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으로 깡으로' 이시준, 농구인생 돌아보기!①

이재범 2017. 6. 28.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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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켓코리아 = 이재범 기자] “굉장한 독종” “깡다구” 지난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이시준을 가장 잘 표현한 수식어다. 팬들도 이시준 하면 근성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조금은 아쉽게 은퇴한 이시준을 지난 19일 제주도 서귀포시에 있는 대신중학교에서 만났다. 

이시준은 김해동광초 5학년 때 농구공을 잡은 뒤 임호중, 김해 가야고를 거쳐 명지대를 졸업했다. 2006 국내선수 드래프트 6순위로 서울 삼성의 지명을 받아 이적없이 11년 동안 프로 생활을 한 뒤 지난 5월 은퇴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1년 직속 선배인 오리온 윤지광 스카우트는 “어릴 때부터 프로처럼 몸이 약해 보이는데 성실하고 똑똑하고 영리해서 선생님께 예쁨을 많이 받았다. 거의 안 변한 거다”고 이시준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이어 “독기와 깡다구가 있었다. 선천적으로 체력이 좋은 건 아닌데 깡이 있어서 체력 운동하면 무조건 일등으로 뛰려고 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 빈혈이 있어서 입원도 했었다”며 “선천적으로 몸이 좋지 않아서 체력도 만든 거다. 뭐든 안 지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고 덧붙였다. 

이시준 하면 뭐가 가장 먼저 떠오르냐고 묻자 “깡다구”라고 답했다. 이어 “실력을 떠나서 정말 열심히 했다. 그게 없었다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명지대에서 이시준을 가르친 MBC Sports+ 강을준 해설위원은 “박영민, 박성훈, 고승진, 서병훈 등이 입학하며 명지대 부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이시준 때부터 돌풍을 일으켰다”며 “이시준은 덩치에 안 맞게, 경상도 말로 모타리가 적은데 굉장한 독종이다. 오죽하면 강제로 쉬게 한 적도 있었다”고 이시준을 독종으로 표현했다. 

강을준 해설위원은 말을 이어나갔다. 

“자기 관리, 후배 관리도 잘 했다. 팀을 위해 희생하고, 선배와 후배를 위해 양보도 할 줄 알았다. 종별선수권에서 우승했을 때 이시준이 MVP에 선정되어야 하는데 선배를 위해서 양보를 했다. 감독 입장에선 미안한 선수였다.”

당시에는 우승팀에서 MVP를 추천했다. 강을준 해설위원은 이시준의 1학년 시절 일화도 들려줬다. 

“대학 1학년 때 한 번은 면담을 했다. 그 때 이시준이 ‘정말 농구를 접을 생각은 없는데, 참고 견디고 했는데 도저히 힘들어서 안 되겠다’면서 하는 얘기가 어머님께서 위암에 걸리셔서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는 거다. ‘그걸 왜 왜 속앓이를 하냐?’며 빨리 집에 내려가고 어머님 수술 끝나고 그 때 오라고 했다. 한 달 여유를 줬는데 그럼 보통 한 달 채우는데 이시준은 10여일 만에 올라왔다. 

그 이후 눈빛이 달랐다. 내 생각으론 농구로서 성공을 해야 한다는 욕망이 꿈틀거리지 않았을까? 어머니를 즐겁게 해주는 게 뭔지 생각을 했을 거다. 그 뒤 장염에 걸려도 뛰는 그런 투혼을 보여준 거다. 그 때부터 농구로서 성공해야 한다는 의지력이 대단했다.” 

강을준 해설위원은 “선수들을 가르치다 보면 지도자를 잘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선수가 있는데, 이시준이 지도자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며 “선배를 잘 따르고, 후배를 또 잘 이끈다. 김봉수가 얼마나 덩치가 큰가? 그런 후배들이 아무 말 없이 이시준을 따랐다. 후배가 따를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해서 우승도 가능했다”고 이시준의 지도자로서의 자질도 높이 샀다. 

이시준은 2005년 종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뒤 한 달간 주어진 휴가 동안 제주도에서 자전거 일주 여행을 했다. 그 이후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여행에 푹 빠져 지냈다. 해외 전지훈련을 가면 숙소에만 머무는 일부 선수들과 달리 여러 곳곳을 돌아다녔다. 지난해 9월 삼성이 싱가포르로 전지훈련을 갔을 때 이시준이 후배들을 이끌고 유명 관광지로 안내했다. 

이시준은 은퇴를 결정한 뒤 친동생이 카페(KONG.03)를 운영하고 있는 제주도에 머물며 여행을 다니다 지인의 소개로 6월부터 농구강사를 시작했다. 서귀포시에 있는 대신중학교에서 월요일과 수요일에 2시간씩 일반 중학생들을 가르친다. 

이시준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차원이 다르게 재미있게 가르쳐준다”, “슛이나 세세한 내용을 자세하게 알려줘서 좋다”고 만족했다. 

수업을 마친 이시준과 마주앉아 그의 농구 인생을 들었다. 

농구를 어떻게 시작하신 건가요?
김해 동광초등학교에서 소년체전에서 우승한 뒤 농구캠프 같은 걸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와 축구를 좋아하는데 담임선생님께서 한 번 가보라고 하셨다. 키가 되게 작았는데, 코치님께서 빠르고 운동신경이 좋다며 방학 끝난 뒤 학교로 찾아오셨다. 그래서 (동광초로) 전학을 가서 농구를 시작했다. 

3학년, 4학년 때 시작하는 선수들에 비하면 조금 늦었네요.
맞다. 조금 늦은 5학년 말미부터 시작한 거다. 우리 팀이 전국에서 굉장히 잘하는, 전지훈련 다니면 다 이겼다. 그 전에도 우승하고, 우리까지도 우승을 했다. 우리 한 해 위도 그렇고, 우리도 키 큰 애가 많은데다 코치님께서 잘 가르쳐서 성적이 났다. 그러다 보니 (임호)중학교에서 개교와 함께 농구부를 창단했다. 그 전까지는 중학교부터 (김해에서) 마산으로 넘어갔다. 한 학년 위 형들부터 잘 해서 창단하고, 중학교도 잘 하니까 (김해 가야)고등학교까지 창단했다. 

김해가야고 농구부가 생긴지 얼마 안 되었네요? 
김해가야고 5회 졸업생이고, 임호중 2회 졸업생이다. 농구부가 학교 역사와 같이 가는 거다. 가야고와 임호중의 개교한 시기는 같다. (김해 가야고) 농구부는 한 해 위 형들이 입학하면서, 농구부 창단도 하기 전에 먼저 (김해 가야고에) 진학하고, 우리 학년이 같이 진학하는 조건으로 농구부가 창단한 거다. 가야고에서 농구부로는 2회 졸업생이다. 오리온 윤지광 스카우트가 초중고대까지 직속 선배다(웃음). 

예전 기사를 찾아보니까 고교 시절 발목을 다쳤는데도 진통제를 맞고 경기에 나섰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마산 고등학교와의 전국체전 평가전이었다. 고등학교에선 1년 중 가장 중요한 경기다. 그 경기를 준비하며 협회장기 대회에 나갔는데 우연찮게 마산고와 같은 조가 되었다. 삼일상고까지 한 조였는데 삼일상고는 양희종, 하승진 등이 있어서 우승후보였다. 예선에서 마산고에게 지지 말자고 했는데, 결국 졌다. 삼일상고와 예선 마지막 경기를 하는데 그 때 우리 팀 선수가 6명이었다. 
삼일상고와 경기 끝나기 5분여 전까지 앞서고 있었다. 그 날 공격을 너무 많이 해서 체력이 바닥났다. 오죽했으면 수비할 때 코치님께서 지역방어의 한 구석에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서 있으라고 하실 정도였다. 있는 체력을 다 쏟았다. 마산고에게 졌기에 삼일상고에게 이겨서 결선 토너먼트에 올라가고 싶었다. 우승후보 삼일상고에게 이기면 평가전할 때 마산고를 이길 수 있을 거 같았다. 
이기고 있었고, 타이밍도 좋았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4분, 5분 가량 남았을 때 48점째 득점을 하고 내려오다가 상대 선수 발을 밟았다. 발이 꺾여서 탈골 비슷하게 되었다. 앰블런스에 실려서 바로 병원에 가서 발목을 맞췄다. 내가 다치고 나간 다음에 또 한 명이 5반칙 퇴장 당해서 4명에서 뛰어 결국 졌다. 학교에서 “평가전을 준비해야 하는데 왜 그 대회에 나가서 평가전을 힘들게 만드냐?”며 난리가 났다.
평가전까지 한 달 남았는데 내가 안 뛰면 5명에서 치러야 한다. 안영신 코치님도 마음에 부담도 있었는데 “치료에만 최대한 전념 해라”고 하셨다. 오전에는 침 맞고, 오후에는 물리치료 받고, 저녁에는 사우나를 갔다. 멍이 무릎까지 있는데 빨리 딛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무식했죠? 재활을 안 하고, 저녁에 온탕에서 계속 딛는 연습을 했다. 젊어서 그런지 몰라도 팅팅 부어있고, 멍이 들어 있어도 차근차근 연습하니까 디뎌졌다. 조금 디뎌지기 시작할 때 코치님께 말씀도 안 드리고 밤에 연지 공원에 나가서 뛰었다. 최대한 뛸 수 있게 만들려고 했다. 평가전이 다가올 때 서서 슈팅 연습만 했다. 
경기 당일에 디딜 수 있으니까 경기에 뛰겠다고 말씀 드렸다. 안에 테이핑을 하고, 양말을 신은 뒤 붕대로 다시 감았다. 발에 붓기가 안 빠진데다 붕대까지 감아서 농구화에 발이 안 들어갔다. 농구화 양쪽을 가위로 찢어서 발을 넣은 다음에 끈을 묶었다. 그 당시 대포라고 진통제도 맞았다. 무식했다. 경기 전에 몸은 아예 안 풀었고 벤치에서 대기만 하다가 흐름이 안 좋을 때 출전했다. 깽깽이라고 하죠? 왼발로 두 발 뛰고 아픈 오른발을 한 번 뛰는 식으로 뛰어다녔다. 
그 전에 노력한 게 있어서 사이드 스텝이 조금 되었다. 수비에선 지역방어라서 많이 움직이지 않았다. 경기에 못 뛴다고 소문이 났는데 슛 훼이크만 해도 (상대 수비가) 붕붕 날아갔다. 그렇게 플레이를 하며 앞서고 있을 때 경기 종료 3~4분을 남겨놓고 마취가 풀렸다. 우리가 이기고 있으니까 (마산고에서) 파울 작전을 해서 시간이 늘어지는데 너무 아팠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며 입술을 깨물어서 입술 주위가 다 터졌다. 경기 끝나자마자 쓰러져서 또 병원에 실려갔다. 그리곤 바로 깁스를 했다(웃음). 무식하게 했었다. 

그렇게 뛰었는데도 다리가 탈이 나지 않은 게 다행이네요.
그러게요. 체중이 가벼워서 그런 듯 하다. 코치님은 다리가 저 지경인 선수를 뛰게 했다며 주위로부터 엄청 욕을 먹었다. 졌으면 더 큰일 났을 거다. 이겨서 다행이었다(웃음). 그 경기를 이겨서 한 시름 덜고 한 달 뒤에 (1차전 때 부상 정도와 비교할 때) 깽깽이보단 더 나아서 2차전도 이겼다. 전국체전에 나가서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그때부터 근성이 대단했네요. 
아픈 건 참을 수 있었는데 지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선수가 6명 밖에 없어도 분명 이길 수 있는 팀이라고 생각하고, 전국체전에 나가야 한다는 압박도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마산과 다 라이벌이다. 마산에 져서 전국체전에 못 나가는 건 생각도 하기 싫었다. 마산고에 지면 열 받아서 방에서 시름시름 앓았다. 아픈 게 아니면 죽기살기로 했다. 어리니까 가능했는데, 몸을 너무 망가뜨린 것도 있다. 재활이란 개념이 없을 때였다. 정신력이라는 용어로 무식하게 농구를 했다. 

10년 동안 프로 선수 생활을 한 게 다행입니다. 
부모님께서 마음 고생이 심하셨다. 뼈에 좋다는 홍아씨를 바르고 먹었다. 집에 와선 아파서 다 죽어가고, 또 경기장에 가면 열심히 뛰어다니니까 부모님 마음이 안 좋으셨다. 결혼한 뒤에는 와이프가 또 마음 고생을 한다. 

권유 받아서 농구를 시작했는데요. 되돌아보면 그렇게 농구 선수를 한 게 잘 했다는 생각이 드나요?
어릴 때 원래 좋아한 건 야구와 축구다. 특히 야구를 좋아해서 사직야구장에도 자주 갔었다. 그 때 김해에 야구부가 없었다. 운동을 워낙 좋아해서 생각지도 않은 농구를 했다. 그래도 그 때 상황으로 돌아가면 그대로 농구를 했을 거다. 

농구 선수로서 작지만, 야구를 했다면 작은 편도 아니고 발도 빨라서 더 맞지 않았을까요? 
지금도 야구를 엄청 좋아한다. 사회인 야구를 하고 싶다(웃음). 지금도 농구보다 야구나 메이저리그 보는 걸 더 좋아한다. 하는 것도 좋아한다. 상무에 있을 때 야구 좋아하는 (양)동근이 형 등 형들이 있었다. 휴식일에 장비를 빌려서 야구도 했었다. 

‘악으로 깡으로’ 이시준, 농구인생 돌아보기!②에서 계속 됩니다. 

사진_ 이재범 기자, KBL 제공 

이재범 1prettyjo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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