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노래]전유나의 '너를 사랑하고도'-지하 감옥의 나에게 온 그리움

입력 2017. 6. 28.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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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20대 청춘은 아팠다. 대학 2학년이었던 1990년 3월, 운동권 동료를 의문사로 잃었다. 학번은 동기였으나 나보다 4살 많았던 그는 우리 학교 총학생회장이었다. 그런 형이 오후 2시35분 실종 끝에 봄비 내리던 새벽 시신으로 발견됐다. 내 나이 21살 때의 일이었다. 형의 죽음 이후 나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여덟 글자 안에 갇혔다. 그가 억울하게 죽었는데 나는 학점을 받겠다며 수업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 해 여름, 결국 나는 학교에서 제적됐다.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의 1주기가 다가오던 이듬해 3월의 일이었다. 형의 의문사를 밝히지도 못한 채 맞이하는 기일이 고통스러웠다. 추모제라도 학내에서 학우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대자보를 쓰고 유인물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런 우리를 주목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형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학내 폭력배였다. 홍보를 마치고 동아리방으로 돌아오자 이내 그들이 난입했다. 낫, 쇠파이프, 각목을 들고 난입한 10여명의 폭력배들은 동기인 정연석군과 나를 마구잡이로 때리기 시작했다. 유리창이 깨져 사방으로 흩어지고 맞은 입에서는 피가 튀었다. 짐승같은 비명이 터졌다.

그날 나는 처음 알았다. 석유에 젖은 라이터 돌은 불을 튀기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분신자살을 해서라도 그들에게 저항하고 싶었다. 그래서 폭력배들이 물러간 후 석유통을 들어 머리부터 붓기 시작했다. 이제 끝이다. 작심하고 라이터를 당겼다. 그런데 들이붓던 석유가 튀면서 들고 있던 라이터 돌이 젖었나 보다. 돌아보면 다행이었다. 그런 나에게 주변에 있던 이들이 달려들어 라이터를 빼앗았고, 이후 밀착 감시하면서 분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함께 폭행당했던 정연석군이 다음날 분신을 하고 만 것이다. 전날 폭력을 행사한 이들이 다음날 재차 그를 폭행하면서 그 분을 참지 못해 일어난 비극이었다. 짐승같이 울었다. 우리 몸에 남은 ‘푸른 멍처럼 푸른 연기로 퍼진’ 학우들의 비명. 하지만 싸움은 이길 수 없었다. 나는 이후 경찰의 수배가 떨어졌고 체포 다음날 영장이 발부되었다. 내 나이 22살 때의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갇힌 곳은 일제강점기 시절 지은 지하 감옥이었다. 하루종일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그곳에 갇혀 있을 때 내 절망은 깊이가 없었다. 그때 뜻밖의 여자가 나를 찾아왔다. 여자가 첫 번째 면회를 왔다고 하여 나는 내 어머니가 온 줄 알았다. 그런데 나가보니 같은 동아리 1년 후배였다. 반가워하는 나에게 후배는 편지 하나를 차입했다고 말했다. 돌아와 교도관이 가져다 준 그 편지를 열어보는데 순간 이게 뭐지 싶었다. 편지에는 ‘오늘의 날씨’가 적혀 있었다. 오늘은 몇 도이며 하늘은 무슨 색깔이고, 또 바람은 얼마나 불며, 나뭇잎은 얼마나 피었는지 등등이었다.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후배는 나를 찾아왔고 돌아간 후에는 어김없이 오늘의 날씨가 들어왔다.

후에 알았다.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는 말을 듣고 대신 세상의 날씨라도 알려주고 싶어 그리 했다는 것을.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면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교도관이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노래 한 곡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 가사가 내 가슴을 쳤다. 그러면서 떠오른 얼굴이 있었다. 나에게 날씨를 알려주던 후배였다. 이전과 다른 그리움이었다. 그 노래, 1991년 전유나의 노래, <너를 사랑하고도>였다. 그 후배는 지금 나와 1남 1녀를 낳고 24년째 사는 내 아내가 되었다. 그리움이 현실이 된 내 아내, 늘 고맙다.

이젠 더이상 슬픔은 없어 너의 마음을 이제 난 알아 사랑했다는 그말 난 싫어 마지막 까지 웃음을 보여줘

<고상만 인권운동가·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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