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재들의 술술 넘어가는 잡학 수다

2017. 6. 23.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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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나영석 PD의 ‘인문학 예능’ <알쓸신잡> 인기몰이…
유시민 등 특급 입담과 기싸움 보는 재미까지

술자리 잡담으로 인문학을 풀어내는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tvN)의 한 장면. tvN 화면 갈무리

인문학 예능 프로그램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하 <알쓸신잡>)이 화제다. <1박2일> <삼시세끼> <윤식당>을 성공시킨 나영석 PD의 신작답게 ‘여행’과 ‘음식’을 키워드로 삼는다. 유시민, 김영하, 정재승 등 예능에서 보기 힘든 출연진이 여행지에서 밥과 술을 먹으며 잡학의 향연을 벌인다.

재미의 대부분은 인적 구성에서 나온다. ‘지식소매상’ 유시민은 ‘문·사·철’(문학·사학·철학)로 대변되는 인문학 외에 낚시광으로 어류 지식까지 뽐낸다. 그에겐 성마른 정치인의 이미지가 있었으나, <썰전>을 통해 정치평론가로 변모했고, 이제 방송인으로 대중적 호감을 쌓고 있다. 황교익은 맛 칼럼니스트로, ‘먹방’의 전문성을 더해준다. 그의 칼럼이 단순히 음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산업·환경의 맥락에서 식문화를 논해왔으니, 그의 잡학도 수준급이다.

다채롭게 교차되는 성찬의 전례와 말씀의 전례

김영하는 베스트셀러 작가답게 서사나 문예는 물론 잡상식이 많다. 본래 소설의 행간을 메우는 건 잡학이 아니던가. 그는 유시민·황교익보다 나이가 아래고, 교양의 범위가 겹치지 않는데다, 댄디하고 세련된 라이프스타일로 차별성을 갖는다. 다크호스 정재승은 재미의 일등공신이다. ‘뇌과학자’란 독보적인 분야와 이과적 사고방식이 신선감을 안긴다. 과학자이지만 대중 강연이나 글쓰기를 통해 폭넓은 소통 능력을 쌓아온 내공이 십분 발휘된다. 이들 사이에 유희열이 사회자로 놓이는 것도 절묘하다. 대화가 너무 전문성을 띨 때, 그는 무식자를 자처하며 시청자의 눈높이를 환기한다. 그도 나름 교양인이지만, 음악인으로 지식에 대한 부담감이 적고, 몸에 밴 유려한 감성으로 자의식 강한 출연자들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한다.

이들이 여행지를 둘러보고 밥을 먹으며 말을 쏟아낸다. 말하는 입과 먹는 입, 성찬의 전례와 말씀의 전례가 다채롭게 교차된다. 이순신에서 미토콘드리아까지 순식간에 논의가 날아간다. 유시민과 황교익의 은근한 기싸움도 재미를 더한다. 나이와 분야가 다소 겹치는 와중에, 가장 연장자인데다 지식인으로서 자부심이 강한 유시민이 리더가 되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화를 이끄는 가운데, 음식에서만은 우위를 놓치고 싶지 않은 황교익이 벌이는 미묘한 신경전이 메뉴 선정 갈등으로 드러난다.

<알쓸신잡>은 강연이나 토론이 아니라, 술자리 잡담으로 인문학을 풀어낸다. 이는 지식의 개념과 지식에 대한 태도가 변했음을 말해준다.

최근 음식을 먹으며 토크를 하는 프로그램이 늘었다. <인생술집>은 연예인들의 신변 토크쇼이니 비교 대상이 아니지만, <서가식당>은 음식을 먹으며 책에 대한 대화를 나누니 비교할 만하다. <서가식당>은 첫 회에서 <초한지>에 대한 토크를 들려주었다. 예전 같으면 무난한 기획에 식당이란 설정을 가미한 것이 나름 신선해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알쓸신잡>과 비교하니 여간 지루한 게 아니다. 스튜디오냐 여행지냐의 차이도 있지만, 대화가 정해진 범위 내에서 이뤄지느냐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행보를 보이느냐가 결정적 차이다.

<서가식당>은 마치 책과 같은 선형적 논의 흐름을 갖는다. 목차와 단락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잔가지가 쳐진다. 그러나 <알쓸신잡>은 하나의 키워드에서 다음 키워드로 순간 이동한다. 비선형적 논의의 흐름은 마치 검색어와 링크를 클릭하며 다른 장으로 들어가는 하이퍼텍스트 구조와 닮았다.

혼술족에게 판타지 제공하는 ‘술방’

오늘날 <서가식당> 같은 교양 프로그램은 흥미를 끌기 어렵다. <초한지>에 대해 아무리 알찬 토크를 진행하더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 책이나 검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식을 넘기 어렵다. 그보다는 일상 대화에서 어떤 키워드가 튀어나오는지, 그 키워드가 다음 키워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더 관심을 끈다. 방대한 지식의 바다에서 키워드와 키워드 사이의 연결고리만 알면, 나머지는 검색으로 메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식인은 특정 분야의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전체적인 지식의 판도를 개괄하고, 검색으로 지식을 찾아내며, 편집과 링크를 통해 새로운 지식의 배치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또한 학제 간 장벽이 허물어지고 융합·통섭·크로스오버 등 학문 교류가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다. 4차 산업혁명의 논의는 압점으로 작용한다. 유시민이 꺼내놓는 전통적 인문학에 정재승이 풀어놓는 자연과학적 사유가 버무려지는 것이 21세기 인문학이다. <알쓸신잡>은 하이퍼텍스트 시대의 사고 흐름과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융합과 통섭을 산만한 예시를 들어 보여주는 것이다.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란 제목은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과 유사한 작명법이지만, 그보다 뜻이 깊다. 본래 교양은 실용이 아니라 쓸데없음을 지향한다. ‘황우석 사태’와 ‘미네르바 사태’를 겪은 뒤 지식은 더 이상 대학 안에 있지 않다. 실용의 이름으로 대학의 인문학이 통폐합되는 와중에, 대중 사이에 인문학 열풍이 불었다. 인문교양을 둘러싼 사회적 기류가 변한 가운데, 예능 프로그램이 지식인들에게 술자리를 펴주고, 그들의 한담을 ‘신비한’ 사물을 대하는 눈초리로 채집하여 중계한다. 혼밥족에게 ‘먹방’이 함께 먹는 판타지를 제공했듯이, 혼술족에게 ‘술방’은 괜찮은 술친구와 함께 마시는 판타지를 제공한다.

<알쓸신잡>의 가장 큰 구멍은 여성의 부재다. <무한도전> <아는 형님> <신서유기> 등 남성 출연자 일색의 예능 프로그램이 방송계를 장악하고 있으며, 지식인 사회가 여성을 배제해왔다는 지적이 어우러져 메울 수 없는 큰 구멍으로 보인다. 그동안 미디어에서 여성은 지성과 어울리지 않는 존재로 그려졌다. 가령 외국인 여성의 토크는 ‘미녀들의 수다’가 되고, 외국인 남성의 토크는 ‘비정상회담’이 되는 식이다. 혹자는 여성을 참여시키고 싶어도, 현재 출연자들과 동급의 여성 지식인을 섭외할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인물 부족은 핑계가 되지 못한다. 인물 부족을 이유로 ‘여성 30% 내각 기용’ 공약을 지키기 어렵다는 변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과 같다. 공적 영역에서 여성이 퇴출되거나 조명받지 못하는 구조를 놓아둔 채, 인물 부족을 탓하는 건 순환논법에 빠져 개선할 의지가 없음을 드러낸다.

여성 부재는 논의의 빈틈을 낳는다

여성 부재는 논의의 빈틈을 낳는다. 가령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논할 때, 여성주의적 시선으로 읽으면 전혀 다른 의미가 도출되지만, 이를 짚어줄 사람이 없다. 자연과학이 21세기 인문학의 중요한 일부이듯, 페미니즘 역시 전 세대 인문학의 한계를 뒤집으며 보강한다. 안경환(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남자란 무엇인가>는 20세기 관점으로 본다면 교양서로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책은 얼마나 낙후된 의식을 드러내는가. 남성들끼리 어울리는 술자리 문화가 얼마나 여성을 대상화하고, 남성을 저열하게 만드는지 깨달아야 한다. 나영석 PD가 <꽃보다 할배> 이후 <꽃보다 누나>를 만들었듯이, <알쓸신잡> 이후 더 나은 여성판본을 만들 것이란 기대를 품어본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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