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 & Strategy 9] 조르조 바사리의 전쟁화 | 전쟁에선 절체절명의 위기가 곧 기회 기업도 패배에 대한 두려움 떨쳐내야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2017. 6. 27.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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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피렌체 베키오 궁전에 있는 조르조 바사리의 그림 ‘마르시아노 전투’. <사진 : 위키피디아>

이탈리아 중부 도시 피렌체에 있는 베키오는 메디치 가문의 궁전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미켈란젤로의 대표작 다비드가 사찰의 입구를 지키는 금강역사처럼 베키오의 현관 왼쪽에 서 있다.

한때 피렌체는 메디치가를 축출하고 공화정을 시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베키오는 시청사로 사용됐다. 이때 궁전 안에 있는 가장 넓은 홀은 친퀘첸토(Cinquecento·500인의 방)라고 불리는 시의회 집무실이 됐다. 1505년쯤 시의회는 피렌체가 낳은 가장 걸출한 예술가 2명에게 친퀘첸토의 양쪽 벽을 장식할 거대한 벽화를 그려달라고 했다. 소재는 장대한 전쟁이였다. 피렌체는 피사, 시에나 같은 주변 도시와 전쟁을 거듭하며 성장했고 때로는 강국인 로마, 밀라노와 싸웠다. 그 영광의 전투를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하나씩 맡아서 그려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승리와 패배의 극적인 순간 그려낸 바사리

1986년 독일인 칼 벤츠가 만든 최초의 자동차 ‘페이턴트 모터바겐’.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마차 산업은 종말을 맞았다. <사진 :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

이 벽화가 완성됐다면 지금 피렌체의 관광 수입은 2배 이상 늘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이 벽화를 미완성으로 남겼다. 피렌체를 탈환한 메디치가는 새로운 벽화를 그려 이 미완성품을 덮게 했다. 새 벽화는 조르조 바사리의 작품으로 피렌체의 오랜 숙적이었던 피사와의 전투를 그린 것이다.

바사리의 작품을 찬찬히 살펴보면 격렬한 전쟁 장면 중에 에피소드라 불릴 만한 장면들이 묘사돼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장면들은 작가의 상상일까? 르네상스 이후의 유명한 전쟁화를 보면 단순히 상상의 장면은 아니다. 작가들은 전쟁 기록이나 공훈록을 참고하거나, 참전자들의 회고를 듣고 인상 깊은 장면을 작품에 반영하곤 했다.

바사리가 묘사한 에피소드 중에 이런 장면이 있다. 한 병사가 적군 위에 올라타 칼을 높이 들어 얼굴을 내리 찍으려고 한다. 영락없이 그가 승리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작품을 자세히 보면 아래에 깔린 병사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당황하지 않고 자기 검으로 자신을 올라탄 병사의 옆구리를 겨누고 있다. 이 이야기를 화가에게 전해준 사람은 분명 아래쪽에 있던 병사였을 것이다. 위의 병사는 상대를 땅에 쓰러트리고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는 기쁨에 너무 동작을 크게 한 것이 실수였다. 냉정했던 상대는 적군이 방심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천성이 대범한 사람이라도 이런 찰나의 냉정함과 판단력이 저절로 튀어나올 수는 없다. 그 병사는 수많은 전투를 겪었거나 싸움을 경험하면서 위기의 순간이 기회이고, 이겼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최대의 위기라는 사실을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재밌는 사실은 친퀘첸토의 전시를 설계한 사람이 벽화 중 이 장면을 최대의 포인트이며,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전쟁의 역사가 전해줄 수 있는 최고의 교훈으로 선정했다는 것이다. 그 증거는 벽화의 아래쪽에 죽 늘어서 있는 조각들이다.

그중 하나를 보면 두 사람이 격투를 벌이고 있는데, 한 명이 상대를 들어 메다꽂으려 하고 있다. 1초 후면 상대는 목이 부러질 것이다. 하지만 조각을 자세히 보면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있는 상대는 그 순간에 손을 뻗어 상대의 급소를 움켜잡고 있다. 이 조각의 승자는 누구일까.

위기 이후 변화된 세상 예상해야

“위기가 기회이다.” 우리는 이런 말을 너무 자주 들어서 이젠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이것은 완벽한 진리다. 소총이 발명된 후에 전투의 금언이 된 말이 있다. “적군의 눈동자가 보일 때 사격하라”다. 최초 화승총의 유효사거리는 25m였다. 오늘날의 소총은 유효사거리가 그 10배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한국전쟁 때 미군은 전투가 끝나면 적군의 시신을 검사하면서 적이 어디까지 근접했을 때 최초의 발사가 이뤄졌는지를 측정하곤 했다. 거리가 가까울수록 자랑스러운 기록으로 삼았다. 적군의 눈동자가 보이는 순간은 화승총의 유효사거리를 떠나 아군에게는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이다. 25m면 적군이 숨을 한 번만 몰아쉬면 한달음에 달려서 아군 진영으로 돌입할 수 있는 거리다. 한국전쟁에서 이 거리는 새로운 위협을 첨가했다. 한국전의 상징이 된 고지전에서 중공군은 25~30m 정도 거리를 최후 돌격선으로 잡고, 먼저 엄청난 수의 수류탄을 투척한 뒤에 인해전술식의 돌격을 감행했다. 참전용사들의 회고를 보면 인해전술보다 하늘을 새까맣게 덮은 수류탄에 더 공포를 느꼈던 병사들이 꽤 있는 것 같다. 그것에 놀라 참호를 이탈하면 아군의 패배다. 반대로 수류탄을 피하고 공중에서 쳐 내고 집어 던지고, 중공군의 육탄공격에 맞서면 중공군에게는 대량살상의 순간이기도 하다. 너무나 많은 병사들이 초근거리에서 밀집해 달려드는 통에 한 발에 2, 3명이 쓰러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위기가 기회라는 말이 진부하게 느껴진다면 우리가 이 말을 귀로만 듣고, 심정적인 위안으로만 삼았을 뿐 위기의 본질을 분석하고 위기와 마주쳐서 극복하는 훈련은 부족했기 때문이다. 위기가 기회인 데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보통의 위기는 변혁기에 발생한다. 근대 이후 사회의 변혁을 초래하는 요인은 기술이다.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마차 산업은 종말을 맞았다. 말은 수천 년간 짊어지던 멍에를 벗었지만, 경마장의 말들만 남기고 아예 사라져 버렸다. 마차와 목장 종사자들, 마구 제작자들은 경악했지만, 혜안이 있던 사람들은 1920년대 자동차가 대량생산되기 시작하자마자 교외로 달려 나가 부동산을 사들였다. 놀랍게도 이 소수의 선각자들은 자동차가 가져다 줄 변화를 정확하게 예측했다. 자동차로 이동이 쉬워지고, 이동거리가 늘어나면서 도심이 확장되고 교외 지역의 활용도가 높아진 것이다. 더 빠른 사람들은 쇼핑과 레저문화에 혁신이 도래할 것이라고 판단했는데, 그 역시 정확했다. 교외 지역에서도 땅값이 가장 가파르게 상승한 곳은 대형마켓이나 레저센터가 들어서는 곳이었다.

왜 이런 것이 쉽게 보이지 않을까.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집착과 미지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것은 적군의 눈동자와 똑같다. 그것을 대담하게 응시하고 대응하는 사람, 적의 미세한 움직임, 심지어는 나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까지도 위기가 최고의 기회라는 신념을 가지고 대담하고 정확하게 응시할 수 있는 사람만이 위기를 승리의 기회로 만들 수 있다.

▒ 임용한
경희대 대학원 사학 박사, 경희대·공군사관학교 한국사·군제사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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