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상처엔 시간 필요 梨花를 믿습니다"

송혜진 기자 2017. 7. 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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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진 기자의 느낌] 131년 만에 직선제로 뽑힌 이화여대 김혜숙 총장
총장 선거 학생 득표율은 95%.. 1년 전 상상도 못했던 '이화 사태'
당시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버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된 기분
학생·직원·선생님 모두 그 시기 겪으며 상처 받아 온전히 치유하는 데 시간 필요
이화여대 학생들 사이에서 김혜숙 총장의 별명은 ‘혜숙마마’다. 무심한 듯 따뜻하게 학생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챙겨줬던 교수로 이름났기 때문이다. 5일 이화여대 ECC 광장 한가운데 선 김 총장은 “앞으로는 사람보다는 시스템을 믿어야 한다”고 했다. “인적 요소가 많은 조직은 늘 문제가 생긴다. 더 많은 목소리를 널리 듣고 최선의 안을 취합해서 내놓는 시스템만 정착된다면, 최순실이 아니라 누가 와도 그 조직은 흔들리지 않을 거다.”

/이태경 기자">꼭 1년 전 이화여대 캠퍼스는 피투성이였다. 대학 본관에 21개 중대 경찰 1600여 명이 투입돼 건물을 점거하고 농성 중이었던 학생 200여 명을 끌어낸 것이 작년 7월 30일이다. 일정 학점을 이수하면 고졸 여성이나 직장인에게도 학위를 준다는 평생교육 단과대학(미래라이프대학) 설립에 반대하는 농성이었다. 학생들은 '총장이 곧 온다'는 학생처의 문자메시지를 받고 당시 최경희 전 총장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총장 대신 경찰이 왔고, 분노는 파도가 됐다. 재학생뿐 아니라 졸업생, 교수들도 농성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사건은 눈덩이처럼 걷잡을 수 없이 굴러갔다.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입학 특혜 비리까지 연결됐다. 그해 10월 19일 최경희 전 총장은 사임했다. 그는 지난달 23일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새살을 돋게 하는 것은 늘 시간이다. 지난 5월 이화여대는 131년 만에 첫 직선제 총장을 맞았다. 철학과 교수 김혜숙(63) 총장이다. 교수·교직원·재학생과 졸업한 동문까지 투표해서 뽑은 총장이다. 총득표율 57.3%, 그중 학생 득표율은 95.4%였다. 3일 김혜숙 총장을 만나려고 찾은 이화여대 본관엔 초록이 만발했다. 상흔(傷痕)도 그만큼 희미해졌을까. 김 총장은 화장기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상처라는 게 쉽게 나을 순 없죠. 시간과 노력이 더 필요할 겁니다."

세상을 바꿨던 그 투쟁

―그 상처는 어떤 모양입니까.

"아주 커다랗고 깊은 우리 안의 생채기, 그러니까 일종의 집단 트라우마겠죠. 최순실 국정 농단의 시기를 겪은 우리 모두가 사실 그랬겠지만, 이화여대 사태도 비슷합니다. 학생, 직원, 선생님 모두가 그 시기를 겪으면서 각자 쉽게 아물지 않는 상처의 기억을 여전히 안고 있어요. 모두가 같은 시각, 같은 관점으로 그 사건을 바라볼 수는 없거든요. 때론 그 안에서 대립했고 때론 서로 비난했죠. 86일 동안 농성했던 학생들은 그들대로 몸과 마음이 망가졌고요, 그때 농성에 참가하지 못했던 학생들은 또 그들대로 죄책감을 안고 있어요. '너 거기 있었던 애라며?' 같은 무심코 던진 질문이 아이들에겐 또 상처가 되죠. 지금이야 다들 '그때 그 학생들이 큰일을 해냈다'고 박수치지만, 그 당시 학생들은 범법자였고 학교에선 색출하려고 했죠. 서로 자신의 얼굴이 드러날까 겁냈고 벌 받을 거라는 협박도 받았고요. 그 기억을 온전히 치유하는 데는 시간이 꽤 필요할 겁니다."

김 총장은 작년 8월 3일 당시 이화여대 교수협의회 회장으로 첫 성명을 발표하던 날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이후 학생들과 숱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동료 교수들과 토론 끝에 성명서를 작성했다. 학교 측이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하고 있고 학생들을 부당하게 대하고 있다고 느꼈지만, 애초 최경희 전 총장의 사퇴를 주장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학생들에게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계획을 철회했는데 왜 농성을 그만두지 않는 거냐"고 묻기도 했다. 학생들은 뜻밖에도 단호했다. "학생을 경찰에 넘기는 총장, 학위로 장사하고 싶어 하는 대학과 타협하고 싶지 않다." 일부 동료 교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교수 시위를 따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총장은 "72학번으로 긴급조치 시절 운동권 학생이었던 내게도 이들의 고집은 솔직히 처음엔 당혹스러운 것이었다"고 했다.

―이념에 무관심한 세대, 등록금 시위 외에는 사실 자기 목소리를 크게 내본 적 없는 세대 아닙니까.

"맞아요. 그래서 더 놀라웠다고 해야 하나요. 이번 사건이 이들에겐 정의를 위해 싸워서 이긴 그야말로 첫 경험이라고 해요. 그래서 다행이기도 하고 책임감도 커요. 그런데 이 아이들에게는 제가 감히 흉내낼 수 없는 나이브한 힘이 있었어요. 순진무구의 힘 말이죠. 마르크스나 뒤르켐 같은 사회과학자 이름을 들먹이는 대신 그저 교실에서 배운 원칙을 정직하게 주장하는 힘요. '민주주의는 이런 것 아니냐' '대학은 이런 곳 아니냐'라고 묻는 거죠. 그래서 더 타협하질 않는 거예요. 한 달이 넘고 방학이 끝나도 이제 타협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에 얘들은 그저 '우리는 주고받을 게 없다'는 거예요. 이 농성을 통해 얻을 이익도 없으니 학교에 뭔가 줄 것도 없다는 거예요. 그저 '사과하라', '사퇴하라', '가치를 수호하라'만 요구하더라고요. 그 앞에서 오히려 제가 할 말을 잃었죠."

당시 이화여대 학생들은 시위 현장에서 민중가요나 노동가 대신 소녀시대 노래를 불렀다. 졸업생들은 이들의 시위를 응원하기 위해 돈을 걷었다. 순식간에 1억원이 모였다. 몇몇 졸업생들은 퇴근길 이런 팻말을 붙였다. '너희들 배후에는 언니가 있다!' "돈도 실력이다"라고 일갈했던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말을 비튼 것이었다. 학생들의 시위는 결국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로 연결되면서, 최순실이 사익을 채우기 위해 한 나라와 교육기관을 어떻게 쥐고 흔들었는지 그 속그림자를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

지난 5월 ‘이화인과의 대화 한마당’ 무대에 선 김 총장. 그는 “이화 심리상담센터, 특별상담소 등을 풀타임으로 운영해 학생들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일에 적극 나서겠다”고 했다.

/장련성 객원기자">

―사태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죠.

"정말이지 굉장히 이상한 경험이었어요. 내가 의도하지도 않았고 노를 젓지도 않았는데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여기까지 온 거예요. 파도에 휩쓸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돼 버린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마 박근혜 대통령조차 1년 전 지금의 상황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겠죠. 그걸 생각하면 역사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돼요.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 그런 하루하루를 그저 살지만, 그 시간이 역사가 된다는 걸 생각하면 소름이 돋아요. 전쟁을 겪은 우리 부모 세대의 경험이 어쩌면 이와 비슷했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결국 최경희 전 총장부터 김경숙 전 학장, 남궁곤 전 입학처장까지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류철균 전 교수와 이인성 교수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요.

대답하기 전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사회의 욕망 게임, 그 부박한 문화에 대학마저 줏대 없이 휩쓸리면서 여기까지 왔지 않나 싶어요. 가령 인문학 교수가 1년에 10편씩 논문 쓴다고 하면 다들 박수를 쳐요. 사실 그건 말이 안 되는 일이거든요. '뭔가 이상하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박수 치는 거예요. 류철균 선생님 같은 분까지 연구비 많이 따와야 하고 뭔가 새로운 작업을 많이 보여줘야 하고, 그래야 유능한 교수처럼 보여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겠죠. 다들 뭔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거나 지식의 어떤 새 영역을 열었는가 같은 질적 재단을 하긴 어려우니 논문 편수 같은 물량적인 성과를 따지는 데만 우르르 몰리는 거고요. 교수 사회가 그렇게 천박해진 겁니다. 결국 우리가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건 사업 더 벌이고 돈 더 따내는 게 아니라, 자존심을 회복하는 일일 거예요.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요. 그게 어쩌면 가장 급한 과제일 거예요."

포장하지 말고, 돌려 말하지 말고

김혜숙은 1954년생 말띠다. 72학번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이지만 대학원에서는 철학을 전공했다. 입학했을 당시 이화여대 앞은 온통 판자촌이었다. 학교를 나와 이화교를 건너면 길 양옆으로 양장점이 길게 줄을 섰고, 이화교 밑으로는 옷 공장들이 바글바글 붙어 있었다. 등굣길 김혜숙은 그곳 공장 안에 땀띠 나도록 붙어 앉아 미싱을 돌리고 바느질을 하는 소녀들을 보면서 심한 자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영문과 수업에서는 외국 극작가 이야기만 했다. 김혜숙은 “‘문학은 내 갈 길이 아닌가 보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대학교 2학년 때 ‘새얼’이라는 사회과학 서클에 들어갔다. 선배들과 세미나를 하고 토론했고, 종종 중랑천 판자촌 같은 곳으로 도시 빈민 봉사활동을 다녔다. 그 무렵 연세대 영문과에 다니는 동갑내기 친구 김용걸을 만났다. 숱한 운동권 남성들이 입으로는 사회 정의를 떠들면서 정작 여자 앞에선 권위주의적으로 행동했던 것과 달리 그는 김혜숙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존중해줬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와 결혼했고, 함께 미국 시카고로 유학을 떠났다. 김혜숙은 그곳에서 아들을 낳고 키우며 7년 만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7년 한국에 돌아와선 철학과 강사로 일하다 곧 조교수로 임용됐다.

―총장 취임하면서 내놓은 공약 중 하나가 대학원생 연구자들을 위한 주말 탁아, 밤샘 탁아 제공이었죠. 아이 키우면서 논문 쓰던 본인의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까.

“맞아요. 저는 그래도 애가 다행히 하나여서 강의가 6시쯤 끝나면 어디든지 데리고 다녔어요. 회의니 세미나니 데리고 다니면서 스케치북하고 크레파스 하나 주고 ‘너 좀 앉아있어’ 하는 식이었죠(웃음). 그래도 정 방법이 없는 날이면 집 근처에 살던,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아이를 데리고 갔어요. ‘죄송하지만 우리 애 밥 좀 먹여달라’고요. 그런데 나중에 물어보니 우리 애는 그게 그렇게 싫었대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죠. 한창 공부하는 대학원생들, 일주일이고 주말이고 붙들고 페이퍼 써야 하는데, 그때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생산성이 떨어져서 안 되거든요. 지금 우리나라 탁아 모델은 너무 단조로워서 진짜 일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안 돼요. 주말 탁아, 밤샘 탁아, 일주일 집중 탁아…. 이런 게 다 필요하죠. 이런 것들을 파일럿 프로젝트처럼 잘 개발해서 국가에 모델로 제시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김 총장은 교수가 되어서도 운동권 기질을 버리지 못했다. 1994년 그는 당시 기업들이 ‘여성 용모 단정’ 기준을 채용 조건으로 제시한 것을 두고 ‘명백한 남녀 차별이자 인간 가치에 대한 모독’이라는 의견을 발표했고, 1995년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 때는 이화여대 조순경·이상화·장필화·이재경 교수와 함께 ‘상대방이 거부하는 성적 언어와 행동을 일방적으로 퍼붓는 것은 곧 성희롱’이라는 의견서를 서울고등법원 재판부에 내기도 했다. 1997년에는 이화여대 앞 거리가 유흥가로 변해가는 것을 반대하며 ‘교육환경을 걱정하는 교수 모임’을 결성하고 시위도 했다.

1979년 이화여대 대학원 철학과 졸업 당시 김혜숙.

/김혜숙 제공">―자기 일도 아닌 일에 목소리를 낸다는 게 사실 피곤한 일 아닙니까.

“피곤하죠(웃음). 대학교 때 서클 활동을 안 했다면 아마 교수협의회도 안 만들었겠죠. 그런데 저는 성격이 좀 그래요.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고 맞으면 맞는다고 말하면 되지, 왜 고민할까.’ 매사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에요. 남들은 그래서 때론 눈치 없다고 하고, 누군가는 잘난 척한다고 싫어도 했겠죠. 처음 교수 임용되고 전체 교수회의라는 걸 했었어요. 그때 정의숙 선생님이 총장이셨는데, 당시 학생들이 뭔가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안 만나겠다고 하더라고요. 거기에 대해 누구도 의견을 내지 않고 조용했고요. 저는 근데 아무 것도 몰라서(웃음), 손 들고 물었죠. ‘왜 학생들을 안 만나시느냐’고요. 회의 끝나고 나오는데 다들 제게 ‘정말 황당한 행동을 했다’는 거죠. 정 선생님은 정작 제 말을 듣고 나중에 학생들과 만나서 대화를 하셨어요(웃음). 상업화 반대 운동도 그래요. 저는 그냥 학교 앞에서 귀고리 파는 리어카 같은 것이 잔뜩 늘어서 있고, 우리 아이들이 거기 붙어서 구경하는 걸 보는 게 그렇게 싫었어요. 미국 유학 가서 보니 거기 도서관은 1시까지 불이 안 꺼지고, 과학도서관은 24시간 하더라고요. 나는 여기서 운동권 애들하고 소주에 동태찌개 먹으면서 ‘미국놈들이 어떻고 반미가 어떻고’ 했는데, 미국 애들은 그동안 이렇게 공부했더란 말이죠. 그거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어요. 그런데 우리 학교 학생들은 귀고리나 보고 있으면 안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시위했던 거예요(웃음). 늘 이게 아니다 싶으면 말은 해야 하는 성격이어서….”

―총장 한 달 하셨죠. 눈앞에 닥친 제일 큰 걱정은 무엇이던가요.

“프라임 사업(산업연계교육활성화사업·박근혜 정부 시절 인문 계열과 이과 계열 교육의 동반 혁신을 꾀한다는 취지로 기획하고 일부 대학에 관련 학과 신설을 허용했다)요. 미래라이프대학은 설립을 취소했지만, 아직 특혜 의혹 눈총까지 받아가며 따놓은 프라임 사업은 정리가 다 안 됐어요. 정말 진퇴양난이에요. 해법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학교의 제도와 사업,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는 게 사실 알고 보면 이름만 번듯할 뿐 그 내용은 엉망인 경우가 많아요. 가령 지금도 외국인 교원이나 외국인 학생을 위한 규정조차 영어로 되어 있질 않아요. 그들은 자기가 어떤 법적 지위로 여기 와 있는지 읽어 볼 수도 없는 거죠. 이렇게 포장과 내실이 다른 경우가 있죠 .”

여대는 소멸을 향해 달린다

지난달 김 총장은 학부생과 대학원생을 위한 마지막 철학 강의를 마쳤다. 지난 5월 25일 총장에 취임하고 나서도 강의는 계속했다. 김 총장은 “평생 책 읽는 것을 참 좋아했고 거의 매일 책을 읽고 살았는데 정작 총장 취임하고 지난 한 달 동안은 정말 책을 한 권도 못 읽었다. 결재서류만 보고 살았다. 지난 주말 그 생각을 하니 몹시 우울했다. ‘어쩌다가 내가 이런 삶을 살게 됐지’ 하는 생각도 솔직히 들더라”고 했다.

―앞으로 3년 반을 계속 달리셔야 할 텐데요.

“아뇨, 달리진 않을 거예요(웃음). 우리 사회도 대학도 그동안 너무 달렸어요. 너무 돈, 결과, 성과…. 그러다가 이 모양 이 꼴 됐죠(웃음). 제가 총장 하는 동안에는 쓸데없이 일 안 벌이고 이미 엎질러진 물 잘 치우고 흙칠 묻은 학교 이름 다시 닦아놓고 우리 모두의 자존심을 세우고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 그러고 나오는 게 목표예요. 3년 반 안에 이루기엔 사실 큰 목표이긴 하지만요(웃음).”

―그래서 인권센터도 만들겠다고 하신 건가요.

“아, 그건 우리 학교 학생들이 너무 심하게 자주 여성 혐오 범죄 타깃이 되잖아요. 마치 일본 사람들이 대지진 때 조선인을 희생양 삼았던 것처럼, 세상이 각박해지고 사는 게 힘들어지니까 그 힘든 문제를 여자에게서 찾는 것 같아요. ‘내 인생이 안 되는 게 쟤네들 탓’이라고 느끼는 거죠. 그래서 혐오하고 괴롭히고 공격하는데, 그 때문에 상처받고 찢긴 아이들이 너무 많아요. 학교가 학생들을 위해 함께 법적 대응을 해주려고 해요. 적극적으로 방어해주는 거죠.”

―이화여대가 욕을 많이 먹는 면이 있죠.

“이대에 이중적인 이미지가 있었으니까요. 중산층 기득권 여성을 길러내는 학교라는 이미지와 그 반대편에서 노동운동 하고 NGO를 조직하는 여성들을 배출해온 학교라는 이미지. 그 사이에서 욕도 많이 먹었고요. 너희가 평등에 얼마나 기여했느냐는 비판도 들었고, 결국 남성의 권력을 나눠 먹고 싶어 하는 여자들의 학교라는 얘기도 많았죠. 이젠 그 모든 것을 넘어서서 광야로 나아가는 소명이 생겼겠죠.”

―그럼 그 광야는 어디일까요.

“다 태우고 사라지는 곳(웃음)? 이화여대는 사실 굉장히 역설적인 학교예요. 자기 소멸을 위해 달려가야 하는 대학이거든요. 이화여대가 자기 목적을 달성한 그 순간엔 여자대학이 있을 필요 없는 그런 세상이 되는 거니까요. 그러니 여자들이 진짜 성과를 낼 때까지 몸을 태워서 달려가야 해요. 의학·공업·농업 같은 곳까지 여성들이 획기적인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인재를 계속 키워내야 하고요. 중동, 동남아시아 여성들이 제대로 목소리를 낼 때까지 우리 학교가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여성들도 자신이 어떤 힘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아직 다 몰라요. 그 힘을 스스로 알 수 있고 깨칠 수 있을 때, 여대는 아마도 사라져야겠죠. 그 역할을 못하고 또 다른 고려대, 또 다른 연세대가 되려고 하면 망하는 거죠.”

―만약 또 최순실 같은 사람이 들어와 학교를 휘젓는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김 총장의 눈이 잠시 가늘어졌다. “글쎄요. 가능하다면….” 김 총장은 이번에도 직구(直球)를 툭 던지듯 대답했다. “애초 그런 마음이 들지 않도록 학교를 운영해야겠죠. 이쑤시개 하나 들어갈 틈이 없어 보여서 그만두고 돌아서도록(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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