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접한 지하철 詩 계속 봐야해?".. 승객들이 펜 들었다

정상혁 기자 2017. 7. 18.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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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詩' 10년.. 시민 패러디 봇물]
스크린 도어 4840곳에 걸린 詩
문단·시민들, 수준 낮다며 비판.. 기존 작품 비꼬듯 자작시 올려

"공공 기관이 공공 영역에 작품을 내건다는 것은 그걸 사회적·미학적 모범으로 추천하는 것이다. 그건 누가 어떤 기준으로 해도 위험한 일이다… '지하철 시'는 없어져야 한다."

17일 문학평론가 황현산(72)씨는 트위터에서 서울 일대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붙어 있는 이른바 '지하철 시(詩)'를 통렬히 비판했다. "'지하철 시'가 시 읽기의 첫걸음이 된다는 말도 있는데 지하철 시로 시의 형편이 더 나아지지는 않는다. 시를 읽을 사람은 공짜로 읽을 생각 하지 말고 시집을 사서 읽어라."

서울시가 10년째 진행하고 있는 '지하철 시' 게시 공모가 12일 시작되자 다시 문단이 들끓고 있다. 현재 서울 지하철 1~9호선, 분당선 등 299개 역 승강장 스크린 도어 4840칸에 시가 걸려 있는데, 되레 시와 시민을 멀어지게 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2008년 시민들에게 마음의 여유를 건네겠다며 시작된 이 사업은 낮은 작품 수준 탓에 끊임없이 잡음을 야기했고 '시각 공해'라는 힐난까지 듣고 있다. 서울시가 지난해 '스크린 도어 시 운영 개선 계획'을 내놓고 작고한 시인의 작품과 외국 명시까지 게시 대상에 넣었지만 반응은 여전히 차갑다. 김상혁(38) 시인은 17일 트위터에 '지하철 시를 마주할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우선 수치심이다. 사람들이 얼른 대여섯 줄 읽고 이런 걸 시라고 생각하면 어쩌나 생각한다. 더 까놓고 말하면 머리 뜯으며 생각 정리하고, 엉덩이 종기 나게 쓴 시가 모욕당하는 것 같다'고 썼다.

/김성규 기자

장소와 시의 분위기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도 끊임없이 제기돼왔다. 지난해엔 복효근(55) 시인의 '목련꽃 브라자'가 외설 시비를 낳으며 스크린 도어에서 철거됐다. '내 볼까봐 기겁을 해도/ 빨랫줄에 널린 니 브라자 보면/ 내 다 알지'라는 구절이 성희롱에 가깝다고 시비가 붙은 것이다. 원구식(62) 시인이 쓴 〈'맑'스〉의 경우 '칼 막 쓰지 마라…/포도주보다 붉은 혁명의 밤이/촛불처럼 타오른다' 같은 공공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과격한 표현 탓에 민원이 쇄도해 결국 사라졌다.

그러자 "진짜 '지하철 시'를 보여주겠다"는 결기가 트위터상에서 벌어지고 있다. 네티즌들이 자발적으로 '스크린 도어 시'를 해시태그(검색하기 쉽게 단어 앞에 #을 붙이는 방식)로 붙여 수백 건의 짧은 시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고대가요 '구지가'(龜旨歌)를 패러디한 '아재 아재요/ 다리를 오므려라/ 오므리지 않으면 구워먹으리'라거나 '임신부 전용석의/ 저 아저씨/ 몇 개월이세요/ 뱃속에 있는 게/ 아기는 아닌 거 같은데'와 같이 지하철 풍속도를 묘사해낸 작품이다.

가요를 패러디한 재치도 돋보인다. 가수 피노키오의 '사랑과 우정 사이'를 변주한 '사당보단 먼/ 의정부보다는 가까운'이라거나 유리상자의 '사랑해도 될까요'를 비꼰 '문이 열리네요/ 그대가 들어오죠/ 내리면 타야지/ ○○놈아' 같은 일침이다. 네티즌들은 "지금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붙어 있는 시보다 몇 배는 낫다"며 환호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이숭원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는 "진부한 감수성에 의존하는 기존 지하철 시보다 현장에서 발견해낸 기민한 말잔치가 더 시에 부합한다고 평가받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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