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0년’의 긴 호흡
대학 시절 한겨레신문의 한겨레 그림판은 좀 특별했다. 민중들의 목소리가 대부분의 언론에 막혀 있던 시대에 한 컷으로 세상을 풍자해 끝없이 복사되고 인용되어 대자보와 유인물로 재생산되었다. 그런데 그 그림판을 그리던 만화가가 신문사를 접고 조선왕조실록을 그려보기로 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고 지금도 없는 국가 전반에 대한 거대한 기록의 산물이다. 하루 한 컷을 그리던 만화가가 1800권이 넘는 분량의 470년간 쓰인 기록물에 도전한다는 용기가 놀라웠다. 그리고 만화가는 회사를 그만둔 지 13년, 첫 편이 나온 뒤 8년 만에 20권의 조선왕조실록을 완성한다.
이 책은 만화책이지만 철저하게 실록에 있는 내용, 즉 정사(正史)를 근거로 한다. 간혹 야사를 인용하거나 추측한 부분은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물론 만화이기 때문에 인물의 모습과 표정, 그리고 대화는 만화가의 상상력의 영역이다. 덕분에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고 현재의 정치 상황에 빗대어서 설명하는 재미를 주기도 한다. 세종실록은 어떤 활극보다 재밌고 태조, 태종실록은 반대파를 제거하는 잔인함에 놀라기도 한다. 선조실록은 보다가 열불이 나서 읽다가 몇 번을 중단하기도 했다. 예송논쟁과 같은 당파들의 논쟁을 이해하려면 약간의 인내심도 필요하다.
이 책이 나오는 8년 동안 언제나 그렇듯 한국 사회는 드라마틱하게 변화했지만 나는 한결같이 새 책이 언제 나오는지 회사 앞 서점을 들락거렸다. 사람들이 많은 콘텐츠를 소비하고 그만큼 빨리 버려지는 이때, 누군가 긴 호흡을 갖고 오랜 시간 작업하는 모습은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다. 그래서 혹시 내가 지금 하는 프로그램도 한 20년 넘게 장수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잠시나마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