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의 총구 경성 뒤흔들다

2017. 7. 21.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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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영화 <밀정> 총격전 실제 모델인 암살단원 김상옥
총독 암살 기도 후 경찰과 벌인 3시간 총격전 전모

750만 명이 관람한 영화 <밀정>의 초반부에 의열단원의 격렬한 총격전이 나온다. 인상적이다. 박진감 넘치는 액션 장면이다. 그 총격전은 역사상 실제 모델을 재현했다고 한다. 1923년 1월 김상옥의 ‘경성 천지를 진동시킨 총격전’이 바로 그것이다. 영화 속 총격전은 실제와 허구가 뒤섞여 있다. 이를 감안해 허구적 측면을 버리고 실제만으로 구성된 신뢰할 수 있는 역사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부응하기 위해 글을 작성했다. 김상옥에 관한 기존 연구 성과들도 이 사건을 상세히 묘사한 바 있다. 하지만 사료상 뒷받침되지 않는 주관적 설명을 포함하거나, 대사를 넣거나, 전투 양상을 과장하는 등의 폐단이 없지 않았다. 임경석 교수는 아무 과장 없이, 사료에 뒷받침된 객관적 사실만으로 당시 상황을 구성했다. _편집자
영화 <밀정>의 초반부에 나오는 총격전. 1923년 1월 암살단원 김상옥이 조선총독부 경찰과 벌인 총격전을 모델로 만들어졌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제공

혹독하게 추운 날이었다. 그날 해 뜨기 직전 경성 기온은 영하 18.8℃였다.① 1년 중 가장 추운 때라 할 만했다. 이틀 전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 차 다니는 큰길이나 구불구불 골목길 할 것 없이 꽁꽁 얼었다.

새벽 5시였다. 그날 일출 시각이 7시49분이었으므로 동트기에는 이른 때였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무리 장정들이 남산 서남쪽 기슭에 위치한 삼판통(三坂通·오늘날 후암동)의 한 민가를 은밀하게 에워쌌다. 모두 21명이었다. 종로경찰서와 동대문경찰서 소속 경관들로 이뤄진 형사대였다.

경성 천지가 물 끓듯 펄펄 끓어

그들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범인을 추적하고 있었다. 닷새 전인 1월12일 초저녁 누군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경찰서 건물의 일부가 파손되고 정문 앞을 지나던 행인 7명이 다쳤다.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의미는 중대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의 지휘 아래 대대적인 수사가 개시됐다. 다수의 혐의자가 붙잡혔고, 시내 요소요소에 경계망이 펼쳐졌다. 계엄령을 내린 듯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경성 천지가 물 끓듯 펄펄 끓었다.② 그러던 차에 동대문경찰서에 첩보가 들어왔다.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삼판통 304번지에 은신해 있다는 것이었다. 믿을 만한 정보였다.

음력 12월 초하루인지라 달이 뜨지 않았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고 추위도 매서웠다. 매우 어두웠지만 경관들은 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혐의자 체포에 즉각 착수했다. 형사대는 돌격조와 매복조로 나뉘었다. 돌격조 4명의 민완 경관들이 널빤지를 잇대 만든 허술한 담장을 뛰어넘었다. 남은 경관들은 집을 에워싼 채 매복했다.

유도 2단에 날래기로 유명한 종로서의 다무라 조시치 형사부장이 권총을 뽑아들고 선두에 섰다. 그 뒤를 종로서 경부 이마세 긴타로 사법계 주임과 동대문서 경부보 우메다 신타로 고등계 주임이 바짝 따랐다. 동대문서의 조선사람 장(張) 형사가 뒤를 이었다. 다무라는 혐의자가 은신한 건넌방 문을 세차게 잡아당겼다. 잠겨 있었다. 다시 한번 힘껏 잡아챘다. 그 바람에 문고리가 빠지며 왈칵 문이 열렸다.

그때 총성이 울렸다. 쉴 새 없이 연이어 울렸다. 방 안에서 권총 탄환이 쏟아져나왔다. 다무라는 심장에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즉사였다. 코와 입으로 피를 토하며 최후를 마쳤다. 방 안에서는 하얀 눈이 깔린 바깥쪽이 잘 보였지만, 밖에서는 어두운 방 안이 보이지 않았다. 뒷걸음치던 이마세 경부는 오른쪽 손목과 왼쪽 옆구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도망치던 우메다 경부보는 등에서 어깨로 관통상을 입고 거꾸러졌다. 열어젖힌 문짝 뒤에 숨었던 장 형사만 무사할 수 있었다.

집 밖에서 매복하던 형사들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종잡을 수 없었다. 요란한 총소리가 경찰이 쏘는 것인지 반대편이 쏘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몇 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총성이 그친 뒤 집 안으로 들어간 형사들은 참혹한 현장을 목격했다. 토방의 위아래와 좁은 마당에는 붉은 피가 낭자했고,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범인은 집 뒤쪽 담을 넘어 산속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를 추격하려 했으나 어둠이 가로막았다. 도망자의 행방을 도무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권총과 폭탄으로 조선 독립에 헌신

중국 상하이 망명 중 사진관에서 찍은 김상옥의 전신 사진.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제공

남산에 수색망이 펼쳐졌다. 날이 밝자마자 온 산에 경찰이 쫙 깔렸다. 경기도 경찰부 지휘 아래 경성 시내 각 경찰서는 물론 인근 지방 경찰서들까지 병력을 냈다. 정복 순사 1천여 명이 동원됐다. 남산을 중심으로 광역 포위망이 구축됐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각처에 비상선을 늘어놓고, 쥐새끼 하나 도망하여 나갈 틈이 없이 엄밀히 경계”가 이뤄졌다.③

그뿐만 아니었다. 경찰은 이중으로 비상선을 깔았다. 포위망이 뚤릴 것에 대비해 남산 자락의 모든 거주지를 검문하기 시작했다. 삼판통, 광희정, 동대문, 왕십리, 고양군 뚝섬 일대가 주요 수색 대상지로 꼽혔다. 가택수색을 했다. 심지어 굴뚝까지 모조리 뒤졌다. 인접 고을로 넘어가는 고갯길도 차단했다. 행여 양주 방면으로 도주할까봐 망우리고개를 경관 수십 명이 지켰다. 기마대도 출현했다. 기마 순사가 총검을 번쩍이며 요소요소 경계했다. 돌연히 경성 시내 풍경이 바뀌었다. 전시 상태나 다름없었다.④

남산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이틀 전 내린 눈이 등성이와 골짜기마다 가득했다. 경찰은 눈 위 발자국에 주목했다. 추격대를 조직해 범인 발자국을 뒤쫓았다. 끊길 듯 이어지는 발자국은 삼판통에서 시작해 산을 넘어 왕십리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왕십리 방면으로 달아난 형적은 희미하게 찾을 수 있었지만 범인의 소재는 끝내 판명할 수 없었다.

쫓기는 이는 김상옥이었다. 나이는 34살. 동대문 인근에서 태어나고 자란 경성 토박이였다. 직업은 자영업자였다. 동대문 밖 남쪽 도로변에 ‘영덕(永德)철물상’이라는 상호의 번듯한 2층 가게를 지녔다. 결혼해 두 자녀가 있었다.

김상옥 삶의 행로에 전환을 가져다준 사건이 30살 때 발발했다. 바로 1919년 3·1혁명이었다. 그는 혁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했고, <혁신공보>라는 지하신문을 발간했다. 이로 인해 경찰에 체포돼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김상옥은 뜻을 바꾸지 않았고 조선 독립에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10월에 석방된 그는 주저 없이 비밀결사 ‘암살단’ 결성에 참가했고 결국 경찰의 추격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⑤

그가 망명지 상하이를 떠나 비밀리에 조선에 입국한 것은 한 달 반 전이었다. 1922년 12월1일 경성 잠입에 성공했다. 목적은 식민통치의 최고 책임자 조선총독 암살이었다. 권총과 폭탄을 의열투쟁의 방법으로 사용하여 식민지 지배자들을 응징하고 대중의식의 혁명화를 꾀하려 했다. 제 한 몸 희생해 공동체의 대의를 실현하려 했다.

김상옥이 피습당한 1월17일은 거사 당일이다.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도쿄에서 개최되는 제국의회에 출석하려고 남대문역에서 경성을 떠나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은신처를 남대문역에서 가까운 삼판통으로 정한 것도 그 때문이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막내 여동생 ‘김아기’와 매부 고봉근의 살림집이 마침 그곳에 있었다. 남대문역 거사를 준비하는 데 그보다 더 적합한 곳은 없었다.

맨발로 눈 덮인 산길 넘어 도주

김상옥의 계획은 그날 새벽의 피습 탓에 어그러지고 말았다. 종로서 폭탄 투척은 계획과 상충되는 사건이었다. 거사를 앞두고 절대적인 은신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폭탄 투척 범인을 잡으려는 경찰의 압박 수사가 그의 일신에까지 미친 것이다.

추적자가 뒤쫓아올 게 명백했다.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경관들을 멀리 떼어놓으려면 신속히 이동해야 했다. 빠른 속도만이 그를 구원할 수 있었다. 추적자를 따돌리려면 눈 위에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했다. 눈이 덜 쌓인 돌이나 마른 풀을 골라 내디뎠다. 포위망도 벗어나야 했다. 남산 일원을 에워싼 대대적인 수색망이 펼쳐질 게 틀림없었다. 남산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야 했다. 그는 쉼없이 내달렸다. 머뭇거리다 수색망에 갇히면 더 이상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뿐인가. 김상옥은 급하게 뛰쳐나오느라 신발 신을 틈이 없었다. 맨발로 눈 쌓인 산길을 내달려야 했다. 겨우내 내린 눈이 온 산을 뒤덮었다. 눈에 발을 내디디면 무릎까지 푹푹 빠졌다. 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길도 없었다. 미끄러져 넘어지기 일쑤였다. 과연 눈과 얼음 위를 맨발로 몇 시간씩 달릴 수 있는가? 김상옥은 그것을 해냈다. 발이 만신창이가 됐다. 동상과 상처로 인해 피투성이가 됐다.

그는 남산 능선을 따라 달리다 수철리 공동묘지가 있는 응봉산 자락으로 옮겨 탔다. 북동쪽 산기슭에 있는 왕십리의 불교 사원 안정사(安靜寺)로 향했다. 김상옥은 안정사 승려의 보호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뜨거운 물과 음식을 제공받았고, 양말과 짚신 한 켤레, 복면 모자를 얻었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그곳에서 하룻밤을 안심하고 잘 수 있었다는 점이다. 김상옥이 동대문 일원에서 오랫동안 거주했기 때문에 아마 두 사람은 안면 있는 사이였던 것 같다. 그러나 뒷날 경찰 조사 과정에서는 실제와 달리 얘기해야 했다. 안정사 승려는 낯선 자의 기만과 강압 때문에 부득이하게 소극적으로 편의를 봐주었을 뿐이라고 말했다.⑥

다음날 저녁 김상옥은 다시 길을 나섰다.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옷을 바꿔 입어 위장했다. 그는 짚신을 거꾸로 신고 눈길을 걸었다. 아직 풀리지 않은 경찰의 수사망을 고려한 행위였다.

1월22일은 겨울답지 않게 날씨가 포근했다. 최저기온이 고작 영하 0.6℃였고, 낮에는 기온이 2.2℃까지 올랐다. 절기가 대한인데도 따스했다. 심지어 전날 큰비까지 내렸다.⑦ 비 온 뒤라 골목길이 질퍽질퍽했다.

“자결할지언정 포로가 될 순 없다”

총격전이 벌어진 서울 효제동 현장 지도. 재래식 변소에 숨은 김상옥은 3시간 동안 총격전을 벌였다.

새벽 3시였다. 종로5가에서 혜화동 방면으로 올라가는 도로 오른쪽에 효제동이 있는데, 그곳으로 경찰들이 은밀히 모여들었다. 효제동 73번지가 목표였다. 그곳에 김상옥이 잠복해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삼판통 사건 이후 엿새 동안 잠적했던 그가 여기에 숨어 있다는 것이었다. 첩보는 고문을 통해서 얻은 것이다. 3·1혁명 때 김상옥의 동료였고 이번에 국내 잠입 뒤 줄곧 그를 돕던 전우진(全宇鎭)이 악형에 못 이겨 비밀을 발설한 것이다.⑧

경찰은 삼판통의 실패를 거울 삼았다. 지휘부 위계와 병력 수가 달랐다. 우마노 세이이치 경기도경찰부장이 지휘했고, 후지모토 겐이치 경기도경 보안과장과 모리 로쿠지 종로경찰서장이 그를 보좌했다. 이들이 현장 지휘부를 구성했다. 경성 시내 각 경찰서에 비상소집령을 내렸다. 비번 순사들까지 동원됐다. 보도에 따르면 ‘수백 명’의 무장 경관이 효제동 일대를 수십 겹 포위했다.

진압도 서두르지 않았다. 포위망을 짜놓은 채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시야를 확보한 상태에서 작전을 전개하려 했다. 동천이 밝아오는 7시쯤 경찰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완전무장한 저격병 30명이 담을 넘고 지붕을 기어올라 화선을 짰다. 동대문서 고등계 주임 구리타 세이조 경부가 이끄는 결사대 5명이 행동에 나섰다. 그들은 김상옥이 거처하는 방으로 한 걸음씩 접근했다. 숨도 크게 쉬지 않았다.

마침내 방문을 열어 벼락같이 돌진해 들어갔다. 뜻밖에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방 안에는 병풍이 둘러쳐 있을 뿐, 아무런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왠지 벽장문이 수상했다. 구리타 경부는 벽장문을 열어젖히며 들입다 사격을 가했다. 벽장 속에는 옛 한적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뒤에 김상옥이 숨어 있었다. 그는 침착하게 조준사격으로 대응했다. 구리타 경부는 오른쪽 어깨에 총을 맞고 거꾸러졌고 다른 결사대원들은 대응사격을 하며 구리타를 부축한 채 철수했다.

벽장 뒷벽은 흙담이었다. 김상옥은 필사적으로 벽을 뚫었다. 다른 도구가 없었다. 맨손으로 벽을 파느라 손톱이 온통 까졌다. 발을 굴러 벽을 차 발가락이 부러졌다. 다행히 뒷벽 한 귀퉁이가 헐렸다. 김상옥은 73번지를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그는 옆집 74번지 담을 타고 넘어 대각선에 위치한 76번지 집으로 잠입했다. 공포에 떨던 집주인은 김상옥을 들이려 하지 않았다. 둘은 승강이하며 서로 기를 썼다. 그 소란 탓에 김상옥의 위치가 다시 경찰에게 드러나고 말았다.

76번지와 이웃집 72번지 사이에 빈 공간이 있었고, 그 깊숙한 곳에 재래식 변소가 있었다. 사각이 형성돼 탄환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좋았다. 김상옥은 그곳으로 숨어들었다. 경찰은 회유를 시도했다. 목숨을 살려줄 테니 항복하라고 했다. 김상옥은 잠자코 대응사격으로 답했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상하이를 떠나면서 동료들에게 남긴 말이었다. 김상옥은 그 말을 굳게 지켰다. 결국 콩 볶듯 사격이 개시됐다. 경찰들의 일제사격이 오래 계속됐다. 아침 7시에 시작된 총격전은 3시간이나 경과한 뒤 종료됐다.

죽는 순간까지 총을 놓지 않다

김상옥의 주검은 참혹했다. 발은 물론 무릎까지 동상에 걸렸다. 총알 맞은 곳과 동상 걸린 곳에서는 죽은 뒤에도 계속 피가 흘러 땅을 붉게 만들었다. 검시관의 관찰에 따르면, 사체의 머리와 가슴, 왼쪽 발가락에 총상이 있었다. 그중 머리와 가슴의 총상이 치명적이었다. 김상옥은 죽는 순간까지 권총을 놓지 않았다. 두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검시관은 김상옥이 오른손 둘째 손가락으로 권총의 방아쇠를 건 채 힘있게 쥐고 있었다고 썼다.⑨

참고 문헌 ① ‘천기예보’ , <동아일보> 1923. 1.18. ② ‘종로서 타령 9, 신년벽두에 大變, 최초의 폭탄세례’ , <동아일보> 1929. 9.14. ③ ‘남산을 徒步로 安靜寺에 은신’ , <매일신보> 1923. 3.16. ④ ‘설중의 남산 포위’ , <동아일보> 호외 1923. 3.15. ⑤ <김상옥·나석주 열사 항일실록>, 김상옥·나석주열사기념사업회, 1986. <서울 한복판 항일 시가전의 용장 김상옥 의사>, 윤우, 백산서당, 2003.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 김동진, 서해문집, 2010. <경성을 쏘다>, 이성아, 도서출판 북멘토, 2014. <김상옥 평전>, 이정은, 민속원, 2014. ⑥ ‘僧庵의 生米飯으로’ , <동아일보> 호외 1923. 3.15. ⑦ ‘천기예보’ ‘휴지통’ , <동아일보> 1923. 1.23. ⑧ 宋相燾, <騎驢隨筆>(한국사료총서 제2집), 국사편찬위원회, 1955. 320쪽 ⑨ ‘令人酸鼻의 血流屍體’ , <조선일보> 1923. 3.16.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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