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원 "韓 최초 월드컵당구 2회 우승도 탐난다"

2017. 6. 30.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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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K빌리어드뉴스 창간 인터뷰] 최성원-①
세계선수권 우승 세계1위 아지피우승 등 최초 타이틀과 인연많아
7월 포르투월드컵 9월 청주월드컵 대회 맞는 각오 남달라
선수 등록 1년6개월만에 전국대회 정상..한국 당구 최고의 승부사

세계3쿠션선수권, 세계팀3쿠션선수권, 아지피(AGIPI) 마스터즈 우승. 세계랭킹 1위, UMB(세계캐롬연맹) 올해의 선수. ‘한국당구 간판’ 최성원(부산시체육회·40)의 이력이다. 모두 한국선수로는 최초다. 5개 최초 타이틀을 보유한 최성원을 지난 13일 부산 사상구 학장동 그의 당구클럽에서 만났다.

첫 질문부터 세게 던졌다. “월드컵 우승한지 벌써 5년 됐다. 곧 포르투, 청주대회가 열리는데 각오가 어떤가? 우승하면 한국인 첫 월드컵 2회 우승인데.”

“한국인 첫 월드컵 2회 우승 탐나죠. 2014년에 기회가 있었는데, 결승에서 재호(조재호 선수)한테 뺏겼죠(웃음). 쉽진 않겠지만 6번째 ‘최초’ 타이틀도 추가해보려고요.”

당시 터키 이스탄불월드컵 결승에서 최성원은 먼저 40점을 채웠으나, 조재호가 마지막 이닝에 8점 하이런으로 동점을 만들었다. 이어진 승부치기에서 최성원은 2점에 그쳐 3점을 친 조재호에게 우승컵을 넘겼다.

잠시 뜸을 들인 최성원은 특유의 덤덤한 말투로 포부를 밝혔다.

미디어속의 그는 과묵하다. 상투적인 대답이 이어질까 걱정했다. 하지만 기우였다. 시간이 지나자 “선수들 다 떠난 부산을 혼자 지키고 있다”며 너스레도 떨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당구인생’을 하나둘 풀어냈다.

▲“당구스타? 아직도 쑥스러워요”

최성원은 ‘당구황제’ 고 이상천, 고 김경률 다음으로 한국당구스타 계보를 잇는 선수다. 국내 메이저대회 10회 이상 우승, 2012년 터키 안탈리아 월드컵과 2014 구리 세계선수권 우승 등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다. 2015년 1월에는 한국인 최초 UMB 3쿠션 랭킹 1위, 2월엔 UMB 올해의 선수상까지 수상했다.

“그런 얘기 아직도 부끄러워요” 그저 재미로 공을 치던 부산사나이가 이렇게 한국대표선수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단다.

그가 9살 때 아버지는 당구장을 차렸다. 집이 당구장에 딸려 있어서 자연스럽게 큐를 잡았다. 아버지는 2년만 당구장을 운영했는데, 그때 어깨너머로 보고 배웠던 것이 자양분이 됐는지, 고2때 4구 500점을 쳤다.

이후 그는 부산에서 잘나가는 아마추어들 모조리 꺾었다. 내기당구를 치면 호주머니 돈을 다 빼간다고 ‘모기’로 통했다. 스무살땐 경남 양산 출신인 김경률이 그의 명성을 듣고 도전한 일화도 있다. 물론 김경률이 크게 패했다.

“고등학생이 얼마나 잘 쳤겠어요. 경률이에게 제 실력이 대단해 보였나봐요. 나중에 서울로 올라가 선수하자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20대 초반의 최성원은 선수할 생각이 없었다. 정확하게는 당구선수가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러던 그가 아는 형을 따라간 당구장에서 우연히 ‘선수용’ 테이블을 접했다. 전문선수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당시 그는 대학을 1년 다니다 그만두고, 진로를 모색하던 때였다. “이거다” 싶었다. 그리고 25살인 2002년 9월 선수로 등록했다.

▲선수 등록 1년 6개월만에 전국대회 우승

당구선수로 나섰지만 사실 막막했다. 큰돈 버는건 고사하고, 모자란 실력부터 키워야 했다. 연습장은 부산의 한 당구장. 영업이 끝난 이후가 그의 연습 시간이었다. 홀로 밤에 불을 켜고 새벽까지 하루 5~6시간 동안 연습에 매진했다.

스승은 따로 없었다. 대회에 나가 잘하는 선배들의 플레이를 따라하고 응용했다. 똑같은 공의 배치를 놓고 두께, 회전량을 달리 해가며 연구했다.

이렇게 1년 6개월이 흐른 2004년 2월, 경기도 안산에서 ‘경기도 오픈’이 열렸다. 전국대회였다. 훗날 국가대표팀 코치로 만나는 김정규를 비롯 당대 실력자인 김윤석, 장성출 등 출전선수 면면이 화려했다.

하지만 27살 무명의 최성원이 사고를 쳤다. 16강에서 김정규를 꺾는 등 승승장구 하더니 결국 결승에서 최재동을 누르고 우승까지 차지했다. 생애 첫 우승상금은 300만원.

“얼떨떨했어요. 그땐 좋은 선수들이 서울, 경기도에 집중돼 있던 때라 제게 주목하는 선수는 없었거든요. 그런데 우승까지 해버린거에요. 대회장이 웅성거렸죠.”

▲한국대표 ‘승부사’ 최성원

이후 최성원의 당구인생은 ‘꽃길’이 펼쳐진다. 수많은 전국대회 정상에 오르며 ‘태극마크’까지 달았다. 3살 동생 김경률, 강동궁 등과 2000년대 후반까지 아시아선수권대표 등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세계대회에서도 선전했다. 2008년 김경률과 함께 세계팀3쿠션선수권 3위, 2010 세계선수권 3위 등을 차지했다. 2011년엔 한국인 최초 ‘아지피 마스터즈’도 우승, 당시 세계최고 우승상금 3000만원도 거머쥐었다.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니 조금씩 자신감이 붙었습니다. 더 잘 쳐야겠다는 오기도 생겼고요.”

물오른 최성원은 2012 2월, 터키 안탈리아로 날아갔다. 월드컵 무대였다. 사람들은 2년 전 한국인 첫 월드컵 챔피언인 김경률을 기억했다. 하지만 결승전에 오른건 최성원이었다. 상대는 개최국 터키의 타이푼 타스데미르.

홈팬들의 일방적인 응원, 타스데미르의 뛰어난 실력 때문에 최성원은 초반 밀렸다. 하지만 승부사 기질이 발동, 승부를 풀세트까지 끌고갔다. 결국 접전 끝에 세트스코어 3:2로 역전승했다. 한국인으로 두 번째 월드컵 챔피언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세계랭킹도 11위에서 6위로 껑충 뛰었다.

“초반에 경기가 풀리지 않아 전환점이 필요했어요. 내 플레이만 집중하기로 마음먹었죠. 눈에 테이블만 담기로 했어요. 그러자 볼이 원하는대로 구르더라고요.”

멋진 역전드라마를 보여준 최성원은 이때부터 ‘승부사’로 불렸다.

<2회에 계속>

[MK빌리어드뉴스 이상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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