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모범복지는 '장밋빛 구호' 아닌 '껄끄러운 증세합의' 결과

고철종 기자 2017. 7. 2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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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때마다 '데자뷰', 국민은 속지 않는다


복지확대와 경제 활성화를 중심으로 한 국정 과제를 놓고 증세 없이 잘 해보겠다던 정부가 하루 만에 입장을 번복했습니다. 여당 내부에서까지 “솔직해지자”는 의견과 증세 불가피론이 제기된 데 따른 겁니다.

이틀 전 국정과제 발표 직후, 관련 내용을 다룬 언론의 제목에서, 또 정책 내용을 평가하는 전문가들의 의견에서 우리 국민들은 미묘한 ‘데자뷰’를 느꼈을 것입니다.

‘또, 증세 없는 복지대책’, ‘장밋빛 재원 방안’, ‘절약으로 재원 마련’, ‘朴 공약 되풀이’ 같은 비판적 제목의 언론 기사 뿐만 아니라, ‘세출 구조조정’, ‘비과세 감면 정비’, ‘법인세 실효세율 인상’ 같은 가끔 나오지만 친숙치 않은 용어가 바로 어디서 본 듯한 데자뷰를 만들어 낸 겁니다.

일반 기업에서 조직개편 후에 새로운 리더십이 들어와 판을 짜보면 이상하게 예전과 큰 차이 없는 설계가 나오는 것처럼, 새 정부의 새로운 구상 발표도 항상 비슷한 느낌이 듭니다. 왜냐하면 추구하는 이상이 달라도 현실을 감안하면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 어느 정도는 닮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지출 항목별로 비율을 달리하고 적절히 포장해서 예전과 다른 것이라고 내놓는 겁니다. 조세 지출의 항목 비율을 달리 한다는 건, 가치와 이념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분명 차별화의 요인이지만, 어쨌든 국민이 보기엔 그게 그거 같습니다. 때문에 언론도 예전 정권 때와 비슷한 비판적 제목을 달고, 국민들은 어디서 본 듯한 ‘데자뷰’를 갖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증세는 어떤 정부에서나 금기어(禁忌語)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세금 좋아하는 국민은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은 나에게 혜택이 돌아오는 것인데도, 당장 내 눈앞에서 돈이 나가고, 혜택은 눈에 보이지 않게 나중에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대놓고 증세를 천명하는 정권은 없습니다. 대신 전문가 집단, 특히 재정과 세수를 다뤘던 부처 출신의 정치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재원 마련 방안을 만든 뒤, 국민들이 반발하지 않게 들어갈 돈은 과소포장하고 효과는 과대포장해서 발표합니다.

그들 역시 예전 실무 공무원이었을 땐, ‘증세 없는 복지는 마술’이라며 사석에서 비판의 날을 세웠던 사람들이지만, 지금은 정치인들이기에 알면서도 정무적인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정직하게 하자는 비판이 쏟아지자, 정부가 말 나온 김에 못 이기는 척 증세 검토 입장을 밝힌 것이죠. 속으론 좋을 겁니다. 어떻게 보면 어차피 불거질 일인데 이렇게 빨리 분위기를 만들어주니 말입니다.

더불어 경기가 상승기류를 탈 때 출범하면서 세수가 예상보다 60조 원 이상 더 늘 것으로 보이는 부분도 문재인 정부에겐 호재입니다. 처음에 증세 이야기를 피해서 국정과제를 발표했던 자신감도 여기에 근간을 두고 있었던 겁니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도 있습니다.

국내외적으로 돌발 변수가 생기면 세금이 안 걷힐 건데 너무 낙관적인 세수 추계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 경제는 대외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저유가, 글로벌 금융위기, 무역분쟁 같은 대외 악재에 따른 부침이 큰 데다, 지금은 사드와 북핵 변수까지 도사리고 있기에 그런 비판은 합당합니다.

기타 재원 마련의 방편으로 나온 세출 구조조정과 비과세 감면 축소, 탈루 소득 과세 강화 등은 모든 정권에서 항상 발표했던 내용입니다. 그만큼 실효성이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지요.

경제장관회의에서 소득세와 법인세 인상이 논의되었다

그래서 예상보다 빨리 나온 증세 검토 방침은 국민에겐 껄끄럽지만, 솔직하고 현실적인 선택일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나올 증세 논의는 이른바 다수가 지배하는 국민 정서의 논리보다는 합리적 판단을 우선해야 합니다.

투자나 고용 등을 이유로 법인세를 깎아줬는데 별 효과가 없었다면, 현재 일부 대기업들이 중소기업보다도 낮게 적용 받고 있는 법인세 실효세율을 크게 올려야 합니다. 혜택은 다 보면서 사회에 기여는 안 하고 있는 대기업을 세금까지 배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전체 근로자의 절반에 가까운 8백만 명의 근로자가 사실상 세금을 한 푼도 안내는 현실도 개선해야 합니다. 모든 국민이 적더라도 세금을 낸다는 기본 원칙이 지켜져야, 여당에서 추진 중인 부자증세 논의도 힘을 얻고 합리화 될 수 있습니다.

이참에 복지관련 수요가 급증했을 때, 외국에선 어떻게 했는지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OECD 국가들은 세입증대 방안을 놓고, 직접세와 간접세, 누진세와 역진세 등에 관한 방대한 연구 끝에 그들의 상황에 적합한 방안을 마련했습니다.

부가가치세나 소비세 같은 간접세는 소득이 열 배 차이가 나도 같은 세금을 내기 때문에 분배정의에는 맞지 않아 역진세라 불립니다. 하지만 세금을 상품가격으로 생각하고 내기에 조세 저항이 별로 없습니다.

반면, 소득세 같은 직접세는 소득이 높은 사람들에게 크게 부담을 지우는 누진세이기에 분배정의에는 맞지만, 조세저항이 매우 커서 북유럽 국가의 경우 고소득층이 나라를 떠나는 부작용까지 발생했습니다.

이런 요소 등을 감안해 우리만의 증세방안을 중장기적으로 준비하고, 필요할 때가 되면 국민에게 용감하게 내놓아야 합니다. ‘증세 없는 복지의 마술’은 이상에만 있을 뿐, 현실에선 단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는 게 전 세계의 역사입니다.

모범적인 복지국가는 냉혹한 현실에 대한 합리적인 분석, 솔직한 공표와 치열한 논의, 그리고 양보와 타협의 결실이지 마술의 결과가 아닙니다.

고철종 기자sbskcj@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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