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어떤 메모] 함께 맞는 비

입력 2017. 6. 23. 21:16 수정 2017. 6. 23.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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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한겨레]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지음, 돌베개, 1998(1988) 경북 성주군 주민들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반대 투쟁을 그린 박문칠 감독의 다큐멘터리 <파란나비효과>를 보았다. 5만 주민이 모두 한목소리를 내지는 않지만(<한겨레21> 1166호 감독 인터뷰 ‘날아라, 사드 대신 평화의 파란나비’ 참조), 영화는 당대의 절실한 윤리를 보여준다.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여성인 이 영화에는 ‘나중에’와 ‘필요악’이 없다. 한국 사회운동에서 흔히 등장하는 비인간성, 어떤 문제는 중요하고 어떤 문제는 사소하다는 위계와, ‘악’이지만 필요한 일이 있으며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파란나비효과>에는 없다. 주민들은 사드를 다른 곳에 배치하거나 군수가 “다방이나 술집 여자들”을 비하하면 더욱 강력하게 저항한다. 이 투쟁에는 “국가의 힘을 어떻게 당하겠냐”며 겁먹은 일부 남성 외에는 소외된 사람이 없다. 타인을 타자(他者, the others)로 만들지 않는 삶이 여기 있다.

웃음이 많은 이 영화는 연대와 평화에 대한 깊은 사유를 보여준다. 주민들은 일상이 투쟁이고 정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입을 모은다. 평화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일상과 전시가 따로 있다는 것, ‘군사주의’와 평화는 대립한다는 사고다. 평화는 ‘평화교육’나 ‘비폭력 대화’가 아니다(왜 이런 프로그램의 수강료는 특히 비쌀까). 평화운동가인 어느 수녀님의 말대로 “평화로운 대화를 하려면 속에서는 불이 나는 법”이다.

연대(連帶)는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는다. 약자를 볼모로 한 힘 있는 자들의 권력 증식 카르텔이 있다. 재벌의 담합이나 남성연대(male bonding)가 대표적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사회정의와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으로서 연대(solidarity)다. 전자는 약자를 쫓아내지만 후자는 타인을 수용하면서 자신을 다시 구성한다.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나는 누구이길래 “동성애를 좋아하냐”는 추궁과 “여성 문제는 사소하다”는 단언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쫓겨나는 사람들은 주로 ‘범(汎)여성’들이다. 성소수자, 성산업에 종사하는 사람, 낙인찍힌 이들이다. 한국 사회는 이들에게 함부로 하라는 ‘국민교육헌장’이라도 있는 듯하다. 이들이 주로 듣는 말이 “나중에 해결하자”다. 나는 이 “나중에”가 흥미롭다. “나중에”가 언제인가도 궁금하지만, 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의 입장에서 “나중에”인가. 배부른 사람이 며칠 굶은 사람에게 “나중에 먹어요”라고 말할 수 있나. 아니면, 당사자가 “저희는 나중에 먹을게요”라고 하겠는가. 즉 “나중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말이다.

감옥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다. 접견, 영치금의 횟수가 같을 리 없다. 사정이 나았던 신영복은 동료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지만 거부하는 이들을 보고 이렇게 썼다. “사람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을 뿐이며, 남을 돕는다는 것은 그 ‘스스로 도우는 일’을 도울 수 있음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244쪽). 그래서 “입장의 동일함은 관계의 최고 형태”가 된다(313쪽). 연대의 의미에 대해 이보다 더한 명문이 있을까. 이 당파성과 위치성!

당연한 이야기지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처음 출간된 1988년과 30여년이 지난 지금 나의 독후감은 다르다. 1976년, 신영복은 그의 계수에게 이렇게 썼다. “얼마 전에 읽어본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이효재)을 추천합니다. 매우 신선한 책입니다”(95쪽). ‘염려보다 이해를’(73쪽)이 이토록 감사한 말임을 그때는 몰랐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감옥의 사상이다. 1968년부터 20년20일 동안 ‘엘리트 사상범’은 ‘밑바닥 인생들’과 살면서, 그들과 자신의 같음과 다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때문에 그는 생각 없이 살아도 되는 남성의 ‘특권’은 누릴 수 없었지만, 타자를 만들지 않고도 남성이 된 드문 인간이 되었다. 천만번의 외로움 끝에 다다를 수 있는 경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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