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천국' 핀란드?.. 젊은 두뇌는 이민 가방 쌉니다

헬싱키/정경화 특파원 입력 2017. 7. 18. 19:21 수정 2017. 7. 19.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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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과학자들은 지금 핀란드의 연구 여건이 재앙(catastrophe)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연구를 계속하기에 희망이 없다는 판단이 들어 떠났지요."

정경화 특파원

핀란드 헬싱키대학에서 생물통계학을 가르쳐 온 유카 코란데르(Jukka Corander) 교수는 지난해 노르웨이 오슬로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핀란드 정부가 고등교육 예산을 삭감하면서 연구 자금 펀딩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슬로대학으로 옮겨온 뒤 여러 항생제에 내성이 강한 수퍼 박테리아를 퇴치하는 연구를 주도해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코란데르 교수는 영국 일간지 더타임스 인터뷰에서 "1970~1980년대 대학에 대한 투자 확대가 핀란드의 첨단 기술·통신 산업 발전을 이끌었다"며 "하지만 이제 핀란드 정부는 투자를 줄임으로써 더 이상 과학 발전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고 말했다.

◇핀란드 떠나는 두뇌들… 5명 중 1명은 '컴백 안 할 것'

최근 핀란드에서는 젊고 우수한 인력이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두뇌 유출(brain drain)'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지난해 핀란드를 떠나 외국으로 이주한 25~34세 인구는 5510명으로 5년 전에 비해 약 25% 늘었다. 핀란드 아카데미 저널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박사급 전문 인력 3124명이 해외로 나갔지만, 같은 기간 핀란드로 유입된 전문가는 1963명에 그쳤다. 2015년에만 박사 학위 소지자 375명이 핀란드를 떠났다. 핀란드 대학연구원 노동조합은 지난 4월 "자연과학, 생명과학, 인문학 분야 최고 전문가들이 자신의 연구팀을 이끌고 그룹 단위로 핀란드를 빠져나가고 있다"고 밝혔다. 연구 인력 외에도 금융 전문가, 컴퓨터 엔지니어 등 여러 전문직 종사자들이 스웨덴·영국·독일 등으로 떠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핀란드 에스푸에 위치한 대학생 창업 활동 공간인 '알토 벤처 거라지(Aalto Venture Garage)'에서 창업을 꿈꾸는 대학생 기술 개발자들이 의견을 나누고 있다. 최근 핀란드에선 정부가 대학 예산을 삭감하고 연구 지원을 줄임에 따라 과학 기술 분야의 젊은 인재들이 해외로 떠나고 있다. /블룸버그

미래에 다시 조국으로 돌아가겠다는 핀란드 이민자도 드물다. 미국 브라운대 연구팀이 외국에 거주하는 20~40세 핀란드인 799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19%만이 '다시 돌아가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로 여기고 있다'고 답했다. 응답자들은 "해외 경험이 핀란드에서 더 나은 직업을 가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연구 예산 삭감이 원인… 이웃 국가는 핀란드 인재 유치전

지금껏 '두뇌 유출'은 가난한 나라의 엘리트 공무원, 의사, 기술자 등 고급 인력이 선진국으로 빠져나가는 현상을 일컬어 왔다. 주로 개발도상국이나 정세가 불안정한 국가의 문제로 여겨졌다. 반면 노르웨이· 스웨덴 등 북유럽 복지 국가들은 높은 삶의 질 덕분에 인재를 자기 나라에 묶어 놓거나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나라로 꼽힌다. 그렇다면 1인당 GDP가 4만3000달러(세계은행·2016년)가 넘는 복지 선진국 핀란드에서 이 같은 두뇌 유출이 벌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직접적인 원인은 핀란드 정부의 고등교육 예산 삭감이 꼽힌다. 지난 2015년 핀란드 정부는 전국 15개 연구 중심 대학과 26개 전문대학(polytechnics)의 연간 기본 운영 예산을 4년에 걸쳐 5억유로(약 6168억원) 삭감하고, 연구 예산도 1억유로(1234억원) 삭감하기로 결정했다. 반면 스웨덴과 노르웨이 등 이웃 북유럽 국가들은 핀란드를 떠나는 고급 인재를 유치하기 위해 인센티브 경쟁을 벌이고 있다.

예산이 줄어든 핀란드 대학들은 인력 구조 조정에 나섰다. 헬싱키대학은 지난해 "2017년 말까지 대학 교직원과 연구원을 1000명 줄이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도 일자리를 찾지 못한 젊은이들은 해외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핀란드 대학들이 올해부터 EU 밖 외국인 유학생에게 등록금을 받기 시작한 것 역시 예산 부족에 따른 자구책이다. 하지만 대학생연합은 "핀란드로 오려던 외국 인재들을 (대학 등록금을 받지 않는) 스웨덴이나 독일 등으로 가게 해 대학의 글로벌 경쟁력을 떨어뜨릴 뿐"이라고 지적한다.

◇복지 비용이 부메랑돼 젊은 세대 유탄 맞아… 국가 시스템 타격

인구 540만 복지 국가 핀란드가 고령화와 실업난으로 복지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게 되자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그 여파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줬다는 분석도 있다. OECD에 따르면 핀란드는 2015년 기준으로 GDP(국내총생산) 대비 공공 지출 비중이 56.1%로 2009년 46.8%보다 9.3%포인트 늘었다. 1940~1950년대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해 연금·의료 등 복지 비용이 계속 상승하는 것이 큰 원인이다. 핀란드의 65세 이상 노인 인구 비율은 20.9%(2016년)로 북유럽 국가 중에서도 고령화 속도가 가장 빠르다.

지난 2015년 들어선 핀란드 우파 연합 정부는 이에 대처하기 위해 연금과 실업급여를 줄이는 등 복지 제도를 개편하고 공공 지출을 줄여 나가고 있다. 그런데 정부가 허리띠를 졸라매는 과정에서 젊은 세대에게도 불똥이 튈 수밖에 없었다. 정부가 대학·연구소 예산뿐 아니라 대학생·대학원생에게 직접 지원하는 주거·생활 보조금마저 대폭 삭감하기로 한 것이다. 청년들은 "청년 실업률이 20%대에서 고공행진을 계속하는 와중에 정부가 우리의 등을 해외로 떠밀고 있다"며 불만이다.

핀란드가 젊고 새로운 인재들을 놓치고 붙잡지 못할 경우 지식 기반 경제의 성장 동력이 꺼지고 결국 복지 제도조차 지탱하기 힘들다는 우려가 높다. 핀란드 출신인 유호 코르호넨 미국 브라운대 박사는 "인구 고령화로 인한 복지 비용 상승 압력과 젊은 두뇌의 유출이 악순환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며 "그로 인해 핀란드의 인적 네트워크, 사회적 신뢰, 협동심 등 사회적 자본이 사라지면 시스템 전체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페트리 코이카라이넨 대학연구원 노조위원장은 "그동안 핀란드가 쌓아온 '최첨단 과학 기술 국가'라는 이미지는 한번 타격을 입으면 돌이키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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