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TV드라마를 보면 감칠맛 나는 명품조연이 눈에 밟힐 때가 많다. 주연을 안정적으로 뒷받침하면서 극에 반전을 불러일으키는 조연이 있기에 드라마가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역사도 꼭 위인전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끌어가는 건 아니다. 어떤 시대는 스스로 가교가 되어 사람과 사람, 사건과 사건을 이어주는 인물을 눈여겨봐야 한다. 중종의 두 번째 부인 장경왕후도 그런 명품조연으로 볼 수 있다. 사극 ‘7일의 왕비’에는 박원종의 조카 ‘윤명혜’가 등장해 진성대군(훗날의 중종)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 박원종은 1506년 중종반정을 주도해 연산군을 끌어내린 역사인물이다. 그에게는 세 명의 누이가 있었는데 각각 월산대군(성종의 친형), 제안대군(예종의 아들), 윤여필에게 시집갔다. 그 가운데 윤여필의 딸이 바로 장경왕후 윤씨다. ‘명혜(明惠)’는 나중에 왕비가 죽은 뒤 덕을 기리기 위해 올린 휘호였다. 장경왕후는 8세 때 어머니를 잃고 이모 월산대군 부인의 손에 길러졌는데 어려서부터 경전과 역사에 통달하여 스스로 처신을 다스릴 만큼 비범했다고 한다. 1506년 9월 10일 단경왕후가 궁궐에서 쫓겨난 다음날 처녀 간택령이 내려지자 그녀는 16세의 나이로 입궁한다. 처음에는 후궁인 숙의(종2품)에 봉해졌다가 이듬해 왕비가 되었다. 반정 주역인 외숙부 박원종의 덕도 봤겠지만 중종 또한 이 일등신붓감에게 반했다. “어진 덕이 윤씨 만한 이가 없으니, (왕비에) 책봉하는 예를 거행하라.”(중종실록) 실록은 장경왕후의 사람됨을 ‘어질다’고 묘사한다. 왕비는 대비 정현왕후에게 효도하고 남편 중종을 현명하게 내조하는 것은 물론 후궁들에 대해 투기하지 않았고 그 자식들까지 사랑으로 양육했다고 한다. 또 아랫사람인 궁녀와 종들에게도 예의로 대하고 은혜를 베풀었으니,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교만하거나 함부로 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왕비가 어떤 자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외척을 경계한 것도 그래서다. “소첩은 사사로운 혈육을 위하여 청을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어진 사람이라면 공론에 따라 쓰면 되고, 어리석다면 누구를 탓하겠습니까?”(중종실록) 실제로 장경왕후는 친정 윤씨 일가를 근신하게 하고 그들에게 벼슬을 주거나 죄를 묻는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왕비가 이렇게 처신하니 궁궐에 이간질하는 사람이 없었고 조정에서도 임금과 신하의 칭송이 가득했다. 하지만 경복궁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스물다섯 살, 창창한 나이에 그녀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이다. 그토록 고대하던 원자 탄생과 함께 어진 왕비가 세상에 작별을 고할 줄이야. 1515년 2월 25일 장경왕후는 지독한 난산 끝에 원자를 출산했다. 온 나라가 경사에 들뜬 분위기였지만 왕비는 생사의 기로에 섰다. 치명적인 산후병이 덮친 것이다. 의녀들이 밤낮으로 달라붙고 내의원에서 온갖 약을 올렸지만 병세가 너무 위급했다. 당시 여인들은 이렇게 목숨을 걸고 출산했다. 산후병은 그 어떤 질환보다 위험했다. 전문 인력의 도움을 받은 왕비가 이 정도면 백성들은 어땠을까. 결국 그녀는 3월 2일에 숨을 거뒀다. 젖먹이 원자의 곁을 지키려고 사투를 벌였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이 안타까운 순간 흥미로운 인물이 역사에 등장했다. 오늘날 드라마로 전세계에 알려진 대장금이다. 장금은 의녀로서 원자의 출산을 돕고 왕비를 마지막까지 돌봤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경왕후가 운명했다는 것이다. 내의원과 의녀들의 처벌이 불가피했다. 이때 장금을 편들고 나선 이가 중종이다. "의녀 장금(長今)은 원자 출산에 공이 크니 마땅히 큰 상을 받아야 하는데, 왕비의 죽음으로 인해 아직 드러나게 상을 받지 못했다. 상을 베풀지는 못할망정 형벌을 가할 수는 없으니 장형(杖刑)을 재물로 대신하게 함이 옳다. 이것은 앞뒤 사정을 모두 참작하여 죄를 정하는 뜻이다."(중종실록) 임금의 은혜를 입은 장금은 1544년 중종이 죽는 순간까지 함께 했다. 장경왕후의 최후는 의녀 장금뿐 아니라 유명한 여인들을 대거 역사무대로 불러냈다. 경빈 박씨, 희빈 홍씨 같은 후궁들은 이때부터 야망을 불태웠다. 왕비가 세상을 떠난 이상 젖먹이 원자의 운명은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후궁들은 제 자식을 다음 보위에 앉히기 위해 조정의 권신들과 결탁했다. 경복궁의 평화가 사라지고 궁중암투가 본격화된 것이다. 사극 ‘여인천하’에서 “뭬이야?”란 대사로 뜬 경빈 박씨는 원래 연산군이 끌어 모은 여성 예인 ‘흥청’ 출신이었다. 경빈은 아들 복성군을 후계자로 만들려고 권신 심정과 결탁하여 장경왕후 소생인 세자를 흔들었다. 그러나 1527년에 터진 ‘작서의 변’으로 경빈 모자는 궁궐에서 쫓겨나 목숨을 잃었다. 작서의 변은 사지를 자르고 불에 지진 쥐로 세자를 저주한 사건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심정의 정적 김안로가 꾸민 조작극이었다. 희빈 홍씨도 궁중암투에 가담했다. 그녀는 아버지 홍경주와 권신 남곤의 사주를 받고 개혁정치가 조광조를 모함했다. ‘주초위왕’ 사건이 대표적이다. 야사에 따르면 희빈은 궁궐 후원의 나뭇잎에다 달콤한 즙으로 ‘走肖爲王’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벌레가 갉아먹도록 했다. 그것은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의심에 사로잡힌 중종은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 선비들을 제거했다. 이 사화에 앞장선 인물이 남곤과 홍경주였다. 권경률 역사저술가 이 여인천하를 평정한 이는 장경왕후에 이어 왕비가 된 문정왕후였다. 17세에 입궁한 그녀는 후궁들의 위세에 휘둘려 숨죽여 지내다가 경원대군을 낳으면서 본색을 드러냈다. 1544년 장경왕후 소생 세자가 즉위했으나(인종)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세간에서는 몇 년 전 일어난 동궁 화재와 함께 이 죽음의 배후로 문정왕후를 지목했다. 1545년 경원대군이 12세의 나이로 임금이 되자(명종) 조선 땅에는 문정왕후의 치맛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 이 기사는 빠르고 깊이있는 분석정보를 전하는 VIP 머니투데이(vip.mt.co.kr) 에 2017년 6월 30일 (19:06)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공감 0% 비공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