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국민의당, 추미애 없었으면 어쩔 뻔 했나

강청완 기자 2017. 7. 10.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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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 협치' 현수막 철거를 바라보면서


한바탕 비가 내리고 난 일요일(9일) 오후, 한적한 여의도 대로변에 유독 한 곳만이 분주했다. 국회 맞은편에 있는 국민의당 당사에서 외벽에 걸린 대형 현수막을 떼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대형 크레인에 올라탄 작업자들의 분주한 손질 끝에, ‘국정은 협치, 국민의당은 혁신!’이라고 쓰인 초록색 현수막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다른 쪽 벽에 걸려있던 ‘국민 속에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라고 쓰인 현수막도 곧이어 같은 운명을 맞았다.

▶ "與 대표가 검찰총장" 국민의당 반발…민주당도 맞불 작전

국민의당 대선 패배 직후 내걸린 현수막이 두 달도 채 안 돼 철거된 건 최근 정국과 무관하지 않다. 지난주 목요일 추미애 대표의 이른바 '머리 자르기' 발언이 결정적이었다. 희대의 '대선 제보 조작 사건' 이라는, 창당 이래 최대 악재를 맞은 국민의당은 지도부를 또 한 번 질타하는 여당 대표의 ‘몸 쪽 꽉 찬 돌직구’에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애초 추가경정예산안과 정부조직법 심사에 협조하기로 했던 국민의당이었지만, 추 대표의 사퇴와 사과 없이는 국회 일정을 전면 거부하겠다고 초강수를 뒀다. 이 ‘협치 종료’ 선언과 함께 협치가 쓰인 현수막도 떼어내기로 한 것이다. 

국민의당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을지 모른다. 야당으로서 협조할 건 협조하겠다며 추경과 정부조직법 심사, 착수하기로 했었다. 거슬러 올라가선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 인준에도 협조했다. 비록 검찰 조사가 임박해서야 발표하긴 했지만 부정 사실을 미리 공개하고 당 자체 진상조사도 실시했다. 그런데 집권여당 대표가 ‘머리자르기’ 라며 정면 비판을 해왔으니 맞불을 놓은 셈이다.

다만 이번 사태를 둘러싼 국민의당 지도부의 일련의 언행과 조치, 그리고 이를 통해 드러나는 인식을 보고 있노라면 몇 가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중 하나가, "추미애 대표의 '머리자르기' 발언이 아니었다면 국민의당은 어떻게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다.

● 추미애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국민의당 이준서 전 최고위원

9일 오전 이준서 국민의당 전 최고위원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되자 국민의당도 긴급회의를 열어 입장을 냈다. "검찰이 청구한 영장 내용으로 보더라도 제보 조작 사건이 이유미 씨 단독 범행으로 확인됐고 이준서의 사전 공모나 조작 지시가 없었음이 더욱 명백해졌"지만, "미필적 고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청구한 것은 검찰의 자의적 판단에 의한 과잉 충성 수사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특히 추미애 대표가 미필적 고의 운운하며 검찰을 압박한 것이 구속영장 청구에 직접적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애초에 국민의당이 가장 우려했던 부분은 검찰 수사에서 혹시라도 당 자체 진상조사 결과와 다른, 윗선의 개입 여부가 드러날까 하는 지점이었다. 물론 수사가 확대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현재까지 검찰 조사 결과는 대체로 국민의당 자체 조사 결과와 대체로 일치한다. 이 전 최고위원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된 것을 제외하고는 국민의당 입장에선 크게 나쁠 게 없는 내용이다.

그러나 국민의당은 검찰과 추미애 대표를 싸잡아 비판하는 쪽을 택했다. 이 전 최고위원 등에 대한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사법부에 메시지를 보낼 필요성도 고려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여당 대표가 검찰총장 역할을 수행했다"(이언주 국민의당 원내수석부대표)는 표현처럼, 추 대표의 발언이 영장 청구에 직접적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공감할지는 의문이다. 그보다 이 대목에서 돋보이는 건 추 대표의 발언을 계기로 이번 일을 어떻게든 정치 쟁점으로 만들어 끌고 가겠다는 국민의당의 ‘굳은 의지’다.

실제 국민의당이 추미애 대표의 발언을 정국 돌파용으로 활용한다는 분석이 나온 지는 꽤 됐다. 지지율은 날로 떨어지고 마땅한 카드는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추 대표가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줬다'는 식이다. 이른바 ‘막말 정국’으로 전환하면서,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역에서 탈당설이 심상찮게 나도는 상황에서 당내 결속력 강화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다만 스스로 잘못을 인정한 당 자체 진상조사 결과가 나온 지 채 일주일도 안 돼 이른바 '피해자 코스프레'로 돌아선 건 지나치게 성급한 태세 전환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정부여당에 맞선 소수 야당' 프레임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여야 간에도 체면과 예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 진상 조사 결과를 발표할 만큼 사건의 윤곽이 대체로 드러나 있는 상황에서 마치 정권과 검찰의 음모 속에 희생된 사법 피해자처럼 구는 것은 다소 섣부른 느낌이다.

여전히 중요한 것은 사건의 본질이다. 지나치게 허술했던 탓에 당락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지만, 대선 직전 가짜 제보를 조작하고 충분한 검증 없이 세간에 발표한 것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부정하는 범죄일 수밖에 없다. 단독 범행 여부를 떠나, 철저히 가짜 증거만을 가지고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나아가 정치적 의도까지 관철시키려 했던 건 대가를 치러야 마땅한 행위다. 누가 했더라도 마찬가지다. 그 과정조차, 너무나 조악했다.

심지어 국민의당 스스로 자체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한 지 겨우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책임 있는 이들의 진정성 있는 사과나 국민이 납득할 만한 설명은 없었다. 당시 후보였던 안철수 전 대표는 진상조사단을 통한 유감 표명이라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간접 사과의 형식을 취했을 뿐이다. 정당으로서 어떻게든 정치적 해법을 찾으려는 시도를 할 수는 있지만, 그건 차후의 일이다.

국민의당 제보 조작 사건이 이유미 씨의 단독 범행이라는 자체 발표에 응답자 중 71.7%가 ‘공감하지 않으며 당의 조직적 개입이 있었을 것’ 이라고 답했다는 한 여론조사 결과는 의미심장하다. 실체적 진실이 어떻든 간에 이번 일을 정국 돌파의 계기로 삼기에는 아직 섣부르고 사건이 너무 중하다는 뜻이다.

정치판이 대개 그렇다지만, 추 대표의 말 하나에 당의 운명을 건 듯 결사항전하는 모양새가 39석의 의석을 가진 공당으로서 과연 적절한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추 대표의 발언을 두둔하고자 함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국민의당은 사건 이후 (사실상 가능성이 없는) ‘추 대표 사퇴’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카드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막말 정국으로 전환을 시도한다느니, 추미애 대표가 울고 싶은 아이 (국민의당) 뺨을 때려줬느니 하는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거다. 도대체 추미애 대표의 발언이 없었으면, 국민의당은 어쩔 뻔했나.

● 떼어낸 것은 협치인가, 혁신인가

지난해 국민의당이 창당하면서 내건 깃발은 중도개혁이라는 '제3의 길'이었다. 양당 기득권 체제에 환멸을 느낀 많은 국민이 표를 몰아줬고 그 결과 38석의 의석을 확보했다. 4.13 총선 이후 지지율은 한때 25%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지금의 국민의당을 두고 '새 정치'와 '혁신'을 말하는 이는 많지 않다. 김수민 공천 의혹 사건 등 창당 이후 일련의 악재와 대선 패배 등을 제외하고서라도, 정책적으로 보여준 게 딱히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창당 이후 얼마간 번뜩였던 '신선함'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 사이 지지율은 창당 1년 반 만에 역대 최저인 3.8%까지 곤두박질쳤다. 혹자는 지금의 국민의당에 처음과 같은 영광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더 우려되는 건 국민의당 내부에 지지율은 크게 신경 쓰지 않겠다는 기류마저 감지된다는 점이다. 기자가 한 국민의당 고위 관계자를 직접 만난 자리에서도 직접 이같은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자기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없어서 여론 조사를 믿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비단 이 뿐만이 아니라 심심찮게 비슷한 의견이 들려온다. 여론조사가 언제나 100% 맞다고 할 수는 없지만 중앙선관위 여론조사심의위원회 등 공공기관이 마련한 기준에 따라 진행된 일정 수준 이상의 여론조사조차 부정한다는 것은 공당으로서의 자질 문제다. 이미 지난 대선 때도 박주선 당시 선대본부장의 ‘짐승 발언’으로 홍역을 치렀던 국민의당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었던 대가는 그때도 한번 치렀다. 

요즘 국민의당의 주된 기조는 새 정치에 대한 비전이나 제3 정당으로서의 ‘운용의 묘’라기보다는 정부여당에 대한 적개심과 피해 의식에 가까워 보인다. 흘러내리는 현수막 속에서 ‘협치’라는 글자보다 ‘혁신’, 그리고 ‘국민 속에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라는 문구가 눈에 먼저 들어온 건 그래서였을까.  
     

강청완 기자blu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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