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의 편집' 사전 편찬자의 어제.. 달라진 오늘

권구성 2017. 7. 15.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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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책의 원조' 사전은 사회 지식의 결집체 / 그 사전 편찬은 고도의 지적 기술 필요한 작업 / 맹활약 장인 5명 이야기엔 사전 역사 오롯이 / 검색에 밀려 사라지는 사전·편찬자 위한 헌사
정철 지음/사계절/1만6000원
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정철 지음/사계절/1만6000원

‘벽돌 책의 원조’, ‘궁극의 편집’, ‘압축과 정제의 세계’….

사전은 단순히 단어와 어구를 수집한 책이 아니다. 사전을 수식하는 말들에서 알 수 있듯이 사전은 사회 지식의 결집체이다. 중국의 언어학자인 황젠화는 사전을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말했다. 사전 하나로 사회 전반의 모습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디드로의 ‘백과전서’는 18세기 유럽을 계몽시키고, 프랑스 혁명의 싹을 틔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강희자전’은 중국 문화의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전을 만드는 일은 고도의 지적 기술을 요한다. 사전 만들기는 편집이라는 말로 부족해 ‘편찬’(編纂)이라는 단어를 쓰는 유일한 작업이기도 하다. 

1991년 10월 간행된 ‘우리말큰사전’은 편찬기간만 약 25년이 걸렸다. 사진은 표제어 카드(위쪽)와 ‘서울’ 항목.
사계절 제공
그러나 사전을 편찬한 사람들의 이름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사전을 한참 뒤져야 어딘가에 작게 쓰여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사전 편찬자들은 공론의 영역에서 조명받은 일이 거의 없다.

신간 ‘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은 사전편찬 현장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포털사이트 다음의 어학사전 기획자인 정철은 한국어사전과 백과사전, 외국어 사전을 편찬했던 사전 편찬자 5명을 직접 만났다. 그들의 이야기에는 고스란히 우리 사전의 역사가 담겨있다.

‘겨레말큰사전’은 남북한 학자들이 공동으로 집필한 최초의 우리말 대사전이다. 통일을 대비해 남북의 언어 이질화를 극복하기 위해 2005년 2월20일 겨레말큰사전편찬위원회가 결성됐다. 이 작업에 참여했던 조재우 겨레말큰사전 남측편찬위원장은 우리나라 사전편찬 역사의 산증인이다. 20여년간 한글학회의 ‘우리말큰사전’ 작업에 참여했던 그는 사전 하나를 만드는 데 “20년이라는 시간도 부족하다”고 말한다. 조 위원장은 “그림형제의 ‘독일어사전’도 100여년 만에 나왔다”면서 “대사전을 만들면서 10년, 20년짜리만 생각하면, 그동안 나왔던 만큼밖에 안 된다”고 지적한다.

조 위원장은 ‘겨레말큰사전’을 만들면서 어려운 과제 중 하나로 ‘두음법칙’을 꼽는다. 그는 “두음법칙과 사이시옷 문제는 어느 한쪽으로 가면 어려워진다”며 “두 가지를 함께 표현해야 하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가령 ‘여성노동자’와 ‘녀성노동자’는 같은 어휘지만, 어감이 크게 달라 한쪽으로 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게다가 종이사전의 경우 두음법칙에 따라 어휘의 배열 순서가 크게 달라지기도 한다.

그는 어학사전 편찬의 기초 지식과 한글 맞춤법·표준어가 정착한 역사, 시기별 대표 사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원작 제목이 ‘모밀꽃 필 무렵’이었다는 사실을 전하며, 우리 사전이 단어 하나에 담긴 역사적, 문학적 발자취를 온전히 담지 못했고 표준어를 중심으로 뜻풀이를 해주는 수준에 그쳤다는 아쉬움을 전한다.

저자가 사전계의 스승들과 주고받는 대화 속에는 우리 사전계의 현실이 드러난다. 포털이 서비스하는 영한사전의 경우 현재 네이버에서는 ‘옥스퍼드 학습자 영어 사전’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고, 다음에서는 일본 사전의 영향을 받은 금성출판사의 그랜드 영한사전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일사전 번역에서 영영사전 번역으로 바뀌었을 뿐 우리의 언어에 맞는 영어사전을 개발하지 못한 현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국립국어원이 1999년 ‘표준’을 내세운 ‘표준국어대사전’을 발간하면서, 그동안 개발됐던 여러 민간 국어사전들이 ‘비표준’이 돼버렸다. 그 결과 현재는 고려대와 연세대가 만든 한국어 사전만이 남은 상태다. 사전 출판사들이 어학사전 하나를 만들기 위해 15억∼20억원을 투자했지만, 포털사이트는 어학사전의 내용을 갱신하는 데는 거의 투자하지 않는다. 저자는 “사전편찬에 관한 경험과 기억이 이미 많이 지워졌고 지금 이 순간에도 사라져 가고 있다”면서 “사전도, 사전 편찬자도 어느새 보호해야 할 대상이 됐다는 것을 기억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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