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출생신고는 병원이 책임져라?..의료계 반발

홍진수 기자 2017. 7. 16.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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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해 6월 대전의 한 상점에서 거스름돈 계산을 하지 못해 어찌할 줄 모르는 ㄱ양(18)이 수상하다는 신고전화가 경찰에 접수됐다. ‘고등학생 쯤으로 보이는 아이가 아주 간단한 뺄셈도 하지 못하니 아동학대를 받은 것 같았다’는 내용이었다. 출동한 경찰은 ㄱ양이 1999년 태어났지만 출생신고가 돼 있지 않은 사실을 확인했다. 17년간 유령처럼 지내온 ㄱ양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ㄱ양의 어머니(45)는 전 남편과 법적으로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ㄱ양의 아버지(48)를 만나 동거하면서 ㄱ양을 낳았다. 당시 ‘호적법’상으로는 호주 앞으로 출생신고를 해야 하는데, ㄱ양의 어머니는 호주가 전 남편이다 보니 동거남의 아이를 전남편의 호적에 올리지 않고 그냥 출생신고를 포기했다.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녔다면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어야 할 ㄱ양은 간단한 뺄셈조차 하지 못했다. 17년간 어떠한 교육·의료 혜택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7월에는 딸을 낳은 뒤 출생신고를 하지 않고 방임한 30대 엄마가 인천지법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ㄴ씨(31)는 2012년 1월 딸 ㄷ양을 출산한 뒤 출생신고를 하지 않고 수년간 기른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또 딸을 버려둔 채 가출해 밥을 제대로 챙겨주지 않는 등 양육을 소홀히 한 혐의도 받았다. ㄷ양은 출생신고가 돼 있지 않아 기본적인 의료혜택도 받지 못한 채 자랐다. 판사는 “출생신고는 사회구성원으로서 교육, 보건의료, 사회보장 등 공적 서비스와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는 필수적인 절차이자 아동의 권리”라고 전제한 뒤 “피고인은 딸의 출생신고조차 하지 않고 제대로 돌보지도 않아 방임했다”고 지적했다.

출생신고의 책임을 부모뿐 아니라 의료기관에도 부여하는 법안이 최근 발의됐다. 산부인과 병원 등 의료기관이 출산 사실을 직접 행정기관에 통보하면 부모들이 출생신고를 누락하거나 아예 안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사협회는 “효율성이 없는 전형적인 행정편의적인 발상”이라며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하고 있다.

서울 중구 제일병원 신생아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지난달 27일 자유한국당 함진규 의원은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을 발의했다. 의료기관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출생증명서를 관할 시·읍·면의 장에게 보내도록 의무화하는 것이 골자다.

더불어민주당 권미혁 의원도 비슷한 법안을 발의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다만 권 의원은 의료기관의 행정부담 등을 고려해 출생기록을 지방자치단체장이 아니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 보내도록 했다. 심평원은 이 자료를 다른 관련 기관과 공유하면 된다. 어차피 의료기관은 진료비 청구를 위해 심평원에 관련 자료를 보내야 하기 때문에 추가적인 업무부담이 별로 없다. 또 심평원은 행정자치부와 함께 온라인 출생신고 시범사업을 진행하고 있어 기존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다.

현행법 상 출생신고의 책임은 대부분 부모에게 있다. 혼인 중 출생자의 출생신고는 한달 내에 부 또는 모가, 혼인 외 출생자의 출생신고는 모가 해야 한다. 출생신고를 해야 할 사람이 신고할 수 없는 경우에는 동거하는 친족, 분만에 관여한 의사·조산사 또는 그 밖의 사람 순서로 부담이 돌아간다. 정당한 사유 없이 한달 내에 신고를 하지 않더라도 최대 5만원의 과태료가 고작이다. 태어난 아이의 ‘사회적 존재’ 여부는 사실상 부모의 손에 달린 셈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5년 기준으로 전체 신생아의 99.1%는 병원에서 태어났다. 의료기관이 행정기관에 ‘출생통보’를 하면 출생신고의 사각지대를 대부분 없앨 수 있다. 여전히 ‘의료기관 밖’에서 출생하는 아이들의 문제가 남지만,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의원실의 판단이다.

외국에서는 이미 비슷한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가 2015년 6월19일 내놓은 ‘이슈와 논점-출생신고제도 보완을 위한 입법방안’에 따르면 미국의 캘리포니아주와 뉴욕주는 의료기관에 출생사실 등록 책임을 부여하고 있다. 영국은 부모에게 의무를 부여한 ‘출생등록제도’와 병원에 의무를 부여한 ‘출생신고제도’를 병행하고 있고 캐나다도 출생 당시 입회한 의사·조산사 등에게 출생통지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의사협회는 “의료기관에 정부의 책임을 떠넘기는 법안”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의사협회는 ‘가족관계의 등록 등 관련 개정안에 대한 대한의사협회 의견’이란 자료를 통해 “출생신고의 경우 국가가 수행해야 할 업무인데 아무런 비용보전 없이 행정기관의 업무를 의료기관에게 전가하고 있는 행정적 편의주의를 위한 입법안”이라고 비판했다. 또 “의료기관이 관할관청에 출생통지를 하게 될 경우, 미혼모 등과 같이 출생신고를 원치 않는 부모들은 의료기관에서의 출산을 기피하게 되어 산모와 태아 모두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주장했다.

의협 김주현 대변인은 “큰 병원에서는 하루에도 몇십명씩 아이들이 태어날 텐데, 출생통지 과정에서 오류가 사고나 일어난다면 그 모든 책임을 의사가 져야 하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법안 발의를 준비 중인 권미혁 의원실 관계자는 “심평원에서 출산자료를 모아 행정기관에 보내면, 그걸 바탕으로 ‘크로스 체킹’을 해 누락된 것을 쉽게 찾을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 법안의 취지”라며 “심평원과 행정자치부가 이미 온라인 출생신고도 추진하고 있는 만큼 의료기관에 큰 부담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의원실의 또 다른 관계자는 “개인정보 공개를 원하지 않는 부모를 위해 프랑스나 독일의 ‘익명출산제도’를 참고해 볼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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