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으로 깡으로' 이시준, 농구인생 돌아보기!②

이재범 입력 2017. 6. 28.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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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켓코리아 = 이재범 기자] “굉장한 독종” “깡다구” 지난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이시준을 가장 잘 표현한 수식어다. 팬들도 이시준 하면 근성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조금은 아쉽게 은퇴한 이시준을 지난 19일 제주도 서귀포시에 있는 대신중학교에서 만났다. 
(‘악으로 깡으로’ 이시준, 농구인생 돌아보기!①에서 이어집니다.)

대학(명지대) 진학 후 슬럼프가 있었다고 하던데요. 고등학교에서 공격의 중심에 섰는데, 대학에선 그렇지 않은 차이에서 겪은 슬럼프라고 알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공격을 도맡아서 하다가 대학을 갔다. 일단 너무 추웠다. 내가 살던 곳과 너무 달랐다. 지금도 명지대 용인캠퍼스 체육관이 춥기로 소문났다. 운동 시작하기 전에 물을 떠 놓으면 운동 끝났을 때 얼어 있다. 아~ 농구대잔치를 위해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10월에 올라갔다. 농구대잔치 준비하며 고등학교와 연습경기를 하는데 너무 추워서 뛰는 것도, 드리블조차 안 되었다. 농구 초보로 돌아간 줄 알았다. 그러니까 자신감도 떨어졌다. 
강을준 감독님께서 기대를 하고 뽑으셨는데 생각만큼 안 되니까 적응하는데 시간이 길었다. 내 동기가 9명이었다. 첫 날 새벽 운동 할 때 4명이 도망가고, 1학년 끝날 때 다 힘들어서 도망가고 혼자 남았다. 나는 한 번도 도망간 적은 없었다. 아무리 안 되어도 딱 1학년 끝날 때까지만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만두자고 여겼다. 
계속 안 되다가 1학년 10월인가 대학연맹전에서 4학년 주전 가드 형이 독감에 심하게 걸렸다. 나도 그 때 장염에 걸렸는데 말도 못 하고 있었다. 그 형이 경기 당일에 못 뛴다고 했다. 나도 ‘장염인데 어떻게 하지? 큰일이다’ 여겼다. 그런데 그 경기부터 20여점 넣으면서 잘 했다. 그 경기 끝나고 탈진해서 병원에서 링거 맞고 또 다음에 경기 뛰고 탈진 되어서 링거 맞는 걸 반복했다. 
그 때 이후로 아파도 못 쉰다. 쉬면 내가 만들어놓은 게 없어지는 거 같아서 웬만하면 참고 뛰었다. 그럼 강을준 감독님께서 화내시며 억지로 쉬게 하셨다. 그 이후 농구대잔치까지 잘 해서 2학년 때 대학 선발에도 뽑히며 잘 풀렸다. 이상하게 타이밍이 아파야 잘 했다(웃음). 

플레이 스타일은 어릴 때부터 스피드를 바탕으로 한 농구가 이어진 건가요?
그건 기본인데 빠른 스타일로 농구를 한 건 대학 때부터다. 중고등학교 때는 코치님께서 힘들게 넣는 것보다 예쁘게 하는 농구를 좋아하셨다. 속공 때 “힘들게 왜 2점 넣냐, 멈춰서 3점 쏘라”고 하셨다. 지금 골든 스테이트 같은 농구를 너무 이른 시기에 가르쳤다. 전자랜드 박성진도 고등학교 때 그게 트레이드 마크였다. 40점, 50점 넣을 때 속공에서 백보드 3점슛으로 고득점을 올렸다. 우리 때부터 그랬다. 우리는 힘들게 큰 선수들 앞에서 레이업을 던지지 않고 그냥 슛으로 편안하게 농구를 했다. 대학 가서 강을준 감독님께서 터프한 농구를 원하셔서 수비도 터프하게 하고, 돌파도 그 때 많이 했었다. 

대학 시절을 돌아보면 가장 기억나는 순간이 명지대 농구부 창단 38년 만에 첫 우승이었던 2005년 종별선수권 우승했을 때인가요? 
그 때 우승했을 때도 좋았는데, 아직 기억에 남는 건 MBC배다. 1학년 때 거의 이기는 경기가 없었다. 2학년 때 MBC배에서 우리가 고려대에게 이겼다. 락커룸에서 강을준 감독님께서 우시더라. 나도 그 때 양쪽 다리에 쥐가 날 정도로 뛰었다. 이기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수준이 높은 학교를 이기니까 성취감이 배가 되었다. 그 때 나도, 동료들도 자신감이 생겨서 만년 하위권이 아니라 그 때부터 중상위권으로 치고 갈 정도로 좋아졌다. 연고대를 만나도 쉽게 안 졌다. 

국내선수 드래프트에서 6순위에 뽑혔는데요. 생각보다 빨리 뽑혔다고 생각하는지, 아님 조금 늦었다고 여기는지, 아님 삼성에 뽑혔기에 만족스런 순위였나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드래프트 때 1라운드에 간다고 주위에서 말씀을 해주셨다. 그런 자신이 없었다. 뭐라고 할까? 주위에서 어디 가고 싶냐고 물어보는데 나는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거라면 아예 마음조차 안 준다. 불러주면 감사하게 당연히 가는 거다. (드래프트에서) 한 명씩 불릴 때 삼성에 뽑힐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프로팀과 연습 경기할 때 기본을 했는데, 삼성과의 경기에선 다치고 부진했다. 안준호 감독님께서 6순위로 단상에 올라가셨을 때 삼성은 아닐 거라고 여기며 옆에 친구와 이야기를 하는데 내 이름이 불려서 얼떨떨했다. 
그 때 삼성 출신이신 강을준 감독님과 박상관 코치님께서 제자가 오랜만에 1라운드(2002년 10순위 박영민 이후 3년 만)에 뽑혀 좋아하셨다. 삼성이란 좋은 팀에 가서 기뻤는데 주위에서 걱정하시는 분도 꽤 계셨다. 그 당시 (삼성) 선수들이 워낙 좋고, (이)규섭이 형 이후로 신인 선수가 많이 살아남지 못했다. 나는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했다. 일단 어디선가 열심히 하면 기회가 온다고 여겼다. 우연찮게 (2006 도하) 아시안게임으로 기회가 찾아왔을 때 타이밍이 잘 맞아서 출전 기회를 또 많이 얻었다. 

그 아시안게임 때 쓰리가드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나왔잖아요? 
지금도 (강)혁이 형과 (이)정석이 형을 자주 만나서 커피 마시며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 때 제일 재미있게 농구를 한 거 같다. 내가 앞에서 압박으로 (상대를) 조금 힘들게 만들면 뒤에서 형들이 다 스틸 하고, 앞에서 빨리 뛰기만 하면 형들이 패스를 잘 넘겨줬다. 네이트 존슨과 올루미데 오예데지도 분업화가 잘 되어 있었다. 그래서 신나게 농구를 했다. 나는 이것저것 신경을 쓸 겨를이 없는 신인이라서 열심히 하면 형들이 워낙 잘 해서 힘든 줄 모르고 뛰어다녔다. 성적도 좋아서 정말 재미있게 농구를 했다. 

그 때 국가대표들이 돌아와서 오히려 성적이 안 좋았습니다. 
그 때 (서)장훈이 형과 (이)규섭이 형이 돌아온 뒤 그 타이밍에 뛰던 형들이 아픈 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장훈이 형이나 규섭이 형이 농담으로 “우리 돌아오니까 일부러 그러냐”고 하기도 했다(웃음). 그런 건 아니고 팀이 시즌을 치르다 보면 사이클을 타서 잘 될 때가 있고, 안 될 때가 있다. 그 타이밍에 합류를 해서 그렇게 비쳐졌던 거 같다. 

지난 시즌 개막 전에 싱가포르 전지훈련에서 더블더블(vs. 웨이트포츠 말레이시아 드래곤즈, 25분 13초 출전 17점 11리바운드)을 기록했습니다. 기회만 주어지면 체력에서는 자신있다는 말씀도 하셨는데 돌아보면 출전 기회를 못 받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기회를 받을 수 있는 믿음을 주는 것도 그 선수의 실력이고, 몫이다. 그만큼 믿음을 못 드렸고, 우리 팀의 선수구성이 워낙 좋았다. 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거지, 시간을 보장 못 받았다는 건 좋은 핑계거리다. 누가 봐도 이 상황에선 이 선수가 들어가야 한다는 믿음을 줬다면 기회를 받았을 건데 내 노력도 부족했고, 실력도 부족했다. 

데뷔할 때 3점슛 성공률(45.3%, 53/117)이 좋았는데요. 조금 기복을 보이다가 2014~2015시즌에 가장 많은 3점슛을 시도(57/198)했는데 성공률(29.4%)이 저조했습니다. 그 때가 많이 뛰었던 마지막 시즌(평균 24분 18초)이라서 3점슛 성공률이 더 좋았다면 어땠을까 싶더라고요.
항상 형들에게 듣던 이야기가 성공률 관리를 잘 해야 한다(였다). 나는 시간 다 되거나 무리하게 던진 슛이 많다. 선수가 자기 욕심을 챙기려고 안 던질 수도 있지만, 그걸 던져서 림이라도 맞아서 리바운드를 잡으면 공격 기회가 다시 생긴다. 신인 때는 내가 그럴 위치가 아니라서 좋은 슛 기회마다 던져서 성공률이 좋았다. 나중에 가서는 경기 출전시간이 많아지면서 시간이 다 되거나 무리하게 던지는 슛이 늘었다. 그런 걸 내가 관리하는 편이 아니라서 들어가면 좋은 거고, 안 들어가도 우리가 리바운드를 잡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3점슛 성공률 관리가 안 좋은 편이기도 했다. 2014~2015시즌은 발목 탈골 부상을 당한 다음 시즌이었는데 심리적으로 불안했을 때다. 트라우마가 오래갔다. 가만히 누워있어도 발목이 빠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비시즌 때 노력해서 괜찮다고 여겼는데 시즌에 들어가니까 그 기분이 다시 느껴져서 경기 중 전반전이 끝난 뒤 오바이트를 한 적도 있다. 슛을 편안하게 던지면 되는데 밑에 발이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어서 그걸 신경을 썼다. 이것도 어찌 보면 핑계다. 그런 트라우마를 못 이겨냈다. 조금씩 좋아진 게 최근 두 시즌이다. 운동신경이 없어지지 않았는데 발목 탈골 부상 후 심리적으로 위축되었다. 

어릴 때 이름이 이시준이었고,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 이원수였는데 집에선 두 개를 모두 썼나요?
원래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 이시준이라서 집에서만 불렀다. 집에서는 이렇게도 부르고, 저렇게도 불렀다. 아들이 태어나며 이름의 억양이 좋지 않아서 바꿨다. 

잠이 많은 선수라고 하던데요. 은퇴 이후 잠을 실컷 주무시나요? 아니면 오히려 덜 자는 편인가요?
작년, 재작년부터 예전만큼 잠을 못 잔다. 여려가지 생각이 많아서인지, 나이가 들어서인지(웃음). 아침에 눈도 잘 떠졌다. 어릴 때는 힘들게 운동해서 틈만 나면 잤다. 다른 스트레스를 푸는 게 없다.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밖에 놀러 다니지 않아서 잠을 많이 잤다. 활동을 많이 할 때는 여행으로 많이 풀었다. 와이프와 아이랑 같이 있으면 또 스트레스가 풀린다. 

여행은 언제부터 다니기 시작한 건가요?
대학 다닐 때 제주도에 혼자 여행한 뒤 꾸준하게 다녔다. 한 번 시작이 어렵다. 여기 가봤으니까 저기도 가보고 싶고, 많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가 생겼을 때 와이프도 적극적으로 많은 세상을 보고 이야기를 잘 해주는 아빠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해줘서 그래서 여기저기 많이 다녔다. 

해외에 나가면 국내와 또 다른데 어디부터 다니기 시작했나요? 
그냥 가까이 필리핀 같은 곳을 많이 다니고, 혼자서 배낭여행으로 길게 간 건 유럽이었다. 그 다음부터 가족들과 다니고. 유럽은 한 번 다녀와서 가족과 같이 가고, 미국, 멕시코도 다녀왔다. 아이가 비행기 타는 걸 좋아해서 시즌 끝난 뒤 여행가는 낙으로 살았다. 시즌 동안 같이 많이 있어주지 못하니까 가족들에게 미안함을 그런 걸로 보답하려고 했다. 

여행에서 무엇을 얻었나요?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 나는 항상 우물 안 개구리다. 항상 생활하는 사람하고만 만나고, 그 분야에 관련된 사람만 만나는데 여행을 가서 이런 사람도 만나고, 저런 사람을 만나서, 이런 세상에선 이렇게 살고 있고, 저런 세상에선 저렇게 살고 있고, 대화를 하면서 정말 갇혀서 살았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일부러 호텔이 아니라 한인 민박이나 호스텔을 찾아 다니면서 여행을 했다. 이 사람, 저 사람과 이야기하고, 외국인들과도 번역기를 이용해서 이야기하면 생각도 트이고 발상의 전환도 된다. 일부 친해진 사람들과는 아직도 연락하며 지낸다. 그게 안타깝다. 젊은 선수들은 농구 선수들하고만 친하고 그 분야에서만 생활을 하니까 나중에 닫혀있고, 좁은 생각을 할 수 있다. 여행을 안 가더라도 대인 관계를 활발하게 하면 좋은 거 같다. 

은퇴 직후 뭘 할지 고민을 한다고 하셨는데, 생각을 좀 정리하셨나요?
(공식적으로 은퇴한지) 3주 정도 지났다. 제주도에 내려와서 이렇게 하는 것도 (와이프가) 그 동안 고생했으니까 일주일에 3일 정도 혼자서 생각 정리도 하고, 바람도 쐬라고 배려를 해줘서 가능하다. 일단 7월 10일에 전문지도자자격증 신청을 했다. 아직은 생각을 많이 해봐야 한다. 목표가 정해진 건 아니라서 두루 생각을 할 거다. 급할 필요가 없다. 급하면 마음이 조급하니까 여유있게 생각을 할 거다. 

농구강사를 하시는 것도 농구와 관련된 일을 할 수 있다면 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죠?
이걸 하면서 생각을 해보는 것도 있다. 애들을 가르칠 자격이 있는지, 적성이 맞는지 시험한다. 엘리트 선수들과 차이가 있는데 재미있다. 언제 아이들에게 선생님 소리를 들어보겠나? 거의 다 모르지만, 서울에 살다가 내려온 학생들도 조금 있어서 서울 (삼성) 홈 경기를 보러 와서 나를 아는 학생도 있다. 인연이라면 인연이고, 신기하기도 하다.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기보다 같이 즐기면서 논다. 그렇게 하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말도 잘 들어주고 잘 따른다. 그런 것에서 보람도 느낀다. 

사진_ 이재범 기자, KBL 제공 

이재범 1prettyjo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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