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역사라는 엄처시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2017. 6. 23.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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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이진순의 열림
소설가 황석영

[한겨레]

최근 자전을 출간한 소설가 황석영이 지난 13일 오후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정발산동 자택 인근 카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황석영(74)의 삶은 장편 대하소설과 같다. 1943년 만주 장춘에서 출생한 그는, 해방과 함께 귀국해 평양에 살다가 엄마 등에 업혀 만 네살 때 38선을 넘었다. 4·19 때 친구를 총탄에 잃고, 6·3시위로 유치장에 끌려가고, 청룡부대 2진으로 월남전에 참전하고 돌아와, 유신 반대와 민중문화운동을 이끌다가 5·18을 맞았다. 89년 금단의 땅 북한을 방문하고 독일에 망명해 베를린장벽 붕괴와 사회주의권 몰락을 목도했다. 93년부터 5년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석방된 뒤 지금까지 거의 매해 새 작품을 발표해온 그는, 최근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담은 자전 <수인>을 출간했다. 때로 “역사라는 엄처시하에서 자유롭고 싶었”지만, “삶과 문학을 일치시키는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는 그에게 문학이란 무엇이고 인생이란 무엇일까? 지난 13일과 21일 총 8시간에 걸쳐 나눈 이야기를 2회로 나누어 소개한다. 글 이진순 풀뿌리정치실험실 ‘와글’ 대표

약속 시간이 15분이나 남았는데 그가 카페를 향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입구에 와서도 그는 바로 들어서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지만, 선팅 된 유리창 때문인지 그는 실내에 있는 우리 일행을 알아보지 못했다. 다가가 인사를 드리니, 시선을 다른 데 두고 있던 그가 흠칫 놀란 투로 말했다.

“아, 벌써 오셨어요? 오늘 바람도 좋은데 밖에 앉으면 어떨까 싶어서….”

청색 티셔츠 위로 검은 남방의 단추 몇 개를 풀어 입고 작은 남성용 핸드백을 든 차림이었다. 70대 중반이라곤 믿어지지 않는 단단하고 군살 없는 체구였다.

“<한겨레>에선 왜 자꾸 이상한 사진만 쓰는지 몰라. (찡그린 표정 지으며) 입 헤벌리고 인상 찌푸린 거나 싣고… 그런 거 말고 이번엔 좀 멋지게 찍어주세요.(웃음)”

그의 너스레에 한바탕 웃음보가 터졌다. 며칠 전 술 먹다가 계단에서 구르는 바람에 119 불러서 응급실까지 실려갔는데, 다행히 팔다리는 안 부러지고 얼굴에 멍과 상처만 남았다며 하필 이런 때 사진을 찍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그가 투덜대듯 말했다.

-그만하시길 천만다행입니다. 뼈 안 다친 게 어딥니까?

“내가 운동을 좀 한 사람이니까. 넘어지면서 탁! 탁! 짚었지.(웃음)”

으쓱한 표정으로 얘기할 때 그는 개구쟁이 소년 같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문인이자, 아시아 유럽 미주 18개국에 71종의 작품이 번역 출판된 세계적인 작가지만, 황석영(74)에겐 왠지 ‘대문호’라든가 ‘거장’과 같은 호칭을 붙이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근엄하고 엄숙한 ‘아우라’를 거부하고, 아무하고나 퍼질러 앉아 막걸리 한 사발 나누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이기를 자처한다. 2011년 한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황석영은 ‘작가란 사상가라기보다는 시정잡배’라고 잘라 말했다. 동학혁명을 배경으로 그린 소설 <여울물 소리>의 이신통이 그랬던 것처럼.

천안 장터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울고 웃고 성나고 기쁘게 하기를 하늘이 여름날의 바람과 구름을 희롱하는 듯했다. 옛말에 이야깃주머니라고 하더니 바로 신통이 그러했다. -<여울물 소리>(2012) 55~56쪽.

이야기꾼 황석영은 평생 저잣거리, 부박한 삶의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국내외 명망가와 정치인, 문화예술인들과 깊이 교유해 왔지만, 그의 작중인물은 대부분 유랑민, 부랑자, 노동자, 광대, 기생, 장삼이사의 평범한 인생들이었다. 그는 세상의 치열한 중심을 비켜간 적이 없고, 더러는 일부러 찾아가면서 그 불꽃의 현장에 함께하고자 했다. 황석영에게 문학이란, 역사란, 삶이란 무엇일까? 아니, 어쩜 더 중요한 이번 인터뷰의 질문은 황석영에게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돌려져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황석영의 삶과 문학이란 어떤 의미인가?

6천매 썼다가 마지막부 2천매 없애
‘감옥 5년’에 방북·망명 등 엮어
“자기 경험을 문학적으로 재구성,
뭔가 빠져나간 듯 허탈하고 헛헛” 방랑과 방황의 성장기·청소년기
“동창들 글 쓰는 사람 된 것도 몰라”
늘 떠들썩한 재담꾼 소리 듣지만
내면 깊은 곳엔 ‘경계인’의 흔적

작가는 제 인생 내어주는 팔자

-지금까지 수많은 작품을 출간하셨지만 선생님 인생을 드러내는 자전 <수인>을 펴내는 소감은 또 다를 것 같아요.

“다릅니다. 새로 작품을 내고 나면 한달간은 기분이 좋고, ‘뭐 하나 해냈구나!’ 이런 느낌이 드는데, 이건 그 반대예요. 굉장히 섭섭하고 기분이 축 처져요. 친구하고 헤어진 것 같고, (가슴을 가리키며) 이 안에서 뭔가 큰 거 하나가 쑥 빠져나간 것처럼 허탈하고 헛헛하다고 해야 하나. 우리 모친이, ‘작가는 지 팔자 남 던져주는 거니까 하지 마라’ 그랬는데, 그 말이 실감나요. 지 인생 다 까발려서 세상에 던져버렸으니까.”

-에필로그에서도 ‘자전은 원래 내가 하고 싶지 않았던 작업이다’라고 쓰셨던데, 출간을 결심한 동기가 뭡니까?

“처음부터 하기 싫었던 작업이에요. 감춰두고 싶은 창피한 얘기까지 다 탄로나는데다가 나중에 소설로 써먹을 수 있는 소재까지 다 까놓는 거니까.(웃음) 처음에 <중앙일보>에서 ‘남기고 싶었던 이야기들’로 연재하다가 중단한 건데, 차일피일 10년을 끌다가 대충 대담으로 마무리하려고 하니까, 그 얘길 듣고 강태형(전 문학동네 사장)이 막 화를 내는 거야. ‘당신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고 한국문학의 자산이고 한국문학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작업인데 왜 그걸 어린애처럼 방기하냐?’고요. 듣고 보니 그 말이 맞아. 내가 큰 잘못을 한 것 같더라고요.”

신문에 연재할 때 쓴 내용을 대폭 줄이고 전체 구성을 바꿔서 4천매를 더 썼다. 1993년 구속되어 7년형을 받았다가 98년 김대중 특별사면으로 풀려날 때까지 감옥에서의 5년을 기본 시간대로 잡고 방북과 망명, 유년기와 광주항쟁과 파병 등을 그 시간대 안에 교차해서 만들었다.

-책 제목이 <수인>이고 그 밑에 ‘황석영 자전’이라고 쓰여 있는데, 통상 쓰는 자서전이란 용어와 자전은 어떻게 다른 겁니까?

“같은 건데, 뉘앙스가 조금 다르죠. 제 느낌상, 자서전은 말 그대로 자기 얘길 시간대 순으로 곧이곧대로 하는 거라면, 자전은 자기 경험을 문학적으로 재구성하는 거랄까? 감옥 안에서 시간대를 왔다 갔다 하면서 영화적 구성을 하기도 하고요.”

-‘현재와 가까울수록 스스로를 객관화하기가 어려웠고, 나도 모르게 주인공 의식에 사로잡혀 자신을 미화하거나 엄살을 부리’는 자신을 발견하셨다고 쓰셨던데요.

“원래 6천매 분량이었는데, 마지막부 2천매를 아예 없애버렸죠. 이 부분이 ‘98년 이후 현재까지’인데 최근 일이다 보니 자꾸 변명하게 되고, 자기 자랑이 많이 들어가고. 꼭 밤에 써놓은 연애편지 같더라니까.(웃음) 이게 아직 (마음의) 정리가 안 됐다는 얘기지. 작가에겐 소설보다 자전을 쓰는 게 훨씬 어려운 것 같아요.”

‘이를테면 2009년 이명박 정부의 북방외교에 동행했다가 논란이 되었던 사연 같은 것 말씀이냐?’고 묻고 싶은 걸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인터뷰 말미에 조심스럽게 여쭤볼 일이었다.

“오에 겐자부로나 르 클레지오는 나더러 “‘서사가 많은 나라에 태어난 네가 (작가로서) 부럽다’고 했지만, 그때마다 난 시니컬하게 말했어요. ‘나는 니 자유가 부럽다’고.” 소설가 황석영은 정치적 사회적 압박만 억압이 되는 게 아니라 역사에 눌리는 것도 억압으로 느낀다고 말했다. 최근 자전을 출간한 소설가 황석영이 지난 13일 오후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정발산동 자택 인근 카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잠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나는 사람에 현혹된다

-책을 읽으며 정말로 경이로웠던 건, ‘이렇게 방대한 스케일로 한 시대의 주요 인물군이 총망라된 개인사가 또 있을까?’ 하는 점이었어요. 김일성부터 지존파 두목까지, 재벌 총수부터 민주화운동 인사들, 일용노동자들까지 시간적 공간적으로 이렇게 다양한 인물을 만나본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이며, 둘째로 설사 그렇게 만나본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치밀하고 상세하게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습니다. 해외에서 만난 동포나 예술가는 그렇다 치고, 감옥에서 만난 잡범들, 북한 초대소 직원들의 고향, 가족관계, 나눈 대화 내용들까지 어쩌면 그렇게 세밀하게 기억하고 재현해낼 수 있죠?

“기억력 갖고 먹고산 것 같아요.(웃음) 나한테 재간이 있다면 디테일을 기억해내는 거죠.”

-평소에 메모를 많이 하세요?

“전혀 안 합니다. 장길산도 메모 없이 썼어요.”

-아! 정말요?

“예, 거기 한 3천명 나오는데, 죽었던 놈이 다시 살아서 돌아오고 그런 대목도 있어서 나중에 정리할 때 다 뺐지만.(웃음)”

-황석영 작가의 ‘빅 데이터’로군요. 비결이 뭐죠? 사람에 대한 엄청난 관심이나 몰입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로 그거죠. 전 사람에 관심이 많아요. ‘대장부는 풍경에 현혹되지 않는다. 사람에게 현혹될 뿐’(웃음), 이런 얘기를 하거든요. 혼자서 카페에 한두 시간 앉아 있어도 난 전혀 지루하지 않아요. 사람을 관찰하니까. 크로아티아 갔을 때 카페에서 일하는 뚱뚱한 사내가 안경을 썼는데, 아마 저건 그냥 장사하던 애가 아니고 문자 흔적이 좀 있는 애인 것 같다, 누가 자주 오는데 그 사람하고 자주 앉아 뭐라 뭐라 하더라 이런 걸 기억하는 거죠.”

-현실의 인물들이 모두 문학적 캐릭터로 치환돼서 입력이 되는 건가요?

“그렇죠. 기억력이 좋다는 건, 남들하고 관점이 다른 거예요. 셜록 홈스가 남의 바짓단을 흘낏 보고는, ‘저 바짓가랑이에 뭐가 묻어 있고 쟤가 어느 길을 돌아왔다’ 이런 걸 추론하는 것처럼.”

-그럼 글의 소재가 고갈된다든가 하는 일은 별로 없겠네요?

“없습니다. 쓸거리가 없어서 암담한 적은 없어요. 어떤 얘기가 깊은 인상을 주고 재밌을지 그런 게 문제지. 집을 지을 때 철근 세우고 벽 세우고 인테리어를 하잖아요? 나는 인테리어 재료가 너무 많은 거야.(웃음) 영화 찍을 때 배역별로 갖다 쓰듯이 기억하고 있는 인물 유형들을 골라서 쓸 수 있죠.”

-선생님은 ‘소설가 황석영’이라는 말로는 다 담기지 않습니다. 막노동꾼, 구로공단 노동자, 마당극과 노래굿 제작자, 통일운동가… 이런 다양한 활동을 소설가로서의 취재 활동이라고만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젊은 시절에 이런 서원(誓願)을 한 적 있습니다. ‘나는 내 인생과 내 문학을 일치시키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요. 작품을 봤는데 작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네,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그런데 살다 보니까 이게 엇비슷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인생과 문학이) 같이 왔어요. 작가로서 행운이죠. 나는 망명하고 투옥되고 밖에서 통일운동 하고 그럴 때도 내가 무슨 활동가로서의 그런 삶을 산다고 생각 안 하고 나는 지금 문학적 삶을 살고 있다, 이를테면 내 문학이라는 큰 무대에 오른 하나의 배역으로 살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한 거죠. 그런 문학이라는 내 집이 없었으면 저는 아마 굉장히 방황하고 좌절했을 것 같아요. 근데 뒤에 든든하게 달팽이처럼 문학이라는 집을 짊어지고 댕겼으니까 자신이 있었다고 할까….”

-문학이란 게 선생님한테 뭔데요?

“그게 ‘나’예요. 나한테 ‘광대의식’ 같은 게 있거든요. 진심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애들 웃기고, 늘 분위기 띄우고… 그 밑에 있는 ‘진정한 나’가 문학이죠. 근데 나는 내가 문학한다는 걸 드러내기 굉장히 쑥스러워했어요.”

-왜요?

“왠지 일기 쓰고 시 쓰는 게 사내다운 짓이 아니라고 보였으니까. 문예반에도 들어간 적이 없어요. 내가 고등학교 여러 군데서 퇴학 맞고 공고 야간부로 졸업했는데 거기 동창들은 내가 글 쓰는 사람 된 걸 몰라요. 이름도 황수영이니까(황석영은 필명). ‘넌 뭐 하냐?’ 묻는데 내가 고만 실수했지. ‘나 글 써서 먹고산다.’ 그러니까 애들이 웃음을 참으려고(흉내) 콧날개가 벌렁벌렁해. ‘글? 뭔 글?’ 그러면서.(웃음)”

-하하, 19살에 <사상계> 신인문학상 받은 사람한테….

“어려서 좀 사색적인 문학소녀하고 사귀고 싶은데, 걔네들도 날 처음부터 오해하는 거예요. 체육계로 알아. 무슨 권투선수…. 그래서 나한테 그래요. ‘더러 책은 읽으시나요? 생각도 좀 하시고요?’(웃음)”

섬세하고 예민한 소년은, ‘교실의 광대’가 되어 재담을 늘어놓고 허세를 부렸지만, 그럴수록 아무에게도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는 공허함이 깊어갔다. 그것을 채워준 게 문학이었다. 문학은 꽁꽁 감춰둔 ‘진짜 나’를 찾을 수 있는 그의 유일한 안식처였고 영혼의 집이었다.

젊은 시절의 바람이었던
‘인생과 문학 일치시키는 작가’
“살다보니 얼추 맞아떨어져
작가로선 커다란 행운이지” “기억력 갖고 먹고 산 것 같아,
쓸거리 없어 암담한 적은 없다”
철딱서니 없는 ‘70대 청년 황석영’
“젊은 작가들과 맞짱 뜨고 싶어”

소설가 황석영이 이진순(오른쪽)씨와 경기도 고양의 한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깊은 상흔, 살인자가 되는 꿈

황석영의 성장기와 청년기는 방황과 방랑의 연속이었다. 가출과 낙제와 퇴학, 일용노동자를 따라 전국을 떠도는 방랑과 절간의 행자 생활, 3번의 자살 시도와 깊은 조울증…. 그의 은밀한 허무감과 외로움의 뿌리는 무엇이었을까? 만주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기업가로 성공한 아버지와 평양에서 서문여고를 나오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성장했지만, 그에겐 어려서부터 ‘뿌리 뽑힌 유랑민’의 비애가 있었다.

오랫동안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의 영향 아래 여기가 임시거처에 지나지 않는다는 잠재의식 속에서 성장한다.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랜 기간 ‘난민’이었다. -<수인> 1권 ‘경계를 넘다’ 390쪽.

영등포의 노동자 영단주택(집단주택)과 길 하나를 마주 보고 살던 그는 가난한 노동자의 자식들과 어울려 놀기는 했으나 계급이 다른 그들과 완전히 하나가 되진 못했고, 명문 경복중·경복고에 입학했으나 거기서는 상대적으로 ‘서울 변두리 출신’이란 자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겉으로는 쾌활하고 떠들썩한 재담꾼이었으나 내면 깊은 곳에서 그는 어딜 가나 ‘경계인’이었다. 그의 초기 문학이 유랑민, 부랑자, 떠돌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것은, 그의 이런 성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62년 고교 재학 중, 그는 단편 ‘입석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했고, 베트남전에 다녀온 뒤 황석영이란 필명으로 쓴 첫 소설 ‘탑’이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개시했다. 이후 <객지>(1971), <한씨연대기>(1972), <삼포 가는 길>(1973) 등을 잇따라 발표했다.

-책을 보니, 용케 죽을 고비를 넘기신 일이 한두 번이 아니더군요. 경복고 2학년 때 4·19 시위에 같이 나간 친구 안종길이 눈앞에서 죽어갔고, 월남전에서도 같은 중대원들 절반이 희생당하기 직전 전보명령을 받아 목숨을 건졌고, 1980년 당시 광주에서 활동하다가 우연찮게도 서울에 인세 받으러 올라간 사이 5·18이 터져서 죽음의 위험을 피했습니다. 생사의 갈림길까지 갔다가 결정적 순간에 위기를 모면한 것은, 시대의 증언자로 남으라는 신의 계시같이 여겨질 정도로, 참 기이한 우연입니다.

“지금도 죄책감이 어떤 거냐면, 매번 꿈을 꾸는데 같은 스토리야. 꿈에서 나는 살인자인데, 형사가 따라다녀요. 사무실에 가서 조사도 받고, 매번 조금씩 다르지만 언제나 내가 살인자인 꿈.”

-5·18 당시에 가족들은 모두 광주에 계신 상태였죠?

“난 공교롭게도 그때 없었고 그때 아이엄마는 현장에서 모든 걸 겪었죠. 도청을 지키던 사람들 밥도 해 먹이고 그들이 죽고 잡혀가는 것도 봤으니까. 아이엄마와 대화가 깨진 게 그 무렵부터예요. 서울에서 처음 통화가 돼서 ‘어머니가 계시고, 애들이 있는데 주부가…’ 하니까, ‘당신이 사람이야?’ 하면서 흥분하는데 큰 충격을 받았어요. 아, 이거 굉장히 격앙되어 있구나. 일상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런 앙금이 계속 이어졌어요.”

-그래도 화를 피하신 덕에 많은 일을 하셨잖아요. 82년엔 노래굿 <넋풀이>를 제작해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널리 확산시켰고, 85년엔 광주항쟁 기록을 모아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내셨죠. 당시엔 황석영 단독저자였는데 지난 5월에 전면개정증보판이 나올 때는 이재의, 전용호씨와 공저로 나왔더군요. 원래 집단작업으로 만든 건가요?

“그때 세 팀이 있었어요. 인터뷰하고 기록 모으고 하는 팀들이. 그걸 두 달 반 동안 구성하고 엮어서 출판을 했는데 그 책임을 내가 지기로 한 거지요.”

-여럿이 한 걸 왜 혼자 이름으로 내나, 오해하는 분들도 있었어요.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 당시엔 이게 영광이 아니고 핍박받는 일인데…. 난 그때 이미 <장길산>도 쓰고 제법 이름이 난 작가예요. 내가 그걸로 이름 낼 일 있나. 그냥 덤터기 쓰기로 한 거지. 잡히면 3년 이상 (징역) 산다 각오하고. 뭐, 별별 오해를 한두 번 받은 게 아니에요. 욕도 많이 먹고.”

‘철딱서니’ 없는 70대 청년

언제나 좌중의 흥을 돋우는 국보급 입담꾼이라고 해서 ‘황구라’라고 불리는 그이지만, 그에게도 쉽게 지울 수 없는 상흔이 깊게 남아 있다. 그가 태어난 이후 분단과 전쟁, 학살과 폭압으로 점철된 역사가, 그에겐 짐일 때도 있었다.

-자괴감이나 부채감 때문인가요?

“아, 왜 살아남아서 이딴 것도 못 하고 바보같이 사나, 뭐 그런 게 있는 거예요. 오에 겐자부로나 르 클레지오는 나더러 ‘서사가 많은 나라에 태어난 네가 (작가로서) 부럽다’고 했지만, 그때마다 난 시니컬하게 말했어요. ‘나는 니 자유가 부럽다.’ 정치적 사회적 압박만 억압이 되는 게 아니라, 역사라는 엄처시하(嚴妻侍下), ‘너는 이걸 반드시 해야 해. 넌 이것만 해’ 하고 은연중에 압박하는 것도 자유에 대한 억압이지. 난 사실 광주를 떠나고 싶었어. 거기서 어떻게 글을 써요? 예술하는 사람은 정치나 조직하는 사람들하고 달라서, 그런 역사에 눌리는 것도 억압이 돼요.”

-돌파구를 찾으셨나요?

“‘무등산은 알고 있다’ 그러는데, 무등산이 알긴 뭘 알아?(웃음) 그런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아, 그러면 제일 센 금기를 깨뜨리자, 그걸 깨자, 그래서 (북한에) 간 거지.”

-현대사의 주요 현장마다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도 아이러니지만, 매번 그렇게 데고 다치면서도 또 그 분란의 불꽃 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는 게 더 경이롭습니다. 그런 용기는 어디서 나옵니까?

“안기부에서 나한테 그랬어요. ‘당신, (징역) 7~8년은 살 건데, 뭐 작가한테는 겪는 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이라며? 다 글로 쓸 거잖아.’ 그 말이 맞아요. 다 망해서 밑바닥으로 가도 글 쓰면 되지, 이런 생각이 있는 거예요. 그런 생각에 ‘노름꾼 새벽 끗발 기다리듯이’ 믿고 가는 거예요.(웃음)”

-사람들은 나이 들면 좀 신중해지고 온건해진다는데, 선생님은 어떠세요?

“난 뭐 별로…(웃음) 지금도 나더러 ‘철딱서니’ 없다고들 해요. 나도 인정!(웃음) 난 지금도 젊은 작가들이랑 겨루고 맞짱 뜨고 싶거든. 새로운 형식, 표현 찾아내는 걸로 경쟁하고 싶고.”

-지금 70대 중반이 되셨는데, 시간을 거슬러 가서 30대 황석영을 만난다면 무슨 얘길 건네고 싶으세요?

“흠… 똑같은 놈을 만나 뭐라고 하지? 난 별로 안 바뀐 것 같은데. 난 32살에 <장길산>을 쓰고 있었어. 그러니 뭐 겁대가리가 없지.(웃음) 다른 30대들이랑 좀 달랐을 수 있어요.”

30대의 황석영은 ‘겁대가리’가 없었고, 70대의 황석영은 ‘철딱서니’가 없다. 그는 언제나 좌충우돌 부딪치는 모난 돌이었으나 그 덕분에 우리 문학과 삶의 삼엄한 경계가 이완되고 금기가 부서져 나갔다. 그의 방북과 망명의 긴 유랑길도 금단을 깨뜨리는 작가적 여정이었다.

<다음 회에 계속> 녹취 심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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