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 서운합니다"

한수연 기자 입력 2017. 6. 2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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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위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숨진 군인과 경찰들입니다.

국가보훈처는 1998년부터 6·25 전몰군경 유자녀들에게 보훈 급여를 지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자녀에게 지급하는 보훈 급여가 어머니의 사망 시점에 따라 최대 10배까지 차이가 나 유가족들이 분통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국가보훈처의 유자녀 분류 기준이 비합리적이며 임의적이라 차별을 받고 있다는 입장입니다.

6·25를 맞아 전몰군경 유자녀 처우의 실태와 문제점을 따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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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정부종합청사 앞.

한복을 입은 외국인 관광객들 사이, 상복 차림의 노인들이 눈에 띕니다.

침묵시위 중인 이들은, 6·25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과 순직 경찰의 자녀들입니다.

정부가 유가족 수당 액수에서 부당한 차별을 방치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서승교/6·25 전몰군경 유자녀] "다 같은 6·25 사변 때 돌아가신 아버지 자식들인데 너무나 10배나 차이 나기 때문에 그걸 수정해 달라고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지난 2001년부터 6·25 전쟁 때 사망한 군인과 경찰의 자녀들에게 수당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여의고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내야 했던 유자녀들에 대한 예우 차원입니다.

하지만, 지급액을 정하는 규정이 합리적이지 못해 유자녀들은 국가에 많은 섭섭함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그동안 국회에서, 그리고 언론 보도에서 지적도 돼 왔지만, 6월 보훈의 달이 지나가면 또다시 잊혀지는 이슈였습니다.

서울 중앙보훈병원에서 20년째 봉사활동 중인 김자야 씨, 1950년 네 살 때, 아버지는 낙동강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김씨는 아버지께 못한 효도를 한다는 심정으로 국가유공자 노인들의 병원 검진을 돕고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막노동으로 자신을 키웠다고 합니다.

[김자야/6·25전몰군경 유자녀] "미망인이고 우리 유자녀들이고 애비 없는 자식으로서 굉장히 멸시를 받았어요. 멸시를 받다 보니까 그런 걸 (아버지 참전 사실을) 내색도 못했고. 우리를 국가에서도 누가 뭐 어떻게 보살펴 주지 않았어요."

2001년, 김씨에게 자녀 수당이 지급됐습니다.

올해 기준, 월 100만 4천 원, 적지않은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김자야/6·25 전몰군경 유자녀] "그게 많이. 그걸로 사는 거죠. 그걸로 살고 있어요. 초등학교도 못 나오고 배우지 못하고 또 가진 것도 없잖아요. 누가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참 고아나 다름없이 자란 애들이 너무 많아요."

아버지 묘소를 찾은 또 다른 유자녀 조성길 씨입니다.

아버지는 1952년 고성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7살 때 아버지의 사망 통지를 받은 조씨는

홀로 남은 어머니를 위해 초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조성길/6·25 전몰군경 유자녀] "시골에 땅도 없고 물려받은 땅도 없고 하니까 장사를 했어요, 계란장사.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노숙했어요. 그리고 밥은 남대문시장 가면 수제비 있어요. 밀가루 반죽해 떼놓은 수제비, 그게 제일 쌌으니까 그거 사먹고."

중장비 기사로 일하다 회사를 퇴직한 뒤 현재는 일용직 기사로 살고 있는 조씨에겐 유자녀 수당으로 11만 8천 원이 지급됩니다.

앞서 김자야 씨와 비교해 보면, 아버지가 6·25 전쟁에서 전사했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린 시절을 힘겹게 보낸 점 등이 유사합니다.

하지만, 보상금의 액수는 10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국가 유공자의 자녀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오고 있지만, 아버지 목숨의 대가는 무공훈장뿐이란 생각에 허망함도 느낀다고 합니다.

[조성길/6·25 전몰군경 유자녀] "이건 형평성에서 진짜 너무 문제가 많다고 생각해요. 법에는 평등하다고 되어 있는데 시행에서는 평등치 못하니까 항의를 할 수밖에 없죠."

이렇게 유자녀 수당액수가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정부의 분류 방식 때문입니다.

정부는 6·25 전몰군경 자녀 수당을 책정하면서, 자녀들을 세 등급으로 나눴습니다.

아버지 사망 후 어머니가 재혼해 떠나버려 사실상 고아가 된 경우는 '제적 유자녀'로 정해, 월 120여만 원을, 홀어머니와 함께 산 자녀들의 경우, 1998년 1월 1일 이전에 어머니가 사망했다면 '승계 유자녀'로 지정해 100만 4천 원을, 그런데 98년 1월 이후 사망한 경우, '미수당 유자녀'로 규정해, 그 자식들에겐 수당을 11만 8천 원만 주기로 했습니다.

기준이 된 법 개정 시점 98년 1월에서 하루 앞서 97년 12월 31일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경우, 한 달에 1백만 원씩 받게 되지만, 바로 다음날인 98년 1월1일에 돌아가셨다면, 11만 8천 원의 보상금만 받게 됩니다.

제도 시행 초기엔 11만 8천 원마저도 지급되지 않다가, 강력한 항의가 이어지자, 지난해 7월부터 지급되기 시작했습니다.

[김화룡/6·25 전몰군경 미수당 유자녀] "저희 어머니가 조금 오래 사셨다는 그 핑계 하나로 우리 유자녀들을 미수당 유자녀라고 국가보훈처에서 이름을 지어놓고, 자그마치 17년 동안 정부에서 단, 돈 1원짜리는커녕 어떠한 프로그램 하나 없었습니다."

1백만 원대가 아닌 11만 8천 원을 받는 유자녀들은 현재 1만 3천여 명.

[김연옥/6·25 전몰군경 미수당 유자녀] "그날이 딱 저희 아버님 제삿날이었습니다. 그래서 11만 4천 원을 상에 올려놓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이광윤 교수/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유가족의 사망 시점에 따라서 차별을 하고 있잖아요. 그것도 또 지급액이 10배나 차이가 난다고 하니까 이것은 명백히 평등의 원칙에 어긋나는 시행령의 내용이죠."

국가보훈처는 "재정 당국과 협의해 수당을 지속적으로 인상해 나가겠다"는 입장입니다.

[김화룡/6·25전몰군경 미수당 유자녀] "지금이나 예나 똑같은 얘기입니다. 대한민국이 좀 더 부강하고 돈이 많으면 점차적으로 수당을 늘려주겠다, 그게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여야 정치권도 대체적으로 문제점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11만 8천 원의 여섯 배인 월 70만 원으로 올리자는 법률 개정안도 발의돼 있습니다.

[민홍철/국회의원 국가유공자예우법 개정안 발의] "시간이 문제거든요. 현재 6·25 참전 전몰군경 유자녀 분들이 거의 65세 이상입니다. 그러니까 이분들한테 빨리 수당으로라도 예우를 해드려야 되는데 국가가 예산이 없다는 이유는 이제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거죠."

6·25 전쟁에 참전했던 유공자는 물론 그런 부모님을 모시고 있거나 모셨던 자녀들도, 국가를 향해 서운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경우가 크다고 합니다.

금전적 지원을 받는다 해도 희생에 비해 그 액수가 너무 적거나, 아예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경기도의 한 요양원.

조영화 씨는 1950년 안강 전투에 간호원으로 참전했습니다.

[조영화/6·25 참전유공자] "환자가 있을 때 그때 뭐 일이 바쁘지. 전쟁이 치열하게 하고 나니까 맨 환자뿐이야. 그걸 모두 다 치료하느라 밤에 잠도 못 자고 그랬지."

10년 전 발병한 치매의 진행 속도가 최근 들어 빨라져 요양원에 입원했습니다.

군번도,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았던 조 씨는 지난 2004년에야 참전 유공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매월 받는 참전 명예 수당은 22만 원 정도.

내년부터 인상될 예정인 이등병 월급(30만 6,130원)에도 못 미치는 액수입니다.

한 달 약값도 안되는 지원금 대신, 의료 혜택만이라도 제대로 받을 수 있기를 자식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지정 병원을 가면 진료비가 감면되긴 하는데 할인 혜택은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라고 합니다.

[원미희/6·25 참전유공자 자녀] "치매 검사를 했는데 그때 MRI 같은 비용이 130만 원 이래서, 한 열흘 입원하셨는데 150만 원 넘게 비용이 나왔어요. 위탁병원이라 할지라도 혜택이 별로 없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느새 여든이 넘어버린, 생존 유공자들에 대한 장기 요양 혜택도 미미하다고 합니다.

[원미희/6·25 참전유공자 자녀] "(6·25 참전 유공자가) 9만 9천 명 남았으면 한 5,6년 안에 거의 돌아가신다고 보이거든요. 그렇다면, 그 어른들 살아생전에 의료비라도 지원을 해드리고 또 요양원에 편히 계실 수 있도록 그건 국가가 해야 되는 게 아닌가."

1951년 오산 전투에서 지뢰 폭발로 전신에 파편상을 입고 전역한 고 배효원 씨, 온몸에 박힌 파편들로 인한 고통과 불편한 몸 상태 때문에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가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배금선/6·25 참전유공자 자녀] "육군병원에서 수술 두 번 하고 큰 파편들은 대충 제거를 했는데 그 흉터가 많이 몸에 남아있었어요. 다리 이렇게 만지면 파편이 다리에도 있고 막 이런 데 가슴에도 있고."

그러다 아버지는 95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망 전까지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해, 살아생전 보훈 혜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배금선/6·25 참전유공자 자녀] "6·25 참전 유공자도 아니라는 거예요. 국방부에 분명히 병적증명서 있고 다 남아있는데 왜 유공자가 아니냐, 유공자가 맞잖아요."

그러다 올해 6·25 참전 유공자로 인정받긴 했지만, 금전적 지원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족들은 아버지에게 상이 등급이 인정돼, 몸이 불편한 남편을 챙겼던 어머니라도 병원비 지원 혜택을 받게 되길 원합니다.

[배금선/6·25 참전유공자 자녀] "엄마가 얼마나 살아 계실지는 모르지만 살아계시는 동안에 한 달 병원비라도 받아봤으면 좋겠어요. 진짜. 제가 진짜 간절한 심정이에요."

하지만, 파편 부상 '상이 7등급'이 2000년에 생겼기 때문에, 이미 95년 사망한 아버지에게 소급 적용되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국민권익위원회 관계자] "당시에는 1에서 6등급밖에 없다 보니까 팔, 다리가 절단되고 이러지 않으면 이게 등급 받기가 좀 어려웠고,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서 7등급이라는 등급을 별도로 추가로 만들어서 파편창 분들이 대부분 7등급이 됐다는 거예요."

6·25 참전 용사의 유가족들은, 전쟁에 나가 숨지거나 부상당한 사람만 억울할 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 국가가 먼저 나서서 권리를 찾아주지 않느냐는 불만도 얘기합니다.

[조성길/6·25 참전유공자 자녀] "공무원들이요. 찾아주는 것이 없어요. 이런 제도가 있으니 이렇게 이용을 하라는 얘기가 여태까지 지금도 안 하고 있어요. 자기가 자기 몫을 못 찾아 먹으면 그걸로 끝나지 절대 찾아주는 법이 없어요."

국가를 위해 희생한 유공자들에 대한 지속적 복지의 중요성을 전문가들은 강조합니다.

[조흥식/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미국 같은 데서는 일종의 생애주기별 서비스, 그리고 또 소득 보장을 아주 체계적으로 합니다. 중장년 시대 때 여러 가지 어떤 보상이라든가 그다음에 노년층에 있어서의 보상이 받고자 하는 욕구가 좀 다를 거 아니겠습니까."

문재인 대통령은 국가유공자와 보훈 가족이 대접받는 사회를 강조했습니다.

[제62회 현충일 추념식/지난 6일] "전장의 부상을 장애로 안고, 전우의 희생을 씻기지 않는 상처로 안은 채 살아가는 용사들, 그분들이 바로 조국의 아버지들입니다. 반드시 명예를 지켜드리겠습니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부상을 당한 참전 용사들의 피와 땀이 그 후손들의 삶을 통해 원망으로 돌아와선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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