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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정도전 피살사건의 진실, 이방원은 무죄인가?





2일 방송되는 KBS1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정도전 피살사건의 진실, 이방원은 무죄인가?’ 편이 전파를 탄다.

▲ 조선 최고의 권력자, 정도전 살해의 미스터리.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장지화 등이 몰래 반역을 도모하여 국가의 기본을 요란시켰는데 다행히 천지와 종묘, 사직의 도움을 힘입어 죄인들이 죽음을 당하고 왕실이 다시 편안하게 되었다”

- 태조실록, 태조 7년

태조(太祖) 이성계 다음으로 최고 권력을 가졌던 정도전. 조선 왕조의 설계자로서 아쉬울 게 없었을 그가 정말 역모를 꾸몄을까? 정도전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점을 풀기 위해 사료를 토대로 직접 그날의 현장을 재현하였다. 그러나 현장에 있는 단서를 살펴보니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는데. 그날의 진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 ‘정도전,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정안군 이방원은 왕실의 지친이고, 유만수와 정신의 등은 원종 공신이므로 모두 죄를 논의할 수 없으니, 그 당해 휘하 사람은 모두 각기 태형 50대씩을 치고, 외방 여러 진의 절제사로서 《진도(陣圖)》를 익히지 않는 사람은 모두 곤장을 치게 하라.”

- 태조실록, 7년



정도전 살해 사건 발생 17일 전, 정도전과 이방원 사이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다. 정도전이 이방원의 휘하(麾下)에게 벌을 내릴 것을 태조(太祖) 이성계에게 상언한 것! 대체 어찌된 일일까?

조선 초, 정도전은 명(明)과의 긴장이 고조되자 진법 훈련을 실시한다. 그러나 왕실과 종친들에게 진법 훈련은 사실상 사병 해체였다. 사병을 뺏기지 않기 위해 진법 훈련을 따르지 않은 이방원. 왕자 신분의 이방원 대신 휘하(麾下)가 50대 태형을 받지만 이는 결국 이방원 자신에게 내린 벌이나 다름 없었다. 이로 인해 정도전과 이방원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하게 되는데.

▲ 동지에서 원수로, 정도전과 이방원의 엇갈린 운명

정도전과 이방원, 두 사람은 한때 대업의 뜻을 함께 품고 조선을 세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혁명 동지였다. 어째서 이들은 개국 이후, 무슨 이유로 서로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을까?

1392년 8월 20일 태조(太祖) 이성계는 44명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을 발표한다. 그러나 그 명단에 이방원의 이름은 없었다.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제거하는 등 누구보다 조선을 개국하는 데 공이 컸던 그였다. 또한, 같은 날 왕세자가 결정되나 이 역시 이방원은 아니었다. 세자는 이성계의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11살 막내 이방석이었다.

개국공신과 세자책봉의 실무책임자는 바로 정도전. 그는 왜 이러한 선택을 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를 죽인 이방원의 선택은 옳은 것일까?

<역사저널 그날> ‘정도전 피살사건의 진실, 이방원은 무죄인가?’편에서 정도전이 살해된 그 날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본다.

[사진=KBS1 ‘역사저널 그날’ 예고영상캡처]

/서경스타 전종선기자 jjs737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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