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불길 지나간 자리, 山이 솟고 江이 흐르네

김윤덕 기자 2017. 7. 21.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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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火) 산수화 그리는 작가 한경원.. 포스코미술관 '佳境'전 25일까지]
141대 1 경쟁 뚫고 신진작가 당선
나무판에 이쑤시개 꽂아 밑그림.. 불붙여 태우고 그을려가며 작업

남들은 고리타분해서 싫다는 수묵화가 스무 살 청년은 좋았다. 덧칠 따위 없이 한쾌에 휘휘 그려가는 일필휘지(一筆揮之)보다 스릴 넘치는 퍼포먼스는 없었다. 사람 몸에서 그림이 뿜어져나온달까. 그러다 슬럼프가 왔다. 전국 산천을 누비며 그린 산수가 죄다 시시해보였다. 마음에 차는 그림이 단 한 장도 없었다. 화첩에 불을 질렀다. 그 순간이다. 화선지로 번지는 불길, 자신의 몸까지 뒤덮을 기세의 뜨거운 에너지를 느낀 건! '동양화 대가들이 말하던 기운생동이란 이런 걸까?' 청년 작가 한경원(32)의 '불(火) 산수화'는 그렇게 태어났다.

이달 25일까지 서울 테헤란로 포스코미술관에서 열리는 '가경(佳境)'전은 불로 그린 이색 산수화를 음미할 기회다. 포스코미술관이 매년 실시하는 신진 작가 공모전에서 141대1이라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정됐다. 김윤희 선임 큐레이터는 "말만 실험이지 서양화나 다름없는 동양화들과 달리 나무와 불길, 그을음을 재료 삼은 한경원의 산수화는 먹의 느낌, 전통 수묵의 미학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기존과 전혀 다른 기법이란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했다.

141대1의 경쟁을 뚫고 올해 포스코 미술관 신진작가공모전에 당선된 한경원 작가가 불로 그린 산수화 앞에 섰다. 그는 “먹과 불이 갖는 일필휘지의 즉흥성에 짜릿한 스릴을 느낀다”고 말했다. /남강호 기자

산수에 처음 불을 입힌 건 대학(홍익대 동양화과) 2학년 때다. "조소과 수업을 들었는데 교수님이 성냥이랑 이쑤시개를 주면서 뭔가를 만들어오라고 하셨어요. 보통은 쌓거나 잘라서 뭔가를 만들어갈 텐데, 저는 목판 위에 이쑤시개를 올려놓고 불에 태워서 산수화를 그려갔지요. 교수님이 어찌나 당황하시던지(웃음)."

작업 방식이 독특하다. 우선 나무판(자작나무)을 백토로 칠한다. 여기에 드릴로 작은 구멍들을 뚫어가며 스케치를 한다. 구멍에 이쑤시개를 꽂은 뒤 불을 붙인다. 나무판을 움직여 불길을 조절한다. 짙은 먹빛이 필요하면 좀 더 태우고 농담은 그을음으로 조절한다. "처음엔 불 조절을 못해 다 타버렸어요. 어찌나 허망하던지." 시행착오 끝에 탄생한 불산수화는 수묵의 담백한 맛을 지니면서도 역동적인 불기운이 흘러넘쳤다. "결국 원재료는 같았어요. 나무 태울 때 나오는 그을음과 재를 긁어서 만드는 게 먹이니까요. 화선지의 원료도 나무 아닌가요? 뭣보다 먹과 불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일회성과 즉흥성이 좋았어요. 정말 재미있었죠."

이번 전시엔 불로 그린 산수화의 뒷면도 공개한다. 드릴로 구멍을 뚫어 스케치한 자국, 불에 탄 흔적이 한 폭의 드로잉처럼 보인다. /포스코미술관

이번 전시엔 가로 14.4m, 세로 2.4m 대작 'Ash-74'도 선보인다. 3개월 동안 매달린 작업으로 이쑤시개만 4만개가 들어갔다. 작품의 일부는 뒷면도 보여준다. "관람객이 제작 과정을 유추하게끔 도와주기 위해서"다. '몰락한 숲' '눈물의 화원' 등 그을음(검댕)만으로 드로잉해 맑고 담백한 신작들도 눈길을 끈다. "다들 불로 그렸다는 사실만 신기해하시는데, 작가로서 바람이 있다면 우리 진경산수가 갖고 있는 매력을 제 그림에서도 찾아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둘레둘레 걸어가면서 실제로 산에 오르듯 하나의 화폭에 다각도의 시점이 투영돼 있으니 꼭 살펴봐주세요."

추사 김정희의 '법고창신'을 신념으로 삼고 산다는 이 대견한 청년은 도전하고픈 실험이 너무나 많다고 했다. "일단 '불붓'을 만들고 싶어요. 직접 불을 다룰 수 있는 기구요." 캔버스가 목판에서 철판으로 옮겨갈 가능성도 높다. '불맛', 그다음이 궁금하다. (02)3457-1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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