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그림에 이슬람 양식이 등장한 까닭은

입력 2017. 7. 20. 20:06 수정 2017. 7. 20.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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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웅의 미스터리 그림기행
(9) 광저우(廣州)
[한겨레]
새로 복원된 취안저우의 이슬람사원 칭징쓰(淸淨寺). 한눈에도 이슬람풍이 완연했다. 사진 신상웅 제공
지난 회 요약 그림 <연평초령의모도>(<의모도>)는 박제가(1750~1805)가 그린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라 보기에는 전문적인 직업화가의 솜씨가 보여 혹시 청나라의 화가 나빙(1733~99)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견도 있었다. 1790년 사신단의 일원으로 베이징에 머물던 박제가는 나빙과 여러차례 만나 깊은 교류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의모도>의 주인공은 명나라가 쓰러져가던 때 남중국의 바다에서 군사력을 모아 청나라에 대항했던 장군 정성공(1624~62)과 그의 일본인 어머니다. 1644년 베이징을 함락한 청나라 군대는 남쪽으로 진군했고 그 와중에 정성공의 어머니 다가와가 죽임을 당한다. 결국 정성공은 청의 세력에 패한 뒤 대만(타이완)으로 가 네덜란드를 몰아내고 그곳에 자신들의 정권을 세운다. 화가 나빙은 1778년 무렵 고향인 양저우를 떠나 남중국의 해안가를 따라 광저우로 간다.

그림 속 화가의 의도를 관찰자의 시각으로 읽어내는 일은 때론 억측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또 화가가 조합한 상징물들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의미하는 바가 달라지기도 한다. 때문에 해석의 가능성은 늘 열려 있다. <의모도> 역시 그렇다. 그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특징으로 그동안의 연구자들은 화면 중앙의 ‘서양식’ 2층 건물을 꼽았다. 나는 그것이 정성공이 태어난 일본의 국제무역항이었던 히라도의 상징일 거라 여겼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서양식’이라는 말만큼 무책임한 주장도 따로 없었다. 더구나 히라도에 남아 있는 네덜란드나 영국의 상관 건물과도 닮은 구석이 별로 없었다. 그렇다면 그 ‘서양’은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그리고 <의모도>를 그린 화가는 어째서 저런 2층의 석조건물을 ‘서양’의 스타일을 대표하는 것으로 표현했던 것일까. 이런 결과가 어떤 방식으로든 화가의 경험과 밀접하게 연관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이곳 광저우에서 그에 대한 추측의 실마리와 마주치게 될지도 몰랐다.

이라크 사마라(samarra)의 이슬람 건축. <의모도> 속 건축양식을 닮았다.

# 광저우의 이슬람 사원

목적지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도시의 여느 거리와 다르지 않았지만 어둑한 가로수 아래나 좁은 골목 안쪽에서 풍겨오는 냄새는 어쩌지 못했다. 가게 입구에는 갓 잡아 껍질을 벗긴 양의 선홍색 몸뚱이가 쇠갈고리에 걸려 있었고 흰 모자를 쓴 회족(回族)들이 연기를 피워 올리며 양꼬치를 구웠다. 저들은 보통 이슬람교도들, 자기들의 말로는 무슬림이라고 했다. 푸줏간 옆집에서는 벽돌을 쌓아 만든 화덕에서 작은 쟁반만한 빵을 구웠고 유독 소고기라면집이 많았는데 절대 술은 팔지 않았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저들은 누구보다 규칙적인, 종교적이라 불러도 마땅해 보이는 일상을 사는 것처럼 보였다. 하루의 일과는 시계처럼 정확했다. 이곳 중국에서 해마다 가장 큰 명절인 춘절(春節)이 오면 거의 모든 식당은 문을 닫았다. 짧아도 일주일이었고 한 달을 넘기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늘 회족들의 거리를 찾아서 끼니를 구했다. 멀리 청록색의 유리질 기와를 인 이슬람사원 화이성쓰(懷聖寺)의 지붕이 보였다.

“무슬림인가요?”

이럴 때 1초라도 머뭇거리면 낭패를 본다. 콧수염을 기른 사내가 문 앞에 서서 눈을 위아래로 치켜떴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의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간다. 살짝 긴장한 탓에 하마터면 그에게 합장을 할 뻔했다. 따가운 시선이 뒤통수로 날아왔을 것이다. 뒤돌아봐선 안 된다. 딱히 믿는다고 내세울 만한 종교도 없으니 오늘은 무슬림이 되기로 작정한다. 녹음이 짙은 측백나무가 여럿이었고 경내는 조용했다.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사람들이 소리 없이 걸었다. 무려 1300여 년 전 당나라 때 지어졌다는 이슬람사원이었다. 한자와 나란히 쓴 이슬람문자를 빼고는 건물들은 지극히 중국적이었는데 내가 보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목을 뒤로 한참을 꺾어야 겨우 꼭대기가 보이는, 높이가 거의 40m에 육박하는 원형의 미너렛(minaret, 이슬람사원의 첨탑)이었다. 이슬람사원의 상징과도 같은 것. 탑의 정상에는 닭 모양의 풍향계가 있었다고 했다. 예전에는 항해하는 배들의 이정표가 되기도 했다던 탑의 맨 꼭대기에, 멀리서 보면 입을 다문 꽃봉오리 같은 둥근 지붕, 바로 돔(dome)이었다.

<의모도>에 그려진 건물이 ‘서양식’으로 보이긴 했지만 나는 자꾸만 2층의 둥근 지붕과 지붕을 둘러싼 작은 난간의 장식들, 그리고 아래층에 늘어선 돌기둥들이 의심스러웠다. 그것들은 보통 이슬람사원 건축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특징이었다. 어째서 그런 이슬람풍의 양식들이 <의모도>에 그려진 것인지 의아했다. 사실 이곳 광저우로 오기 전에 머물렀던 취안저우에도 송나라 때 세워진 칭징쓰(淸淨寺)라는 이슬람사원이 있었다. 사원 안으로 들어서자 마치 딴 세상이었다. 이곳 화이성쓰의 중국풍 건물과는 다른 키 큰 돌기둥과 커다란 돔이 인상적인, 한눈에도 이슬람풍이 완연했다. <의모도>에 남겨진 둥근 지붕과 돌기둥, 그리고 1778년 무렵 취안저우를 지나 광저우로 향하던 나빙.

청나라 말기 중국인 화가가 그린 유화. 서양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 서양 그림에 영향받은 나빙

이른 아침 버스며 지하철에서 내린 사람들은 골목을 향해 뛰었다. 손수레와 자전거와 짐을 가득 실은 차량들이 뒤엉켰다. 중국 전역으로 보내질 물건들로 혼잡한 이 거리는 ‘십삼행’(十三行)이 있던 자리였다. 십삼행이란 청나라 초기부터 아편전쟁 이전까지의 대외무역항을 가리키는 지명이자 상인집단을 이르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곳은 당시 광저우를 드나들던 가장 번화한 출입구이자 시장이었던 셈. 서양의 그림도 이곳으로 들어왔다. 처음은 16세기 후반 선교사들이 가져온 성화(聖畵)였다. 그들 중에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도 있었고 선교사로 와 황실의 궁정화가가 된 주세페 카스틸리오네(Giuseppe Castiglione, 1688~1766)도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베이징에서 생을 마감했다. 유화와 동판화가 유입되면서 서양의 그림은 급속하게 중국 내에 퍼졌다. 광저우의 부유한 상인의 집에는 각국에서 들어온 다양한 것들, 이를테면 이탈리아의 유화와 프랑스의 시계, 제네바에서 만든 보석함 등이 중국의 족자그림들과 함께 방을 장식했다.

나빙이 머물던 당시의 광저우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무역의 목적은 이윤이었고 그림도 마찬가지였다. 바다를 건너 온 낯선 문화는 광저우에서 충돌했다. 평가는 양극으로 치달았다. 눈을 감고 멸시하거나 열렬히 추앙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림에 대한 수요가 늘었고 훗날에는 오히려 중국인 화가들이 유화를 익혀 역수출을 하는 상황으로 반전되기도 했다. 광저우에서 그려진 그림들은 다시 바다를 건너 서양으로 향했고 일부는 나가사키로 가는 배에 실렸다. 나빙은 이곳에서 어떤 그림들을 보았을까. 그는 심심풀이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림을 팔아 밥을 먹어야 하는 전문직 화가였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고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스스로 변화해야만 했고 나빙은 그런 기대와 목적을 가지고 광저우에 왔을 것이다. 이곳에서 서양의 그림을 보았고 거기에서 얻은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에 차용했다.

광저우를 관통하는 주강. 사진 신상웅 제공

# 광저우를 언급하던 박제가

‘십삼행’ 시장에서 남쪽 대로를 건너면 곧바로 광저우 시내를 관통하는 주강(珠江)이었다. 강을 건너고 싶은 날은 배를 탔다. 강의 이쪽과 저쪽을 여객선은 자주 오갔고 자전거나 오토바이도 함께 승선했다. 가끔 몸체가 무거워 보이는 화물선들이 탁한 강물을 갈랐다. 나빙을 싣고 오던 배도 이 강을 거슬러 왔을 것이다. <의모도>와 관련된 곳을 찾아다니는 동안 내 생각은 늘 박제가와 나빙이 베이징에서 나누었을 ‘대화’에서 떠날 수 없었다. 둘 사이를 가깝게 만들었을, 거창하게 사상이랄 것까지는 아니어도 공통된 관심사나 취향이 있었다면 그들은 좀 더 쉽게 친해졌을 것이다. 이곳 광저우는 어땠을까. 조선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외국과 무역에 나서야 한다고 의논을 펼치던 젊은 박제가는 남중국의 바다와 이곳 광저우를 언급하곤 했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이 도시의 혼잡과 화려함에 대해 그는 나빙에게 물었을까. 그리하여 둘 사이는 조금 가까워졌을까. 그 당시 배를 타고 이곳에 도착한 사람들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던 것은 저 멀리 높이 솟은 화이성쓰의 미너렛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 목록에 이곳 광저우를 넣어도 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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