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판사 블랙리스트' 규명 요구하며 판사들 사표제출 시작

이범준 기자 2017. 7. 20.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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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전국법관대표회의의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추가조사 요구를 거부한 양승태 대법원장에 항의해 현직 부장판사가 사직서를 제출했다. 20일 인천지법 최한돈 부장판사는 양 대법원장에게 사직서를 제출하고 자신의 심경을 담은 글 ‘판사직에서 물러나면서’를 법원 내부통신만에 공개했다. 최 부장판사는 지난달 19일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현안 조사 소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앞서 지난 1일에는 전주지법 군사지원 차성안 판사가 판사 블랙리스트에 대한 국정조사를 요구하며 “사법부가 블랙리스트 논란을 묻어두고 간다면 판사의 직을 내려놓을지를 고민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차 판사는 법관대표회의의 전주지법 대표다.

다음은 최 부장판사가 법원 내부통신망에 올린 글 전문.

양승태 대법원장(왼쪽)이 지난 12일 청와대에서 열린 ‘5부요인초청 정상외교성과 설명회’에 참석해 문재인 대통령(오른쪽)과 인사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판사직에서 물러나면서

존경하는 전국의 법관 여러분께,

저는 지난 6월 19일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현안 조사 소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된 인천지방법원 최한돈 판사입니다. 저와 소위 위원들은 위원으로 선출된 직후부터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부여한 소임을 다하고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전국법관대표회의 당시 저는 추가조사와 관련하여 발생할지도 모를 보안사항의 유출 및 사생활 침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합리적 조사 방안을 법원행정처와 협의하여 마련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저희 소위에서는 6월 20일 법원행정처 차장님께, 조사 소위는 조사과정에서 확보된 전자증거 등이 외부로 유출되는 일이 없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며, 이를 담보하기 위하여, 조사방해 목적이라고 보이지 않는 한, 행정처가 요구하는 경우에는 언제든지 행정처의 입회 아래에서만 업무를 수행하고, 보안유지에 필요한 행정처의 제안도 적극 수용하겠다는 취지의 협조메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지난 6월 28일 대법원장님은 위와 같은 조사 소위 위원들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종전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이유를 내세워 추가조사를 거부하였습니다. 이것은 대법원장님이 우리 사법부의 마지막 자정의지와 노력을 꺾어 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지난 2009년 신영철 전 대법관이 서울중앙지방법원장 재직 당시 있었던 부당한 재판개입에 대하여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던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 사법부는 사법행정권이라는 미명 아래 더욱더 조직화된 형태로 법관들의 자유로운 연구 활동까지 감시당하는 현실 앞에 있습니다. 혹자는 이를 두고 구체적 재판권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법관독립을 침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지난달 19일 경기도 고양시 사법연수원에서 열린 전국법관대표회의에 참석한 법관들이 이름표를 받고 입장하고있다. / 박민규 선임기자parkyu@kyunghyang.com

하지만 관료적 사법행정체계를 이루고 있는 우리 사법부 내에서 공개되지 않고 은밀히 이루어지는 법관에 대한 동향파악은 그 어떤 이유를 내세워 변명하더라도 명백히 법관독립에 대한 침해입니다. 이는 재판권을 행사하는 법관에 대한 압박 또는 순치 목적으로 활용될 것이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블랙리스트 또는 판사 뒷조사 파일 의혹을 포함하여 이번에 제기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명백히 규명되지 않으면 또 다른 8년 뒤 우리 사법부는 2009년도와 지금 겪고 있는 것과 같은 혼란을 되풀이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미 두 번의 학습효과에 무디어진 법적 양심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사법행정을 관료적 효율성이라는 방향으로 몰고 갈 것입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서도 다수 법관들의 목소리는 천금과 같은 무게를 지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80%가 넘는 찬성으로 통과된 전국법관대표회의의 결의조차 가벼이 여겨지고 있음에 통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사법행정에 대한 신뢰는 법원의 독립, 법관의 독립을 위하여 그 어떤 가치나 이익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 조건입니다. 현재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무너진 신뢰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서는 그 의혹이 말끔히 해소되어야만 합니다.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의 제도개선은 한낱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해소되지 않은 의혹은 앞으로 법적 양심보다는 개인적 이익을 좇아 사법행정권이나 정권에 순치된 법관들이 늘어날 것이라는 또 다른 의혹의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 역시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저와 현안 조사 소위원회는 이러한 인식 아래 대법원장님의 말씀이 있은 후에도 대법원장님이 전국법관대표회의의 결의 사항을 수용할 수 있도록 면담 요청을 하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코트넷 게시판에 게시한 바와 같이 지난 7월 13일 차장님과의 면담 역시 그 일환이었습니다. 그 때 저희 소위 위원들은 대법원장님과 차장님께 저희들의 의견을 전달하였고, 그 의견에 대한 답변을 요청 드렸지만 아직까지도 아무런 답변이 없습니다.

이에 저는 저에게 마지막 남은 노력을 다하고자 어제 이와 같은 저의 심정을 담아 법원장님께 사직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이는 오로지 저의 충정을 통하여 대법원장님의 입장 변화를 기대하는 한 가닥 희망에서 비롯된 것이지 다른 어떤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부디 이를 통하여 저의 충정과 올해 초 한 젊은 법관이 그 직을 걸고 지키려고 했던 법관의 양심이 대법원장님께 전달되어 현안으로 제기된 여러 가지 의혹이 해소될 수 있는 조치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염원합니다.

2017. 7. 20.

최한돈 올림

<이범준 기자 seirot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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