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의 자유 vs 국가안보 위협..'금서'(禁書)논란 마침표 찍을까

이창수 기자 2017. 6. 25. 22:1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017 금서 파동 / 檢, '노동자의 책' 사이트 운영자 징역 2년 구형 / 2000년대 주기적으로 불거진 '금서(禁書)파동'/"자본주의 분쇄""노동혁명" 어디까지 허용해야하나 / 진보진영, 법원판단에 주목 "향후 수사·재판 가늠좌"

“시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북한의 위협은 실재합니다. 국가안보에 있어서는 한치의 빈틈도 허용해선 안 됩니다. 종북급진세력들은 지금도 체제 혁명을 선전·선동하는 등 북한의 대남혁명전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검사)

“시대는 변했습니다. 사상의 자유는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영국에 망명한 마르크스는 단 한번도 법정에 서지 않았지만, 레닌은 러시아 짜르 체제에서 이리저리 망명해야만 했습니다. 이 법정은 영국과 러시아, 어느 곳이 될 것입니까?”(변호사)

지난 22일 서울남부지법 406호 대법정. 재판부를 앞에 둔 검사와 변호사의 최후변론은 치열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 사회주의 서적과 북한과 관련한 ‘불온서적’을 다수 소지·반포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구속기소된 ‘노동자의 책’ 이진영(50)대표의 결심 공판이었다. 이날 역시 “사상의 자유”와 “국가안보 위협”이란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했고, 검찰은 이 대표에게 불온서적 37권의 몰수와 함께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을 구형했다.
노동자의 책 사이트.


특히 이번 재판에 이목이 쏠리는 것은 주기적으로 논란이 불거진 ‘금서(禁書)논란’의 종지부가 될 수 있어서다. 이 대표는 2009년부터 ‘노동자의 책’이란 전자도서관을 운영하며 1970∼90년대 노동·사회주의와 관련한 서적 3000권가량을 수집해 PDF파일로 만들어 제공했는데, 목록에는 그동안 법원에서 국보법 위반 판결을 내린 다수의 책이 포함돼 있다. 쉽게 말해 이런 책들을 모으고 판매까지 한 이 대표는 금서와 관련한 ‘끝판왕’급이란 얘기다.

이에 이 대표에 대한 법원의 판단에 따라 향후 금서(이적표현물)와 관련한 국보법 사건의 수사방향도 큰 폭으로 변할 수 있다는 전망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또 북한이란 모순적인 존재를 곁에 둔 우리사회가 어느 정도로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허용할 수 있는지 가늠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평가다.

◆2000년대 이후 벌써 4번째…‘도서 블랙리스트’

사실 대중에게 ‘금서논란’은 낯설지만은 않다. 2000년대 들어 ‘주기적’이라고 말 할 수 있을 만큼 금서논란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 군이나 검찰 등 기관이 과거 군부정권의 엄혹한 잣대를 들이밀며 20∼30년 전 서적들을 금서로 지목해 관리한 것이 드러나면서 제기됐다.

2001년 ‘인권운동사랑방’의 정보공개청구로 공개된 검찰내부 자료인 ‘판례에 나타난 이적표현물’(1996) 1220여권 목록에는 교양서나 학술서적으로 널리 읽히는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이 포함돼 논란이 일었다.

김산의 아리랑이나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 소설도 다수 포함돼 있었는데, 당시 전국의 교소도 및 구치소에서는 이 리스트를 근거로 관련 서적 반입을 불허했다. 논란이 커지자 그해 법무부는 전국 교도소 및 구치소에 해당 목록을 폐기하라는 공문을 내렸다.

2008년에는 국방부의 ‘불온서적 차단대책 강구 지시’ 문건이 드러났다. ‘북한 찬양’과 ‘반정부·반미’, ‘반자본주의’ 세 분야로 나눠 불온서적 23종을 선정한 것이었다. 이 리스트에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장하준 캠브리지대 교수(경제학)의 ‘나쁜 사마리아인’, 놈 촘스키의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등이 포함됐다.


하지만 같은 해 대한민국 학술원이 ‘우수학술도서’로 꼽은 나쁜 사마리아인은 금서로 지정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오히려 베스트셀러가 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2011년 공군전투비행단에서 장하준 교수의 ‘국가의 역할’(2006)과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달려라 냇물아’(2007), 세계문학상 수상작인 ‘슬롯’(2007) 등 19권을 금서목록에 추가한 것이 알려져 논란이 재점화됐다.

지난 1월에는 검찰이 이 대표를 구속하면서 법원에 제출한 금서 목록이 공개돼 파문이 일었다. 세계일보가 입수해 보도한 130권의 ‘불온서적’ 중 88권이 국회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었고, 관련 논문이 수십개에 이르거나 온라인에서 웃돈까지 얹어 거래되고 있는 서적이 다수 포함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에 공개된 리스트에는 레닌의 서적과 이름만 같은 엉뚱한 책이 포함돼 있는가 하면, 마르크스나 니코스 풀란차스, 파울로 프레이리 등 세계적인 석학의 서적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검찰은 소련의 여류 정치가이자 레닌의 부인인 크루프스카야의 ‘레닌의 추억’(1986)과 E·H 카의 ‘러시아혁명’(1986)에 대해 “사회주의 혁명을 부각한다”, “운동권 학생들에게 좌경적 혁명 방법을 익히려는 목적으로 악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마르크스의 ‘철학의 빈곤’(1988), ‘독일이데올로기’(1989)는 “자본주의 멸망의 필연성을 논증”, “미래공산주의 혁명에 대해 설명한 내용”이라고 규정했다.

◆‘이적’(利敵, 적을 이롭게 한다)표현물…“판단 기준 애매해 골치”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이적표현물’ 논란은 분단 이래 쭉 계속됐다.

그러나 법조계에 따르면 현재의 국보법 사건은 대부분 80∼90년대 판례를 바탕으로 ‘관성적’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냉전의 문법이 지배하던 시절의 기준과 시각이 현재까지 적용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번에 검찰이 이 대표를 구속하면서 적용한 이적표현물 판례 역시 전체 130건(적용 판례가 복수일 경우 앞선 시기의 것을 1건으로 집계) 중 1980년대 것이 46건(35.3%), 1990년대 것이 74건(56.9%)이었다.

동서양의 고전으로 널리 읽히는 책들을 두고 ‘사회주의 혁명 선동’, ‘폭력투쟁’ 등 철 지난 단어들을 동원해 ‘빨간 딱지’를 붙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된다.

무엇보다 수사기관에서 이적표현물을 제대로 감정할 만한 전문성 있는 기관이 없는 것이 문제로 꼽힌다. 1988년 설립된 이래 7만여건의 이적감정을 수행했던 경찰청 산하 공안문제연구소(공안연)는 2004년 열린우리당 최규식 의원이 “공안연구소장이 연구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보단체의 조직감정을 강행했다”는 제보를 공개하면서 파문이 인 뒤 이듬해 사라졌다.

수사기관도 골머리다. 검경 관계자들은 “시대가 많이 달라져 이적성 기준이 모호한데 전문적으로 의뢰할 곳이 마땅치 않아 사실상 판례에 기댈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수사실무에서는 서적의 시대적 의미와 배경, 맥락을 읽어내기보다는, 과거 법원에서 실형이 확정된 판례를 찾아 당시 재판부에서 인정한 부분을 고스란히 가져온다고 한다.

과거 이적표현물로 지목된 서적을 낸 한 출판사 관계자는 “솔직하게 최근에 써진 책들이 검찰 기준에선 더 ‘급진적’이고 ‘혁명적’일 것”이라며 “책 한 권에 수백∼수천 페이지가 넘는데, 검찰·법원에서 (이적표현물로 지목한 책들을) 읽어는 보고 판단하겠느냐”고 꼬집었다.

◆북한서적, 어떻게 보아야할 것인가

다만 북한과 관련한 서적들에 있어서는 “표현의 자유를 무조건적으로 허용할 수 없다”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남부지검 역시 언론을 통해 엉터리 서적이 포함된 금서리스트가 공개된 뒤, 북한과 관련한 서적을 위주로 리스트를 축소하는 등 전열을 재정비했다. 북한이란 실재하는 위협이 존재하는 현실을 고려할 때 표현·사상의 자유가 무조건적으로 허용될 수 없단 것을 재판부에 강조하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남부지검 관계자는 “남북의 대립 상황이 여전하다. (변호사 측 말처럼) ‘시대가 변했다’는 건 근거 없는 얘기”라며 “실질적인 위험성이 있는 만큼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기도하도록 유도하고 관련한 내용의 서적들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행위 등은 허용될 수 없다”고 말했다. 자본주의에 대한 강렬한 적대감과 체재전복 의지 등이 결국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대표는 1990년대 국보법 위반으로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고, 이후에도 주변 지인들에게 “나는 급진적 사회주의자이고, 트로츠키주의자다”, “노동운동 복원이 시급하며 자본주의를 분쇄해야한다”, “사회주의 사상을 널리 학습시켜야한다” 등 자본주의에 대해 부정적이고, 급진적인 입장을 여러차례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또 그가 이번 재판에서 쓴 최후진술서를 보면 ‘노동자의 책’을 운영한 것도 사회주의 사상을 널리 전파하고, 학습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뒤집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설령 자본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삼을 순 없다는 게 변호인 측 주장이다. 이번 재판에서 이 대표의 변호를 맡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의 김종보 변호사는 “누구나 자신만의 생각이 있다. 사상은 있는 그대로 존중받아야한다. 자본주의체제를 부정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또 현실을 보았을 때도 자본주의가 결코 옳다고 볼 수 없다. 이런 반론들이 모여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또 북한과 관련한 국내연구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 검찰이 내세운 논리가 과도한 비약이란 주장도 나온다. 이번에 문제가 된 ‘강철서신’(1989)이나 ‘김일성선집’(1988), ‘김일성사상비판’(1988) 등 북한 저자이거나 주체사상, 북한정권을 다룬 서적들에 대해 학계에선 “학술 연구용으로 쓰이는 일이 많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월북 소설가 리기영의 ‘고향’을 책임 편집한 카이스트 이상경 교수(인문사회학)는 “(이적표현물로 지목된) ‘두만강’은 박경리의 소설 ‘토지’와 비슷한 성격”이라며 “해방 이전 노동·농촌문제를 다뤘지만 김일성 등 북한과 관련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검찰이 이적표현물로 지목한 ‘두만강’은 국내에서만 학위논문 등 34건의 관련 연구가 축적돼 있다.

앞서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등 11개 교수단체는 “수십년 전 책을 읽는다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접근 자체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며 “이번 사태는 당시 황교안 권한대행 체제가 보수수구세력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국정원과 검찰을 동원해 벌인 일”이라며 강하게 비난했다.

◆‘금서논란’ 마침표 찍을까

앞서 금서논란과 관련해 두 국가기관에서 서로 다른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2008년 국방부의 ‘불온서적 차단대책 강구 지시’가 공개된 이듬해 국가인권위원회는 “어떤 책을 읽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이성과 양심을 가진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유이자 권리”라고 밝혔다. 그러나 서울고등법원은 2013년 국방부 ‘불온도서’ 관련 소송에서 “국민들도 특수한 안보현실에 따라 장병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인식해 해당 서적의 소지를 꺼리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만큼 쉽지 않은 문제란 얘기다. 그러나 논란의 여지가 분명하지만, 냉전 종식 이후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새로운 질서로 자리잡으면서 ‘사상의 자유’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음은 부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사상의 자유를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설령 잘못된 사상과 주의를 주장하더라도 공론장에 끌어들여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자연스레 도태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무조건 막고, 감추기만해서는 신비주의나 제2의 ‘자생적 김일성 주의자’만 만들 수 있단 논리다. 학계에서 이 대표를 구속한 검찰과 법원 판단에 강하게 반발한 것은 이같은 이유에서였다.

‘금서논란’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우리사회에서 ‘사상의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을까. 다음달 20일 예정된 이 대표에 대한 재판 결과가 그에 대한 답을 일정 부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 역시 선고에 앞서 집중심리를 3일 연속 강행하고, 장시간에 걸쳐 양측의 첨예한 입장을 전달받는 등 적지않은 신경을 쏟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장판사 출신 한 변호사는 “국가보안법이란 법이 엄연히 존재하고, 남북이 대치하는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법원이 기존 판례를 경시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과거에 비해 북한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이나 태도가 달라졌고, 사상의 자유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커진 만큼 재판부의 고민도 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