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 허재 감독 "후배들 농구열정 더 불태웠으면"

이웅희 입력 2017. 6. 23.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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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국가대표 허재 감독이 스포츠서울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7. 6. 19최승섭기자 thunder@sportsseoul.com

[스포츠서울 이웅희기자] “32년이나 됐어? 그렇겠네. 대학 시절 스포츠서울에 내가 나온 것을 보며 좋아했으니….”

본지 창간 32주년을 즈음해 만나 얘기를 나눈 남자농구 국가대표팀 허재(52) 감독의 소회다. 허 감독은 본지가 창간된 1985년 중앙대학교 2학년 재학 중이었다. 풋풋한 대학생이었지만 당시부터 한국 농구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1984년 중앙대에 입학한 허재는 입학과 동시에 그 해 농구대잔치에서 신인상, 어시스트상, 인기상을 휩쓸었다. 1987년 10월에는 단국대와의 경기에서 전반 중앙대의 54점을 모두 넣는 등 혼자 75점을 넣으며 한 경기 개인 최다득점 신기록을 세웠다. 종전 프리팀컴 국제농구대회에서 기록한 선배 이충희의 67점을 뛰어 넘었다. 1994~1995 농구대잔치 MVP, KBL 1997~1998시즌 준우승팀 최초 MVP 선정, 은퇴 후 KCC 감독으로 우승을 이끌고 최초로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우승을 차지하는 등 긴 시간, 영광의 순간을 본지와 함께 했다.

◇즐겁게 신문을 봤던 게 일상
본지 창간 당시 대학생이었던 허 감독은 컬러로 발행된 신문에 자기 기사와 사진이 실리는 게 신기했다. 그는 “스포츠서울이 처음 나왔을 때 이전 신문과 달라 다들 놀랐다. 그 때 가로쓰기, 전면 컬러 등으로 이전 신문들과는 차별됐다. 가판대에 신문이 남아나질 않을 정도로 인기였다. 대학생이었던 내 기사도 스포츠서울에 나왔는데 신기해하며 좋아했던 게 기억난다. 더 신나게 농구했던 것 같다. 내 기사가 신문에 나왔는지 살펴보던 게 일상이었다”며 웃었다. 대학 시절부터 내로라하는 실업팀 선배들을 상대로 농구대잔치에서 맹활약했던 허 감독이 이슈였던 게 당연했다. 대학생 신분임에도 대표팀에 뽑힐 정도로 발군의 기량을 과시했던 허 감독은 1988년 기아(현 모비스)에 입단했고 스타성을 마음껏 과시했다. 클러치 능력을 뽐내며 1994~1995 농구대잔치에선 기아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1997년 프로농구가 출범했고, 허 감독의 기아는 원년 챔피언이 됐다. 한국 나이로 33세에 프로농구가 탄생한 게 허 감독에게 아쉬웠다. 허 감독은 “20대 때 프로가 출범됐다면 더 좋은 기억들을 많이 만들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내 나이여서 할 수 있는 플레이도 많았다. 프로를 경험하지 못하고 은퇴하신 선배도 많은데 그래도 난 복이 있는 편”이라고 말했다. 허 감독의 최고 시즌은 1998년이다. 지금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1998년 LG와의 4강 플레이오프에서 오른 손등뼈 골절 부상을 당했고, 현대(현 KCC)와의 챔피언결정전 출전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투혼을 발휘해 출전을 강행했다. 챔피언결정전 5차전에선 현대 조니 맥도웰의 팔꿈치에 오른쪽 눈썹 부위를 맞아 7바늘이나 꿰매고 경기를 치렀다. 7차전까지 가는 혈전 끝에 시리즈전적 3승4패로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지만 허 감독은 준우승팀 선수 최초로 챔피언결정전 MVP를 수상했다. 허 감독은 “지고 싶지 않았던 승부욕 때문이었던 것 같다. 손을 다쳤을 때 스포츠서울 기자가 직접 찾아와 취재했던 기억도 난다. 의사는 뛰지 말라고 했지만 빠질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우승을 놓치긴 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치열했던 내 농구를 그래도 보여줬던 시절이지 않나 싶다”고 회고했다.

◇후회없이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
허 감독은 2003~2004시즌 정규리그 우승 후 2004년 3월 유니폼을 벗었다. 농구대잔치 MVP(3번), KBL 챔피언결정전 MVP(1번) 등 실업과 프로 모두 정상에 서봤다. 지도자로도 성공신화를 썼다. 2005년 5월 KCC의 지휘봉을 잡은 허 감독은 2008~2009시즌 KCC의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이끌며 최초로 선수와 지도자로서 모두 우승을 차지했다. 10년 가까이 KCC를 지휘했던 허 감독은 이제 남자농구 국가대표팀의 전임 감독직을 수행하고 있다. 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스타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편견도 깨뜨렸다. 허 감독은 “농구인생에서 후회없이 살았고 아쉬운 것은 없다. 누릴 것을 다 누리며 살았던 것 같다. 앞으로도 내 농구인생은 계속 이어질텐데 농구 발전에 힘을 보탤 수 있도록 하고 싶다. 대표팀 감독도 그런 면에서 내 조그만 힘을 더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고 밝혔다.

자신의 말처럼 허 감독은 선수 시절, 사령탑 시절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렸다. 출중한 기량 만큼이나 운도 따랐다. 2002년 신인드래프트에서 당시 선수 신분으로 TG 전창진 감독과 함께 드래프트 현장을 찾았던 허 감독은 1순위 지명권을 얻고 환호하며 좋아했다. 허 감독은 당시 1순위로 뽑은 김주성과 함께 정상의 기쁨을 맛보고 유니폼을 벗었다. KCC 감독을 맡은 뒤에도 1순위 지명권을 뽑아 221㎝의 하승진을 지명해 우승을 차지했다. 허 감독은 “내가 생각해도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신의 손이라고도 하던데 그 정도는 아니다(웃음). 하지만 운이 좋아서, 선수가 좋아서 우승했다는 말을 듣기 싫어 더 열심히 했다”고 강조했다.

농구국가대표 허재 감독이 스포츠서울과의 인터뷰에 앞서 진지하게 자기 생각을 밝히고 있다. 2017. 6. 19. 최승섭기자 thunder@sportsseoul.com
◇후배들 농구 열정 더 불태웠으면….
태극마크를 달고 뛰던 허 감독은 이제 새파란 후배들을 이끌고 국제대회를 준비 중이다. 오는 8월 레바논에서 열리는 FIBA(국제농구연맹) 아시아컵에 참가하게 된다. 허 감독은 “실력있는 선수들을 모은 게 대표팀이다. 하지만 팀을 구성하기도 쉽지 않다. 소속팀들의 이해관계도 얽혀있다. 한국에서 나름 잘하는 선수들을 모아서 출전한다고 하지만 국제무대에서 우리 선수들은 체격조건, 기술 등에서 모두 밀린다. 중동 농구도 많이 성장했고, 만만한 팀이 없다”고 우려했다. 더 큰 걱정은 선수들의 정신력이다. 허 감독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체격조건이 밀리는 것은 예전에도 그랬다. 그래도 우리가 뛸 때는 어떻게든 한번 이겨보려고 악착같이 달려드는 맛이 있었다. 지금 선수들은 ‘열심히 하는데 왜 선배들은 자꾸 그렇게 얘기할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선배들이 보기에 투지, 열정이 부족하다. 후배들이 농구 열정을 더 불태웠으면 좋겠다”며 아쉬워했다.

허 감독의 쓴소리와 걱정은 한국 농구에 대한 애정때문이다. 허 감독의 마지막 말에도 그 마음이 묻어났다. 그는 “스포츠서울이 창간됐을 당시 농구 인기는 엄청났다. 그 인기가 사라진지 꽤 됐다. 농구인들이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언론도 농구 소식을 많이 다뤄줬으면 좋겠다. 스포츠서울이 앞으로도 농구 얘기를 많이 실어주면 좋겠다”며 자리를 갈무리했다.
iaspire@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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