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 제보자 "지금 PD수첩에 제보하라면? 그냥 죽죠"

김도연 기자 2017. 7. 3.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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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제보자 K’ 류영준 강원대 교수 “TV 속 최승호 눈 뚫어져라 봤다”… “MBC 언론인 탄압 피해는 국민들이 입어”

[미디어오늘 김도연 기자]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2005년 5월31일 밤 11시. 응급실 환자들을 보고 당직실에 축 늘어져 작은 텔레비전을 봤어요. MBC ‘PD수첩’ 15주년 특집 프로그램이 나오더라고요. 그들이 걸어온 길을 총 정리해 방영하고 있었죠. ‘아, 저 사람들도 나처럼 고생하는구나’ 싶었죠. 그런데 최승호 선생(전 MBC PD수첩 PD·현 뉴스타파 앵커)이 클로징 멘트를 했어요. ‘우리가 능력이 없어서 방송을 못 내보낸 적은 있어도 외압으로 못한 적은 없다’고. 의자를 쭉 TV 앞으로 끌어와 화면 속 최승호 눈을 뚫어져라 봤어요.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확인하려고요. 빈말이 아닌 것 같았어요.”

제보자 K, 류영준. 33세의 원자력병원 레지던트 1년차.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이하 황우석) 연구실에서 일을 한 그는 15주년 방송 이후 PD수첩 제보란에 글을 남긴다. “국제적인 망신이 될 수 있고 제보하는 저도 피해를 볼 수 있는 상황이지만, 부정한 방법으로 쌓은 명성은 한 줌 바람에 날아가고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는 신념 하나로 이렇게 편지를 띄우니 부디 저버리지 마시고 연락 부탁합니다.”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의 시작이었다.

▲ 2013년 자신이 ‘제보자 K’였음을 밝힌 류영준 강원대 의대 병리학과 교수(45)는 지난달 28일 서울 잠실역 인근에서 미디어오늘과 만나 12년 전 ‘황우석과 언론’에 대해 증언했다. 사진=김도연 기자
MBC PD수첩이 밝혀낸 ‘희대의 사기극’은 제보자와 저널리스트의 고독한 싸움이었다. 2013년 자신이 ‘제보자 K’였음을 밝힌 류영준 강원대 의대 병리학과 교수(45)는 지난달 28일 서울 잠실역 인근에서 미디어오늘과 만나 12년 전 ‘황우석과 언론’에 대해 증언했다. 미디어오늘이 기획 보도하고 있는 ‘프레임 전쟁-황우석 편’(“황우석의·황우석에 의한·황우석을 위한 그 이름, 언론”) 보도가 있은 직후였다. 못 다한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것.
류영준은 2002년 3월 황우석 실험실에서 석사 과정을 시작했다. 기초 의학 연구를 통해 환자 치료에 사용할 줄기세포를 만들 수 있다는 꿈이 있었다. 그러나 복제소 ‘영롱이’와 ‘진이’ 논문이 부존재하거나 연구원 난자를 실험에 사용하는 등 허구와 비윤리로 점철된 황우석의 실체를 깨닫고 그의 실험실을 떠나 2005년 3월부터 원자력병원 레지던트로 일을 하게 됐다. 언론 제보를 결심한 건 ‘10살 소년’ 때문이었다. 2005년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논문이 발표되기 한 달 전 지인으로부터 황우석 팀이 복제 줄기세포 11개를 만들었고 곧 교통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10살 소년에게 검증되지 않은 줄기세포를 주입하는 임상실험을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2003년 소년의 체세포를 직접 떼어 온 이가 그였다. 소년의 줄기세포만은 반드시 만들겠다는 다짐과 함께.

2005년 6월1일 PD수첩 제보 이후 그의 삶은 달라졌다. PD수첩 취재 이후 ‘제보자는 전직 연구원’이라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절도, 환자 정보 유출 혐의로 고소·고발도 이어졌다. 그는 다니고 있던 원자력 병원에서 강압적으로 사직서를 써야 했다. 1년 넘게 실직 상태로 있다가 원자력 병원 신경외과로 복직하고자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병리학과로 전과를 하고서야 자리를 잡을 수 있다. 기자들은 그의 집과 병원을 둘러싸며 압박해왔고 테러 공포는 계속됐다.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한 것은 ‘검증하지 않는 언론’이었다. 황우석의 언론 플레이에 적극 가담해 PD수첩과 제보자를 공격했다. 국민의 눈을 막으며 진실을 호도했고 한국 사회를 광풍으로 몰아넣었다. “당시 (황우석 비호 보도를 쏟아냈던 기자들 가운데) 단 2명만이 사과의 뜻을 전했다. 그중 한 명은 문자로 보내왔다. 기자들의 애환도 이해한다. 사과는 하지 않았어도 자책과 자괴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마음도 없었다면 절망적인데(웃음). 데스크는 시간을 주지 않고 취재 지시를 하달하고 경쟁시켰을 것이고 이 때문에 팩트를 확인하지 못한 채 써야 하는 어려움은 이해한다.”

- ‘황우석 논문 조작’ 사실을 제보한 곳이 MBC PD수첩이었다. 왜 PD수첩이었나? 

“제보를 실어줄 언론을 찾는 기간이 상당했다. 당시 레지던트로 근무하며 틈틈이 언론을 물색하는 작업을 했다. 당연히 한국의 언론을 공부해야 했다. 중간에 ‘킬’하지 않을 언론사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조선·중앙·동아는 황우석을 떠받치고 있었고 진보 언론도 노무현 정권에서 자유로울 수 없던 것 같았다. 한겨레는 2005년 ‘제2창간운동’을 하면서 ‘황우석 교수님과 한겨레, 닮았습니까?’라며 광고에 황우석을 활용하기도 했다. 중앙일보가 나을까 싶었는데, 황우석을 강하게 지지했던 홍혜걸 기자(중앙일보 의학 전문 기자 출신 홍혜걸씨는 지난 2014년 3월 “나는 지금도 황우석의 진정성을 믿는다”고 말한 바 있다.)가 있었다. MBC 보도국의 경우 보도본부장이 황우석의 서울대 수의대 3년 후배였고, 소규모 인터넷 매체로는 안 되는 싸움이었다. 검찰, 국회도 생각해봤지만 제보는 불가능했다. 8~9개월 정도 물색하고 낙담하고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본 게 PD수첩 15주년 특집방송이었다.”

▲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을 파헤쳤던 한학수 MBC PD. 6개월 동안의 취재 과정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사진=미디어오늘
- PD수첩 한학수 PD를 처음 만났을 때는 어땠나?

“난 당연히 최승호 PD가 올 줄 알았는데, 한학수 PD(당시 37세)가 왔다. 깜짝 놀랐다. 이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 경계심이 들었다. 그래서 물었던 것이다. ‘PD님, 진실과 국익 중에서 어느 것이 우선인가요’라고. 한 치에 주저함이 없이 ‘진실이 국익이라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만약 한 PD가 주저했다면, 내 질문에 눈이 돌아가고 머뭇거렸다면 끝났을 것이다. 그의 답변을 들은 뒤부터 제보가 시작됐고 내 마음은 점점 가벼워졌다. 한 PD는 죽을상이었다.(웃음)”

- 아무리 PD수첩이라도 당시 황우석을 문제 삼는 방송은 장담할 수 없었을 텐데.

“방송이 될 거라고 생각 못했다. 나는 이야기했으니 나머지는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라는 생각이었다. 언젠가는 밝혀질 테니까. 내가 한 PD에게 ‘1~2년 정도는 준비해야 한다’고 하자 한 PD는 ‘열심히 하겠다’고 했는데 실제 3개월 만에 우리 업계 이야기를 이해했다. 그는 꼼꼼하고 정확했다. 논리 정연하고 집요한 젊은 PD였다. 그때는 PD수첩 방송 일정에 맞춰 한 PD가 다른 제작물을 담당하고 있는지 몰랐다. 기존 방송 일정이 진행되는 상황 속에서 황우석 사태를 취재하기 시작했다.”

- 당시 언론은 검증 없이 황우석을 띄우는 데 주력했다. 황우석이 연구 계획을 언론에 흘리면 이를 대서특필하며 장밋빛 전망을 내놨다. ‘황우석 언론 장학생’이라는 말도 있었다.

“자신의 농장에서 언론인을 포함한 유력 인사에 쇠고기 파티를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졌고, 연구원들은 고기 배달에 나서기도 했다. 언론사 사주, 사장, 보도본부장, 본부장 등이 대상이었다. 충청권을 중심으로 그를 지지하는 지역 언론인 모임은 그를 띄우는 데 주력했다. 한 번은 OO일보 데스크가 황우석에게 전화를 한 뒤 ‘당신, △△일보하고만 노느냐, 우리는 XX이냐’라고 따지기도 했는데 그만큼 황우석이 주는 정보에 언론들이 목말라했다.”

2006년 3월 동아일보 출신 이성주씨가 황우석과 언론의 유착을 다룬 저서 ‘황우석의 나라’를 보면, 그 당시 타락한 기자 사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연합뉴스, 경향신문, 조선일보, KBS 등에는 황 교수 장학생으로 불리는 ‘특별관리 대상 기자’들이 있다. 일부 기자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며 비판적 시각을 유지했지만 나머지 몇 명 기자는 그야말로 황 교수가 세운 ‘홍보대행사’ 직원 같은 역할을 했고, 황 교수는 일부 언론인에게 신용카드를 주고 언제든지 고급술집을 이용하도록 했다. 그런 기자가 황 교수팀이 연구비가 없어 특허를 내지 못하고 있다든가, 국정감사가 연구의 방해가 된다든가, 비밀이 유출될 우려가 있으므로 황 교수가 쓴 돈에 대해서는 영수증을 검사해서는 안 된다는 허무맹랑한 기사를 쓰는 것은 아닐까.”

▲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는 논문과 학술을 통해 지위를 인정받는 보통의 과학자들과 다른 행보였다. 그는 언론을 통해 연구 계획을 알렸고 언론은 장밋빛 전망을 내놨다. 사진=미디어오늘 자료 사진.
검증은 없었다. 복제소 ‘영롱이’ 보도들도 그랬다. 류 교수의 증언이다. “기자들은 이미 농장에 대기하고 있었다. 출산 장면을 보여주고 ‘이게 복제소다’라고 하면 끝이다. 복제소임을 증명하기 위해 나온 소의 혈액을 채취하고, 모체와 체세포 제공소와 비교하는 유전자 검사는 불과 하루 걸린다. 논문은커녕 유전자 검사도 하지 않은 시점, 고작 막 출산을 한 시점인데도 ‘우리나라 최초의 복제소 탄생’으로 보도가 도배됐다. 근거를 확보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이다.”

- 언론은 황우석을 ‘국가대표 과학자’로 치켜세웠고 민족주의·애국주의를 조장했다. 황우석 본인도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필요하다”며 편승했다. ‘국익 프레임’이 견고했다.

“2005년 6월 관훈클럽에서 황우석을 초청해 토론회를 열었는데, 한 기자가 자료 앞에서 ‘반환점은 돌았다(고 봐도 되나)’라고 말한 것도 기억난다.(이 기자는 당시 박방주 중앙일보 과학 전문 기자로 그는 토론회 직후 “줄기세포 실용화 반환점은 넘었다”라는 기사를 썼다.) 언론들의 조급증과 국익 프레임이 견고하게 얽혀 있었다. 천문학적 국부가 창출될 수 있다고 연구기관들이 보고서를 내면 언론은 받아썼다. 황우석은 ‘미국의 심장부에서 태극기를 꽂고 돌아간다’며 한국의 열등감을 자극했다.”

- 황우석을 띄우던 언론은 PD수첩이 ‘논문 조작 사건’을 다룬다는 이야기가 입길에 오르고 YTN의 황우석 청부 보도로 한 PD의 취재 윤리가 도마 위에 오르자 MBC를 찌르는 창으로 ‘진화’했다. 류 교수와 PD수첩에 대한 뭇매가 쏟아졌는데?

“2005년 11월22일 PD수첩 첫 방송(“황우석 신화의 난자 의혹” 편)이 나간 뒤 황우석은 제보자로 나를 지목했다. 방송에 앞서서는 경향신문과 조선일보 등에서 제보자가 ‘전직 연구원’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12월 초 원자력병원에서 일하고 있을 때 기자들이 내가 일하는 병동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SBS가 처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카메라를 설치하면 일을 어떻게 하나. 휴가를 받아 몸을 피했다. 내가 살고 있던 고층 아파트에 로프를 타고 무단으로 침입하던 기자들도 있었다. 담배 꽁초 두 개를 베란다에 버리고 갔더라. ‘넌 악의적 제보자이니 네가 말하는 건 거짓말이고 우리의 행동은 당당하다’는 뜻 아니었을까. 조선일보는 황우석을 배신한 제자라는 ‘배신자 프레임’으로 공격했다.”

- 이후 자신의 보도 행태를 사과했던 기자가 있었나?

“이후 조선일보를 제외한 대부분 언론은 ‘황우석 보도’에 대한 대국민 사과문을 실었다. 기자들 가운데서는 단 두 명. 경향신문 기자와 조선일보 기자였다. 조선일보 기자는 사과의 뜻을 담은 문자를 보냈다. 그 문자를 제외하면, 걸출한 ‘황빠 기자’로부터 받은 사과는 없었다. 일방적인 문자에 대해선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 당시 MBC 내부도 기자와 PD 간 갈등이 첨예했다. 2005년 12월15일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을 다룬 PD수첩의 두 번째 방송분(“특집 PD수첩은 왜 재검증을 요구했는가?”)이 방영되기 전 보도국 기자들은 ‘PD수첩 방송을 강행해선 안 된다’는 취지로 결의문을 내는 등 내홍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PD들하고 보도국하고 사이가 좋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MBC 보도국에서 ‘우리도 제보자를 인터뷰하게 해달라’고 요구했고 그래서 보도국 기자 몇 명과 시사교양 PD들이 함께 모였다. 보도국 기자들은 내게 ‘핫라인을 만들자’고 했다. 상시적으로 연락할 수 있는 핫라인을 만들자는 건데 거절했다. MBC 보도본부장이 황우석 후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기자들이 발제해도 위에서 찍어 누를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한학수, 최승호 PD는 거절해준 것에 고마워했다. 이후 최문순 MBC 사장(현 강원도지사)을 만난 적 있는데 그는 보도국 기자들이 자신을 비토하고 그랬던 데 대해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논문 조작 국면으로 들어서자 MBC 기자들은 연일 굵직한 황우석 비판 보도를 쏟아냈다.”

▲ 지난 2005년 12월 기자회견을 열어 황우석 박사 줄기세포 조작 사건에 대한 입장을 밝혔던 당시 PD수첩의 최승호 CP(왼쪽)과 한학수 PD.
PD수첩 보도는 제작PD였던 한학수 PD와 김현기 PD, 윤희영 작가, 김보슬 조연출, 이들을 끝까지 보호하며 보도를 이끈 최승호 CP의 투쟁적 산물이었다. 그러나 2011년 이후 김재철 전 MBC 사장은 MB 정부의 언론 장악 일환으로 PD수첩을 갈아엎었다. 한 PD가 스케이트장 관리 업무에 배정되는 등 MBC PD들은 제작과 무관한 부서로 좌천됐다. 2012년 공정 방송 사수 파업 과정에서 최승호 PD는 해고 통보를 받고 거리로 내쫓겼다. ‘세기의 보도’ 주인공들이 수년 째 제작 현장 밖을 떠도는 현실이 MBC의 오늘이다.

- 황우석 보도를 했던 한 PD는 스케이트장 관리 업무에 배정되는 등(지난 4월 대법원은 한 PD 등에 대한 사측의 인사가 부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지난 보수 정권에서 고초를 겪어왔다.

“내가 겪은 한학수는 칼잡이였다. 진실을 파고들고 논리를 검증하는 데 뛰어난 재능이 있던 저널리스트다. 그런 언론인들이 모여있던 곳이 PD수첩이었고 내가 제보를 위해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PD수첩이었다. PD수첩이 쌓아온 세월과 조직 문화가 훌륭한 저널리스트를 만든 것이다. 그게 언론사의 자산이다. 지금은 어떠한가. 권력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거나 비판을 하려 하면, 싹을 자르듯 사람을 베어내고 기록을 막아버리지 않나? 언론 탄압의 피해는 사회 구성원들이 보게 돼 있다.”

- 한 PD가 좌천된 뒤 그를 만난 적이 있나?

“자주 봤고 그때마다 느꼈다. 언론인은 언론인으로서 역할을 할 때 정체성과 자부심을 느낀다. 지난 몇 년 동안 한 PD는 그걸 부정 당했다. 스스로 ‘나의 존재 의미는 뭘까’라고 계속 묻게 되고 위축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 같다. 한 조직에 어떠한 위기가 닥치면, 이전의 경험으로 극복하는 게 순리다. 현재 MBC의 젊은 PD들은 어떤 경험으로, 누구와 함께 난관을 극복할까. 지금 MBC 사장님도 한때는 기자 생활 열심히 한 분 아닌가? 그 마음 뻔히 아는 사람들이 정권 유지를 위해 언론인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게 온당한가?”

- 최승호 PD가 해고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어땠나?

“회사가 최 PD를 찍어내려고 지나치게 무리한다 싶었다. 해고 사유도 별 거 없었다. (2012년 당시 인사위원이었던 백종문 MBC 부사장은 2014년 극우 인터넷 매체 관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최 PD를 증거없이 해고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가 특별한 잘못을 했으면 모르겠다. 누가 해고를 받아들이겠나? 지금 PD수첩에 제보를 하면 나는 아마 바로 죽을 거다. 인터뷰는 나가지 못할 것이고. PD수첩이 쌓아온 가치가 지금은 완전히 무너졌다.”

▲ 류영준 교수는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언론의 목적은 진실 추구”라며 “사실이 밝혀질 때 누가 다칠지, 누가 이익을 볼지 따지는 것은 본질이 아니다. 진실을 찾겠다는 초심을 되찾길 바란다. 그래야 다음 세대에 당당하게 우리 역할을 전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진=김도연 기자
- 제보자의 삶은 어떠했는지 총평한다면?

“참여연대 공익제보지원센터 모임에 가끔 나간다. 그 자리가 불편할 정도로 다른 제보자들이 겪는 고통과 현실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일부 법이 있지만 제보자를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미흡하다. 내가 제보자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지면 안 되는 이유다. 나는 전문가로서 다른 전문가와 정당하게 경쟁할 수 있었다. 전공의 자격증도 따고 대학 교수로도 임용됐다. 내 경우만 따지면 ‘지원 시스템이 충분하다’고 오판할 수 있다. 다른 제보자들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거나 가족 관계가 어려워지는 등 여전히 압박과 불안, 핍박 속에 살고 있다.”

- 황우석 사태에서 얻어야 하는 교훈은 뭘까?

“비선 진료를 받은 대통령은 그 대가로 의료 규제를 풀어주려고 고군분투했다. 또 재벌과 정부는 유착했고 언론은 국민의 눈을 가렸다. 12년 전 황우석 사태도 마찬가지였다. 권력의 사유화와 정경유착, 언론의 호도가 반복됐다. 그때 언론인들은 여전히 기사를 당당하게 쓰고 있다. ‘인적 청산’은 이뤄지지 않았다. 인적 청산 없이 적폐 청산은 불가능하다. 언론에 할 말이 있다. 우리는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삶의 목적은 진실 추구다. 언론도 기본적으로 같다. 사실이 밝혀질 때 누가 다칠지, 누가 이익을 볼지 따지는 것은 본질이 아니다. 진실을 찾겠다는 초심을 되찾길 바란다. 그래야 다음 세대에 당당하게 우리 역할을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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