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은 선거 중] 권력 놓지 않으려는 '차베스 사도'의 위험한 도박

김이삭 2017. 7. 21.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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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베네수엘라 제헌의회 선거

유가폭락 이어지며 경제 파탄

국민들 끼니마저 거를 정도

야당 장악한 의회 탄핵 추진에

마두로 대통령 정국 뒤집기 시도

“기존 의회 해산, 새 헌법 제정”

반정부시위 격화 사망 100여명

선거 제대로 치러질 지 미지수

베네수엘라 정부의 제헌의회 선거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19일 수도 카라카스에서 경찰의 강경 진압에 대비해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있다. 카라카스=EPA 연합뉴스

한 때 ‘천국’으로 불린 나라가 있다. 끝없이 펼쳐진 카리브해 해변에는 파도가 넘실댔고, 만년설로 뒤덮인 안데스산맥을 구경하려 관광객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아름다운 자연에 더해 땅을 파면 원유가 펑펑 쏟아졌다. 매장량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아 먹고 살 걱정이 없는 듯 보였다. 1999년 좌파정권이 들어서자 두려움을 느낀 일부 부유층과 지식인이 떠났지만 국민은 동요하지 않았다. 정부는 석유산업을 국유화해 번 돈을 빈곤퇴치와 무상복지에 쏟아 부었다. 10년이 지난 뒤 50%에 달했던 빈곤율은 절반(29.8%)으로 뚝 떨어졌다. 곳곳에 학교를 세워 무상교육을 한 덕분에 ‘문맹’이란 단어도 사라졌다.

천국이 지옥으로 변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미국 허핑턴포스트는 요즘 이 나라의 상황을 “반정부 시위가 내전으로 확대돼 유럽 난민 대란을 촉발했던 시리아 사태를 보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유엔난민기구(UNHCR)가 최근 발표한 자료를 보면 올 들어 고국을 등지고 난민ㆍ망명 신청을 한 국민은 5만2,000여명. 지난해(2만7,000여명)보다 두 배나 많다. ‘21세기 사회주의 실험’의 성공 사례로 꼽혔던 베네수엘라의 현주소다.

베네수엘라는 30일(현지시간) 제헌의회 선거를 앞두고 있다. 545명의 의원을 새로 뽑아 신(新) 헌법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정치ㆍ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해법”이라며 선거의 정당성을 강조했지만 이를 그대로 믿는 국민은 없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야권 관계자의 말을 빌려 “살인적 물가와 생필품 부족에 지친 민심의 저항이 거세지면서 차기 대선에서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마두로 정권이 의회를 무력화하려 ‘친위 쿠데타’를 시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부 무능 대규모 저항 불러

베네수엘라 위기의 1차적 원인은 정치권 갈등이다. 2015년 총선에서 야권은 전체 167석의 3분의2(112석)를 차지해 집권 베네수엘라통합사회당(PSUVㆍ55석)에 압승을 거뒀다. 20여개 야당 연합체 국민연합회의(MUD)는 여세를 몰아 대통령 탄핵과 국민소환 등을 추진했다. 그러나 정권의 반격은 만만치 않았다. 급기야 올해 3월 친정부 성향의 대법원이 의회를 전격 해산하자 정권퇴진 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번졌다. 폭발한 민심이 거리로 쏟아졌고, 이에 맞선 정부도 군경을 동원, 강경 진압으로 일관해 사상자가 속출했다. 100일 넘게 이어진 시위 과정에서 숨진 사람만 100여명을 헤아린다.

혼란은 거리에 국한되지 않았다. 경찰 헬기가 대법원을 공습하는가 하면, 정부 지지자들이 의회에 난입해 야당 의원들을 폭행하는 등 사실상 무정부 상태를 방불케 하는 폭력과 테러가 일상이 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직접 나서 “소요 사태가 내전이나 쿠데타로 비화할 우려가 크다”며 대화를 호소할 만큼 마두로 정권을 향한 불신의 골은 깊었다.

마두로 다이어트의 진실

파국의 진짜 배경은 파탄 난 경제에 있다. 베네수엘라에는 ‘마두로 다이어트’란 말이 있다. 현 정권의 무능 탓에 식량위기가 지속되면서 국민들이 잘 먹지 못해 체중이 감소했다는 뜻이다.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현지 설문조사 결과를 인용한 미 CNN방송 보도를 보면 ‘하루 두 끼 미만 식사를 한다’는 응답자가 2015년 11.3%에서 지난해 32.5%로 3배나 증가했고, 실제 이들의 평균 몸무게는 1년 사이 8.6㎏이나 줄었다.

비극은 저유가의 역습에서 비롯됐다. 2013년 만해도 배럴당 100달러 선을 유지했던 국제유가는 작년 중순 28달러까지 떨어졌다. 당연히 원유수출 대금 대부분을 무상복지에 투입했던 정부는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미 바클레이은행 이코노미스트 알레한드로 아리자는 “베네수엘라는 남미 산유국 중 유가 폭락의 최대 피해자”라며 “지난해 원유판매 수입이 270억달러로 전년도의 3분의1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자연스레 나라 곳간은 바닥났다. 외환보유고는 이달 22년 만에 100억달러를 밑돌았다. 베네수엘라 화폐 ‘볼리바르’는 외환시장에서 휴지조각이 된 지 오래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 관계자는 허핑턴포스트에 “베네수엘라를 떠나는 이유는 정치적 박해나 범죄가 아닌 오로지 경제적 문제 때문”이라며 “이제 무상의료는커녕 변변한 백신ㆍ치료약도 없어 임신부와 환자들이 브라질 등 인근 국가들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고 전했다.

차베스 따라하기 결말은

마두로의 제헌의회 승부수는 2013년 암으로 사망한 전임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행보를 빼닮았다. 차베스도 99년 집권하자마자 제헌의회 선거를 통해 반대 세력의 싹을 자른 뒤 14년 ‘좌파 독재’의 발판을 마련했다. 차베스 밑에서 부통령을 지낸 마두로는 평소 ‘차베스의 사도(使徒)’를 자처할 정도로 그의 후광에 기대고 있다.

하지만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은 차베스와 달리 이번엔 제대로 선거가 치러질지조차 미지수다. 법적 효력은 없지만, 야권 주도로 16일 유권자 700만명이 참여해 실시된 개헌 찬반 투표에서 무려 98%가 제헌의회 구성에 반대했다. MUD는 또 ‘결전의 날’로 명명된 20일 전국 24시간 총파업을 밀어 붙여 부당 선거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관망하던 미국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마두로 정권이 제헌의회 선거를 강행하면 강력하고 신속한 경제조치를 취하겠다”면서 강도 높은 제재를 시사했다. 영국 BBC방송은 “마두로가 기댈 건 차베스 향수에 젖어 18년간 맹목적 지지를 보낸 ‘차비스타(차베스 열성 지지자)’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김이삭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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