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에 열광한 독자들은 왜 주식을 샀을까

2017. 6. 23.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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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최우성의 동화경제사
(13) <로빈슨 크루소>

[한겨레]

대니얼 디포가 1719년 출간한 <로빈슨 크루소>는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거친 바닷길에 도전한 무역상이 새로운 성공신화의 최전선에 선 주인공으로 추앙받던 시절의 시대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악마는 젊은이들에게 일찍부터 덫을 놓고 기다린다.’ 로빈슨 크루소는 자신 앞에 놓인 운명을 예견했나 보다. 마른 땅에 발을 디딜 수만 있다면, 두번 다시 배를 타지 않을 것이라며 애원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잉글랜드 북부의 항구도시 헐에서 아버지의 배를 타고 런던으로 막 떠나려는 친구를 만나 배에 올랐다가 폭풍 탓에 죽을 고비를 넘긴 참이었다. 간신히 뭍에 오른 로빈슨 크루소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기는커녕, 아프리카로 떠나는 배에 다시 몸을 실었다. 파란만장한 삶의 예고편이 펼쳐졌다. 터키 해적한테 붙잡혀 아프리카 서해안의 항구도시 살리에서 약 2년간 노예로 살았고, 기회를 엿봐 탈출한 그를 브라질로 향하던 포르투갈 선박이 구조한 터라 무작정 브라질에 정착하게 됐다. 담배와 사탕수수 재배로 큰돈을 챙겼고 넓은 땅도 손에 쥐었다. 그런데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미래가 저만치서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어느 날 이웃 농장주들이 로빈슨 크루소를 찾아와 한가지 제안을 했다. 아프리카 기니로 갈 배를 마련해줄 테니 흑인 노예 밀무역을 하자는 얘기였다. 1659년 9월1일. 그를 태운 배가 기니를 향해 출발했다. 카리브해의 북위 7도선 근처를 지날 무렵, 강력한 토네이도가 배를 덮쳤다. 배는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표류했다. 집채만한 파도에 휩쓸린 로빈슨 크루소는 기적적으로 혼자만 목숨을 구해 인근 섬 해변으로 떠밀려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몸에 지닌 거라곤 주머니칼 하나와 담배 파이프, 쌈지에 든 약간의 담배가 전부였다. 커다란 널빤지를 뗏목 삼아 난파선과 해변을 오가며 급한 대로 몇가지 물건을 옮겨왔다. 빵, 치즈, 말린 염소고기, 닭 모이로 쓰던 옥수수, 약간의 연장과 탄약, 소총 몇 자루, 그리고 성경…. 자그마치 28년 하고도 2개월19일 이어질 운명은, 이렇듯 한순간에 찾아왔다. 그날은 1659년 9월30일, 하필 26살 맞는 생일이었다.

대차대조표로 기록된 무인도의 삶

대니얼 디포는 여러 사업을 벌이다 파산과 재기를 거듭했고, 나이 60이 다 돼서 쓴 <로빈슨 크루소>로 커다란 명성을 얻었다. 위키피디아

<로빈슨 크루소의 생애와 이상하고 놀라운 모험>(이하 <로빈슨 크루소>)이란 제목을 단 소설이 런던에서 출간된 건 1719년 4월25일의 일이다. 지은이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기에, 한동안은 마치 로빈슨 크루소란 인물이 자신의 체험을 기록한 ‘여행기’인 양 오해를 산 적도 있다. 소설의 배경이 된 실존 인물이 있는지를 놓고도 의견이 분분했다. 현재는 칠레 영토인 태평양의 외딴섬 ‘마스 아 티에라’(1966년 ‘로빈슨크루소’섬으로 개명했다)에서 1705~1709년 사이 혼자 생활하다 구조된 스코틀랜드 선원을 모델로 삼았다는 주장이 널리 퍼지기도 했다.

<로빈슨 크루소>는 영국 작가 대니얼 디포가 60살이 다 돼 선보인 대표작이다. 디포는 로빈슨 크루소란 인물에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투영한 걸까? 둘은 빼닮은 구석이 참 많다. 비국교도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디포가 찰스 모턴 경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폭넓은 교양을 쌓았듯이, 로빈슨 크루소의 아버지는 영국에 정착해 큰돈을 번 독일 브레멘 출신 상인으로 아들을 법률가로 키우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다. 제 몸속에 흐르는 장사꾼의 피를 끝내 지우지 못한 것도 둘의 공통점이다. 혈기 왕성한 디포는 일찌감치 메리야스 장사에 뛰어들었고 사향고양이 분비물로 향수를 만드는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두 차례나 파산해 채무자감옥에 갇혔다가 오뚝이처럼 재기하는 뚝심도 보여줬다. 중산층의 안온한 삶을 권하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가출→포로→탈출→식민지 농장주→조난→구조라는 긴 드라마를 써내려간 로빈슨 크루소의 이미지와 겹친다.

무인도에 홀로 버려진 로빈슨 크루소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묵묵히 오두막을 짓고, 곡식을 재배해 빵을 만들었으며, 야생 염소를 길러 고기와 젖을 얻었다. 심지어 앵무새를 길들여 말동무로 삼았고 보리로 엿기름을 짜 맥주를 즐길 정도였다. 이처럼 역경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을 다독인 덕에, 그는 감옥을 왕국으로, 황무지를 신천지로 바꿔놓는 기쁨을 맛봤다. 의지와 용기의 가치야말로 <로빈슨 크루소>가 주는 교훈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1719년 4월 출간된 <로빈슨 크루소> 초판. 지은이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아 로빈슨 크루소란 실존 인물의 여행기라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위키피디아

이뿐 아니다. ‘무’에서 ‘유’로 탈바꿈해가는 터전을 지켜보며, 심심풀이로 성경을 뒤적이던 로빈슨 크루소의 신앙심도 깊어졌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편 50편 15절) 특히 23년째 되던 해 겨울 식인종한테서 극적으로 구해낸 원주민 ‘프라이데이’가 개종돼가는 과정은 작품에 스민 종교적 메시지를 드러내준다. 처음엔 바다와 땅과 산과 기슭, 이 모두는 ‘저 너머’에 있는 늙은 ‘베나머키’가 만들었다고 믿던 프라이데이는 기독교인 로빈슨 크루소에게 자주 질문을 던졌다. “하느님은 악마만큼 힘이 세지 못한가요? 왜 하느님은 악마를 지금 당장, 아니 오래전에 죽이지 않았지요?” 하느님은 우리가 회개하고 용서받을 때까지 기다리신다는 설명에, 프라이데이는 “그러니까 우리, 악마 모두 나쁘군요, 모두 살아남아 회개하고요, 하느님은 모두 용서하고요”라며 어느덧 돈독한 신앙심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게 전부일까? 불굴의 의지라는 장막과 종교적 깨우침이라는 외피를 걷어내고 나면 <로빈슨 크루소>에선 또 다른 이야기가 고개를 내민다. 무인도에 홀로 버려졌음에도 제 처지를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 좋은 점과 나쁜 점으로 구분해 대차대조표를 적는” 로빈슨 크루소의 냉정한(!) 면모를 떠올려보자.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싹이라 할 개인주의와 합리성, 계산적 이성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화폐도 시장도 가격도 존재하지 않는 ‘1인 사회’에서 시간을 쪼개 사냥에 나서고 곡식을 거두며 휴식을 취하는 그의 일상이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머릿속에 합리적 자원 배분과 선택 행위의 본보기로 받아들여진 것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더군다나 프라이데이가 무인도에 합류한 이후 둘이서 일을 나눠 맡고 이득을 나눠 갖는 체제가 작동하는 대목에선 분업과 교역의 이점을 설파하려는 ‘장사꾼’ 출신 디포의 의지를 엿보게 해준다.

1719년 런던에서 출간된 ‘모험소설’
카리브해 무인도의 28년 삶 그려내
산전수전 겪은 ‘장사꾼’ 대니얼 디포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와 닮은꼴 의지와 용기, 기독교 메시지 담아
개인주의·합리성의 싹도 엿보여
성공신화 광풍 속 ‘남해버블’ 사건
영국 식민주의 서막을 알린 상징

최악의 거품 사례로 꼽히는 ‘남해버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목숨을 구해준 감사의 표시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암갈색 남자에게 로빈슨 크루소는 그의 이름을 ‘프라이데이’로 하겠노라 말했다. 그날이 마침 금요일이어서다. 또 그에게 ‘주인님’이란 말을 가르치고 “그건 내 이름이 될 것”이라 일러줬다. 마치 무균질의 진공상태인 양 묘사된 카리브해의 무인도란 공간에 외려 현실의 ‘사회’를 이식하고 복제한 장본인은 ‘영국인’ 로빈슨 크루소다. “점차 은밀한 기쁨이 찾아왔다. 여기 모든 것이 내 것이며 내가 이 땅의 주인이자 왕이다.” 아일랜드 작가 제임스 조이스가 훗날 이 작품을 두고 “대영제국의 진정한 상징이자 영국 식민주의의 전형”이라 평가한 건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이쯤 되면 <로빈슨 크루소>는 탐험과 팽창, 정복과 지배로 얼룩진 유럽 자본주의의 탄생사를 정확하게 그려낸 교과서에 가깝다고 보는 게 옳다.

실제로 작품 속 로빈슨 크루소의 활동 시기는 서유럽 여러 나라가 너나없이 탐험과 정복의 성공신화를 쓰고자 혈안이 됐던 때다. 원래 중세란 이동성이 거의 없는 사회였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중세시대의 상인은 기존 질서로부터 ‘일탈한 개체’, 곧 근본 없는 사람으로 여겨졌을 뿐이다. 중세를 밀어낸 대항해 시대의 개막은 모든 걸 바꿔놓았다.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거친 바닷길에 도전한 무역상은 이제 새로운 성공신화의 최전선에 선 주인공으로 추앙받았다. 특히 영국에선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상인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신대륙 개척과 탐험을 사업 목적으로 하는 회사가 잇따라 생겨났고, 갓 출범한 런던증권거래소엔 이들 회사에 투자하려는 투자자들이 밀려들었다. 잔뜩 위엄을 부린 왕족과 귀족은 물론이려니와 여성들도 대열에 동참했고, 주인이 쉬는 시간에 마차를 끌고 나와 투자금을 맡긴 어느 마부의 사연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즈음 영국 사회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징표가 ‘남해주식회사’다. 영국과 스페인이 벌인 스페인왕위계승전쟁(1701~1714년)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으나, 영국은 전쟁 기간 내내 막대한 전쟁비용에 시달렸다. 1711년 세워진 남해주식회사는 그 해법이었다. 기본 얼개는 이렇다. 장차 전쟁에서 승리하면 스페인이 독점하던 라틴아메리카대륙과의 무역 권리를 빼앗아올 수 있을 테니, 이참에 국채를 발행한 뒤 새로 설립하는 민간합자회사(남해주식회사)의 무역독점 특혜와 국채를 맞바꾸자는 것. 1천만파운드에 이르는 정부 빚을 떠넘기기 위한 조처였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도 남해주식회사는 이렇다 할 무역 실적을 거두지 못했고, 1718년 스페인과 전쟁이 재개되자 사업 전망은 한층 불투명해졌다. 새로운 묘수가 등장했다. 정부는 연 5%짜리 만기 없는 국채를 발행하고, 남해주식회사가 전환사채를 발행해 국채 전부를 인수하는 방식. 정부로선 대량의 국채를 안정적으로 발행할 수 있어 이득이고, 남해주식회사는 ‘절대로 부도나지 않을 것 같은’ 국채를 담보로 계속 증자를 할 수 있는 구조였다. 결코 망할 리 없을 것 같은 사업모델이다 보니 이 회사가 발행하는 전환사채 투자 열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1720년 1월 말 128파운드이던 주가는 8월 초 1천파운드 선을 가뿐히 돌파했다.

흥미로운 건 <로빈슨 크루소> 출간 시점이 남해주식회사의 주가가 급등세를 타기 직전이라는 사실. 탐험과 정복으로 엄청난 부를 일군 로빈슨 크루소와 남해주식회사를 잇는 연결고리는 당대 영국 사회를 지배한 성공신화 이데올로기다. 노회한 디포 입장에선 <로빈슨 크루소>의 출판이야말로 적절한 타이밍의 ‘비즈니스 프로젝트’ 아니었을까. 디포 자신이 이 회사에 큰돈을 베팅한 투자자란 사실은 시사하는 바 크다.

악몽의 시간은 느닷없이 들이닥쳤다. 제아무리 묘수를 짜낸다 하더라도 실적 없는 회사의 주가를 마냥 떠받칠 수는 없었다. 외국과 맺었다던 무역계약이 모두 거짓이었음이 드러나자, 거침없이 오르던 주가는 반대로 곤두박질쳤다. 9월 들어 800파운드대로 떨어지더니 같은 달 말엔 이미 200파운드를 유지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최악의 거품 사례의 하나로 꼽히는 ‘남해버블’의 실상은 이랬다.

<로빈슨 크루소>가 세상에 나온 직후 터진 ‘남해버블’ 사건은 역사상 최악의 거품 사례의 하나로 꼽히다. 남해주식회사 투자 열풍을 풍자한 에드워드 매슈 워드의 작품. 위키피디아

혈통이 아니라 땀이 혈통을 만든다

가슴 한구석에 웅크린 모험심에 불을 지핀 <로빈슨 크루소>에 심취하며 너도나도 투자 대열에 뛰어들던 시절, 영국 사회는 요동쳤다. 시쳇말로 ‘졸부’의 탄생은 견고했던 전통사회의 신분 장벽이 와르르 무너졌음을 뜻한다. 디포와 동시대를 살았으나 전통 질서를 옹호하며 정반대편에 섰던 <걸리버 여행기>의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가 “이 나라 돈의 대부분이 신분과 교육 정도, 자질 등에서 하인보다 나을 게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수중에 들어갔다”며 한탄했을 정도다. 반대로, 주가 폭락으로 인생의 쓴맛을 본 사람들도 허다하다. 디포 자신도 어렵사리 모은 투자금을 몽땅 날렸다. 아이작 뉴턴의 사례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1720년 2월 주가가 200파운드를 밑돌 때 뛰어든 뉴턴은 6월 말 400파운드 근처에서 팔아 쏠쏠한 차익을 챙겼다. 문제는 그다음. 약 2주 뒤 주가가 500파운드를 넘기면서 친구들이 더 많은 돈을 벌었다는 소식이 그를 괴롭혔다. 뉴턴은 주가가 700파운드를 넘자 호기롭게 다시 투자에 나섰으나, 결국 대규모 손실만 입고 쓸쓸히 거래소를 떠냐야 했다. “천체의 무게를 잴 수는 있으나 미친 사람들의 마음은 알 수 없다.” ‘이성과 과학의 시대’를 이끌던 천재 과학자의 뒤늦은 후회였다.

“시작은 어리석었으되 끝에 가서는 더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행복한 삶을 살았다.” 로빈슨 크루소가 35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을 때, 부모도 형제도 남아 있지 않았다. 피붙이는 떠났으나 재물은 그의 곁을 지켰다. 브라질에 남겨둔 재산은 엄청나게 덩치를 키웠다. 무엇보다 그에겐 자신이 몸소 개척하고 정복한 “내 섬”이 존재했다. 그의 ‘후계자’들은 뭍에 나가 잡아온 포로를 노예로 부리며 그의 왕국을 나날이 살찌웠다. 아버지의 뜻을 어기며 고향을 등진 아들은 결국 아버지보다 몇 곱절 더 큰 부를 ‘제 손으로’ 일궈냈다. 전통사회의 질서가 무너지고 그 자리를 새로운 게임의 규칙이 꿰찼다. 혈통은 혈통이 만드는 게 아니라 오로지 땀이 만든다는 명제만이, 그에겐 진리였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대포와 성경을 양손에 든 당대의 ‘로빈슨 크루소들’은 굳건한 믿음으로 자본주의의 서막을 활짝 열어젖혔다.

※ ‘최우성의 동화경제사’는 이번 회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주주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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