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엘리베이터 폭행 알려진 뒤 눈 떴다.. 가짜 城에 갇혀 살았다는 걸"

송혜진 기자 2017. 6. 2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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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세원과 이혼 후 매일 쓴 일기 엮어.. '정희' 펴낸 서정희
햇살이 유난히 투명한 오후였다. 서정희는 카메라 앞에서 때로는 웃었고 때론 눈을 감았다. “사람들은 저 보고 동안(童顔)이라 하지만, 예전엔 그런 말조차도 ‘제대로 나이 못 먹었다’는 소리 같아 듣기 싫을 때가 있었어요. 요즘에서야 알겠어요. 세월이 비껴간 내 얼굴이 그래도 축복이라는걸. 진짜 청춘은 어쩌면 지금부터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오종찬 기자">2014년 5월 10일은 서정희(55) 인생이 거짓말처럼 바뀐 날이다. 이전까지 그는 개그맨 서세원(61)의 아내로, 톱 모델로 살아왔다. 그는 종종 방송에 나와 주부로서의 일상과 행복에 대해 말했고, 이를 기록한 책도 다섯 권이나 펴냈다. 그러나 이날 그가 사는 집 엘리베이터에 찍힌 CCTV 영상 속 서정희의 모습은 그간 책의 내용이나 방송과 전혀 딴판이었다. 언론에 공개된 CCTV 속에서 서정희는 서세원에게 무참히 폭행당하고 있었다. 소리 한번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전남편의 무력(武力)에 질질 끌려다녔다. 이후 서정희는 인정했다. "나의 30년 결혼 생활은 완벽을 가장한 연극이었고, 사실 그간 말 못 할 고통을 견디며 살아왔다"고. 2015년 8월 그는 오랜 소송 끝에 합의 이혼했다.

이달 초 서정희는 책을 한 권 다시 펴냈다. 제목은 '정희(아르테 刊)'다. 곧을 정(貞), 계집 희(姬). 자신의 이름 두 글자를 박아 낸 이 책에는 이혼 후 경기 남양주 별내 한 아파트에서 친정엄마와 함께 살면서 다시 일상을 추스른 이야기, 상담 치료를 받으면서 마주한 어린 시절의 상처,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던 결혼 생활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한 여자의 고백이 빽빽하다. 지난 9일 서울 논현동 한 카페에서 만난 서정희는 "그 일이 있고 나서 매일 새벽마다 일어나 일기를 썼다. 이 책은 그 일기를 추리고 추려서 펴낸 것"이라고 했다. 대답하는 입가가 바싹 말라 있었다.

나는 가짜 성(城)에 갇혀 살았다

―책 제목을 굳이 '정희'로 붙인 건, 연극 같은 결혼으로 잊고 살던 나를 이젠 찾고 살겠다는 뜻인가요.

"맞아요. 그동안 내가 누군지 모르고 살았으니 이젠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더는 남 핑계, 상황 핑계 대지 않고 이젠 내 이름 두 글자로 살아보겠다는 뜻이기도 해요."

―그동안은 그럼 어떤 핑계를 대면서 스스로의 모습을 회피했습니까.

"'너는 결혼한 여자'라고요. 남편이 있고 자식이 있다고요. 누가 뭐래도 가정이 있으니 그걸 지키고 살아야 한다고요. 원하든 원치 않든 가정을 이뤘으니 그래도 끝까지 깨지 않고 살아야 한다고 믿었죠. 아마 그 사건(엘리베이터)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두 아이가 이미 어른이 됐는데도요?

"예전엔 그 사실에 눈뜨질 못했어요. 엘리베이터 사건, 그 최악의 날 덕분에 역설적으로 눈뜬 거죠. 실은 진작 그 성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것을요. 그곳에서 나오면 이렇게 맘껏 편히 호흡하고 살 수 있다는걸요…."

1980년 고등학교 3학년 겨울이었다. 미국에 사는 이모에게서 이민 초청이 왔다. 학교를 자퇴하고 종로2가에 있는 영어 학원에 등록했다. 수업을 마치고 친구와 길을 걷는데 어떤 남자가 사진작가라면서 "모델해 볼 생각 없느냐"고 했다. 무심코 스튜디오를 찾아갔고 촬영을 했다. 첫 화장품 광고 오디션에선 탈락했지만 금세 한 제과 회사 모델로 뽑혔다. 그 광고 촬영장에서 만난 남자 모델이 서세원이었다. 촬영차 떠난 제주도에서 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서세원은 서정희 어머니를 찾아가 "정희와 살겠다"고 했다. 3년 동거에 이어 32년 부부 생활의 시작이었다.

―결혼 안 하면 됐던 것 아닙니까.

"스무 살이었어요. 아무것도 몰랐고요. 그냥 살아야만 하는 줄 알았죠."

책에서 서정희는 동거를 시작할 무렵 시댁 식구들이 걸핏하면 "(서세원) 앞길 망치지 말라"고 화를 내며 집으로 들이닥칠 때면 두려워 떨다 종종 싱크대나 벽장 안에 숨어 잠이 들었다고 썼다. 안정을 찾은 건 첫딸 동주를 낳으면서부터였다.

―두 아이를 키우는 동안은 행복했다는 건가요.

"행복하다고 믿었죠. 실제로 그 틀 안에서만큼은 저는 완벽하려 했고요. 밥 하나 그냥 지어본 적이 없어요. 꼭 누룽지까지 짓고 숭늉을 따로 끓였고, 아이들 옷 하나, 로션 하나 살뜰히 챙겼어요.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고 몰입할 수 있었거든요. 내 아이, 내 가정…. 그걸 내 스스로 돌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종종 충만할 수 있었어요."

책 속에서 서정희는 그러나 서세원의 외도를 알고도 모른 척했고, 이따금 서세원이 폭력을 휘두르고 폭언을 퍼부을 때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는 뜻, 이 책에서는 '어차피 죽게 될 테니 잊으면 그만'이라는 의미로 쓰임)'라고 속으로 외쳤다고 했다.

―그때 바로 신고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모른 척 해주고, 눈 감아주고, 폭력을 용인해주면서 더 문제를 키웠던 건 아닐까요.

"그러게요. 가까운 사람들은 다들 제게 그렇게 얘기했어요(웃음). 심지어 목사님들까지도요…." 서정희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래도 그땐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그래도 엄마이니 좀 더 참고 견뎌봐야 한다고요. 뒤늦게 알았던 거죠. 사랑 없는 남자와 살면서 지켜내려는 가정은 모래성보다 부질없다는걸. 그 모든 건 그저 다 허상이라는걸."

보광동 판잣집, 아버지, 그리고 결핍

이혼 후 서정희는 1년 반가량 신경정신과를 오가며 상담 치료를 받았다. 상담 과정은 때론 버겁고 고통스러웠다. 서정희는 "뭐든지 빨리 제대로 하고 싶어 하는 내 조급증이 상담 치료를 하는 데도 종종 방해가 됐다"고 했다.

―책에도 써 있죠. 뭐든지 남들보다 두 배 세 배 열심히 하고 연습하고 훈련하고 배우려고 했다고요. 요리든, 스타일링이든, 글쓰기든….

"못 배운 한이 있어서 그래요. 고등학교 졸업장도 못 받고 그만 덜컥 누군가의 아내로 살게 됐으니까요. 항상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못 배웠지만 그걸 센스와 눈썰미로 극복해내야 한다는(웃음). 옷 한번 잘 입기 위해 수십 벌을 미리 입어봤고, 식당에서 밥 한번 먹어도 이 집은 이걸 어떻게 만드는지 두 눈 치켜뜨고 살피곤 했어요. 그러다 보니 이젠 상담 치료할 때조차 '빨리 낫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더라고요. 의사 선생님이 그러더군요. '그만 좀 내려놓으라'고."

서정희 아버지는 그가 다섯 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홀로 남겨진 어머니는 미군 부대에서 일하며 보광동 판잣집에서 네 남매를 키웠다. 둘째였던 서정희는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남매들을 돌보느라 지친 외할머니는 그중에서도 유난히 병약하고 입 짧았던 서정희를 종종 타박했다. "이년아, 제발 그냥 푹푹 좀 퍼먹어라"가 할머니의 입버릇이었다고 했다.

―살림에 유독 집착했던 건 그런 기억 때문인가요.

"그럴 거예요. '아무렇게나' '푹푹'…. 그런 게 그렇게 싫었어요. 하나를 놓아도 반듯하고 정갈하게 놓고 싶었어요. 요즘도 사실 테이블보, 꽃 한 송이에도 집착해요. 옳건 그르건 32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하면서 살림과 육아만 파고들고 살았으니, 결국 그것도 내 일부가 아니겠어요? 대충 아무렇게나는 못 살아요. 아무도 안 볼 때조차 몸매가 잘 드러나지 않는 치렁치렁한 옷을 입어요. 마른 몸이 콤플렉스거든요. 집은 늘 깔끔해야 하고요. 이상해도 어쩔 수 없죠. 이것도 나라는 걸 인정해야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럼 하나도 없나요.

"없어요. 툭하면 아프던 내 입에 가끔 영양제를 넣어주셨다는 것 외에는…. 한때는 아빠를 원망했어요. 아빠가 일찍 돌아가셔서 내가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지 못했던 건 아닐까. 지금은 그런 생각 안 하려고요. 지금 이 순간 이렇게 홀가분하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작년 3월부터 서정희는 국제대 산업디자인과에서 외래교수로 공간디자인 강의를 시작했다. 1·2학년 학생들을 가르친다. 수업할 때 서정희는 제법 대담하다. 색채 보드를 한꺼번에 늘어놓고 어울리는 색이 뭔지 다 같이 토론하기도 하고, 자신이 직접 만든 인테리어 보드를 손으로 하나하나 뜯어가며 공간 구성법을 설명하기도 한다. 서정희는 "평생 눈칫밥을 먹어가며 온몸으로 얻은 지식이다. 수업할 때만큼은 누구 눈치도 안 보고 아이들에게 다 주고 싶었다"고 했다.

―주부 서정희, 엄마 서정희, 아내 서정희가 아닌 사람으로서 말인가요.

"네. 평생 발버둥치면서 내 것 하나 만들어보려고 했던 한 사람, 이제서야 내 인생이 뭔지 터득하기 시작한 사람, 그런 사람이 아이들 앞에 서는 거죠(웃음)."

이제 다시, 사춘기

서정희는 최근 한 방송에서 출연진들과 함께 울릉도 소풍을 떠났다. 섬 자연 풍광 앞에서 그는 그야말로 넋을 놓고 환호했다. 그 거침없는 표현에 누군가는 웃었지만 누군가는 또 당황했다. 서정희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너무나 어린아이 같더군요.

"어린 시절을 건너뛰었으니까요(웃음). 성에 갇혀 사느라 사춘기가 뭔지, 사랑이 뭔지, 소풍이 뭔지, 무엇 하나 제대로 알지 못했어요. 이제 막 알아가기 시작했어요. 쉰을 훌쩍 넘은 나이, 누군가는 세상 모든 것이 시큰둥할 수 있겠지만 나는 달라요. 어딜 가도 가슴이 뛰고, 어딜 가도 새로워요. 그걸 받아들이느라 동공이 커지고 맥박이 빨라지는 걸 어쩌겠어요. 그런 내 모습이 조금 민망하고 부자연스러워 보일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저는 이 시기를 꼭 거쳐야 해요. 건너뛰어버린 내 스무 살, 나의 사춘기. 지금이라도 다시 겪어봐야죠."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도 돼 있나요.

서정희는 고개를 들었다. "그럼요. 그래야 또 자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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