 조폭 두목을 오랫동안 취재했어요. 남의 집 귀한 자식을 험한 데 보낼 수 없으니까 형사들 쪽에는 연출부 후배를 보내고 저는 조폭 쪽을 한달 정도 따라다녔죠. 그중엔 영화에 써먹지 못한 게 더 많아요. 근데 사실 제일 중요한 건 마감의 힘이에요. 데드라인이 있으면 또 어떻게든 써지니까.”

최동훈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등장인물들의 진술과 플래시백 위주로 이뤄진 영화 <범죄의 재구성>(2004)의 독특한 구조가 선배 감독 오승욱이 소개해 준 책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요즘에는 어떤 영감 가득한 책을 읽고 있을까.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책 한 권을 꺼냈다. 캐서린 오플린의 소설 <사라진 것들>.

“범죄소설인데 탐정을 꿈꾸는 소녀의 이야기예요. 상처가 많은 주인공이 겉으론 시침 뚝 떼고 밝은 척하는 게 무지하게 슬퍼요. 누가 이것 좀 영화로 만들어주면 좋을 텐데….”

- 저도 영감 얻으려고 책을 가끔 보거든요. 제 직업을 생각하면 코미디를 봐야 하는데 오히려 다른 거를 찾아보게 되더라고요. 제가 최근에 들은 얘긴데 김훈 작가님은 소방교본 이런 걸 본대요. 괜찮은 방법인 거 같단 생각이 들었어요. 전 요즘 교과서를 많이 봐요. <수학의 정석> 같은 문제집도 보고. ‘명제와 조건’ 이런 걸 보면 뭔가 떠오르는 거 같기도 하고.(웃음)

“와 그거 멋있는데요. 시나리오가 안 풀릴 때 수학 문제를 푼다…”

활짝 웃을수록 작아지는 그의 눈이 순간 장난꾸러기처럼 빛났다. 오십을 훌쩍 넘은 중년의 사내에게서 좀처럼 보기 힘든, 구김살 없는 밝은 표정에 나는 좀 놀랐다. 첫 영화 실패 후 오랜 공백을 보란 듯이 이겨낸 비결을 어쩐지 알 것 같았다.

- 15년의 연출 공백기 동안 엄청 힘드셨을 거 같은데, 의외로 즐겁게 잘 지냈다고 말씀하신 게 인상적이었어요. 40대 중반이 인생의 절정인 것 같다는 말씀도.

“영화아카데미에서 학생들 가르치면서 저도 많이 배우고 좋은 인연을 많이 만들었어요. 시네마테크(예술영화 전용관)에 드나들면서 제가 너무나 존경하고 사랑하는 감독인 세르지오 레오네나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하루 종일 몰아보는 그런 영화적 경험들도 너무 행복했고. 수입이 없어도 돈 걱정 없이 늘 술 얻어 마시고 다니고. 지금 생각해보니 제 인생의 황금기였던 거 같은데요. 내 영화를 못 만든 것만 빼면.(웃음)”

- 저도 어렸을 땐 영화감독이 꿈이었어요. 지금도 연출을 배우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뭐부터 어떻게 배워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알면 저도 좀 가르쳐주세요.(웃음) 저는 아직도 연출의 ‘연’자도 모르겠어요. 어떤 분 말씀이 연출은 배우들 연기를 컷으로 나눠 장면화하는 거라던데. 말은 간단한데 그것처럼 어려운 게 없어요. 정말 절망적으로 어려워요.”

- <그 섬에 가고 싶다>(1993)로 영화 일 처음 시작하셨다고 들었어요.

“박광수 감독님 연출부였어요. 저한텐 영화 스승님이죠. 영화를 어떻게 찍고 배우를 어떻게 대하고 이런 건 아직도 제가 잘 몰라요. 근데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태도 같은 건 박 감독님한테 제대로 배운 거 같아요.”

- 예를 들면요.

“어떤 상황에서도, 단 한 컷도 허투루 찍는 법이 없어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 전태일이 노동청 사무실에 가는 장면을 찍을 때였어요. 감독님이 저보고 콘티를 그려보라기에 저는 두 컷으로 그렸어요. 전태일이 문을 열고 노동감독관실에 들어갔을 때 전태일의 시점으로 사무실 전경을 보여주는 컷과, 맞은편 시점에서 전태일이 입구에 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컷. 그런데 감독님이 ‘니 생각은 그렇구나. 근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면서 다시 두 컷을 그리시는 거예요. 전태일의 시점에서 본 사무실 모습과, 전태일이 수많은 노동청 직원들 속에 섬처럼 오도카니 서 있는 모습. 제가 한 것과 감독님이 한 것 사이에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때 바로 이런 게 연출의 힘이란 걸 알게 됐죠.”

- 굳이 나눌 필요는 없지만, 연출 하는 감독과 각본 쓰는 작가 중 어떤 쪽에 더 애착이 가세요.

“영화 만드는 과정이 크게 준비 단계인 프리 프로덕션과 촬영, 후반 작업인 포스트 프로덕션 이렇게 셋으로 나뉘잖아요. 그중 어떤 작업을 제일 좋아하냐고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저는 시나리오 쓸 때가 제일 즐거워요. 촬영은 뭐 고통의 연속이고. 후반 작업도 거의 지옥이죠. 앞으론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 <킬리만자로>에 보면 눈 장면이 계속 나오는데, 그때 촬영하기 힘들지 않으셨어요?

“어휴, 굉장히 힘들었어요. 정작 눈이 내릴 땐 찍지를 못하거든요. 숙소 밖에 나가질 못하니까. 그래서 눈 그친 후에 눈 있는 데를 찾아가서 찍어야 했는데, 우리가 밟자마자 녹기 시작하는 거예요. 춥고 난감해서 딱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갑자기 박신양씨가 웃통을 벗고는 ‘감독님, 기다려보세요!’ 하더니 스태프들을 진두지휘해서 건너편 산에서 눈을 포대에 담아 날라오는 거예요. 정말 업고 다녀야 돼요. 그런 배우들.”

- 저도 <배우학교>라는 프로그램에서 박신양씨를 처음 뵀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을 준비해서 연기해야 했는데, 전 <킬리만자로>에서 박신양씨가 했던 1인2역 연기를 선택했거든요.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칭찬받았어요. 제가 연기를 잘하진 못했는데, 그 영화와 그 장면을 너무 좋아하다 보니 감정 전달이 잘 됐던 거 같아요.

오 감독과 이야기를 나눌수록 동질감이 느껴졌다. 나이 차가 스무살도 더 나는 ‘형님’에게 이런 친밀감이 드는 건 역시 영화에 대한 애정이라는 강력한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 상수동 한 카페에서 마주 앉은 영화감독 오승욱과 방송인 유병재.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 앞으로 어떤 감독으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예전에 존 포드 감독이 ‘나는 웨스턴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저도 앞으로 몇편을 더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범죄영화를 만들었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얼마 전에 부천영화제에서 ‘전도연 특별전’이 열렸는데, 거기서 전도연씨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예전엔 안 그랬는데 언제부턴가 영화를 남자영화, 여자영화로 가르는 분위기가 됐다’고. 그 말을 듣고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우리는 그냥 인간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것인데, 자기 영화를 어필하려고 속보이게 ‘남자영화’란 식으로 포장하는 건 하지 말아야겠다고. 도연씨에게 배운 거죠. 저는 인간의 죄와 고통, 배신이 있는 ‘범죄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 차기작은요?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데, 앞길이 구만리예요. 한국전쟁 직후 미군부대 근처에서 벌어지는 사연을 담은 갱 영화예요. 기름도 훔치고 총격전도 벌이고.”

- 나중에 작은 역할이라도 저를 써주실 수는 없는지.

“병재씨한테 잘 맞는 역이 있다면 당연히 부탁드려야죠. 저한테도 영광입니다. 이 말 꼭 기록해주세요.”

<정리|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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