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예술, 자연.. | 가수 서수남] "아직도 인생의 팔도유람 중, 구경 한 번 잘하고 있습니다"

글 월간산 손수원 기자 2017. 6. 22. 18:1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964년 데뷔 후 1969년 '서수남·하청일' 명콤비로 종횡무진 활약16억 빚더미 청산 후 더불어 사는 삶 실천하며 제3의 삶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노래가 있다. 사랑을 표현하는 노래부터 슬픔, 꿈, 희망, 인생, 가족 등을 주제로 한 노래 등 세상사 무엇이든 노래가 된다. ‘서수남·하청일’은 7080세대에게 즐겁고 재미있는 노래를 들려주던 ‘콤비 중의 명콤비’다.

[월간산] ‘서수남 · 하청일’ 명콤비로 7080시대를 풍미했던 서수남씨. 가수로서, 강사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가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기도 했지만 그 시련을 묵묵히 이겨내며 한층 더 인간적으로 성숙한 삶을 살고 있다.

“버스를 타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설악산 양양 낙산사 / 대관령 고개넘어 강릉 경포대 삼척 촉석루 울릉도 성인봉 태백산 오르다 / 지쳐 내려와 충청도 길로 넘어가요~“ -팔도유람 中-

“답답하고 지루하던 날이 지나고 /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오면은 / 산수 좋고 경치 좋은 산을 찾아서 / 랄랄랄랄 노래하며 행군을 하네 / 즐거웁게 요르레오~ / 텐트를 치고 쌀을 씻어서 밥을 지으면 / 너도 나도 입맛이 좋아 반찬 없어도 꿀맛이지요” -산이 더 좋아 中-

당시 그들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노래로 사람을 웃게 만들고 흥을 돋우는 데에는 ‘서수남·하청일’만 한 가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세월이 흘러 ‘서수남·하청일’은 추억으로 남았고 서수남은 제3의 인생을 살고 있다. 여전히 ‘장다리’의 모습이 친근한 서수남씨를 청계산에서 만났다. 건강을 위해 산을 자주 찾는다는 그는 카메라에 봄 산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Q 카메라를 능숙하게 다루시네요.

A

“네 필름카메라 시절부터 줄곧 찍었어요. 한동안 잊고 있다가 디지털카메라가 나오고 나서부터 다시 시작했죠. 아무래도 블로그를 하니까 자연스럽게 사진을 찍게 되더라고요.”

Q 노래는 언제부터 하신 거예요?

A

“집에 조그만 라디오가 있었어요. 당시엔 채널이 별로 없어서 KBS, TBS, AFKN 정도였지요. 저는 24시간 음악만 트는 AFKN을 즐겨 들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고등학교 때부터 통기타를 배우고 팝송을 부르고 싶은데 가사를 알 길이 없어 명동 뒷골목에 가서 미국 음악잡지를 구해 봤어요.”

1962년 대학교 2학년 때 MBC 콩쿨대회에서 입상하면서 가수의 첫 걸음을 뗀 그는 이후 미8군에서 노래하면서 1964년 DBS 동아방송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남성 4인조 컨트리 보컬 그룹 ‘아리랑 브라더스’를 결성해 정식 데뷔했다.

Q 집안에선 반대하셨을 것 같은데.

A

“어머니故 박순금, 2010년 작고가 ‘가수는 나이 들어서 깡통 차는 직업’이라면서 많이 반대하셨죠. 제가 한양대 화학과를 나왔는데, 사실 어머니께서 제가 노래하지 말라고 저 몰래 원서를 넣으신 거였어요. ‘화학과라도 나와야 나중에 비료공장에라도 취업할 수 있다’는 생각이셨대요. 결국 ‘딱 10년만 가수하고 그만 두겠다’고 해서 허락 받았죠. 그런데 53년째 가수로 살고 있네요.”

Q ‘서수남·하청일’은 어떻게 결성되었나요?

A

[월간산]상반된 캐릭터로 코믹한 이미지를 쌓으며 인기를 끌었던 서수남(오른쪽) 하청일 콤비.

“저하고 하청일, 석우장, 천정팔이 ‘아리랑 브라더스’의 멤버였어요. 대한민국 최고의 보컬그룹을 꿈꾸며 뭉쳤지만 국수도 제대로 못 사먹을 만큼 가난해서 결국 1년도 못 채우고 팀을 해체했어요.

이후 1969년 MBC가 개국하면서 김경태PD가 ‘‘웃으면 복이 와요’란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서로 상반된 분위기의 두 사람이 뭉치면 재밌지 않겠느냐’며 하청일과 듀엣 결성을 제의했어요. 저는 187cm의 키에 비쩍 마른 체형이었고, 하청일은 175cm에 오동통하고 귀여운 체형이었죠. 당시 텔레비전 시대로 막 넘어가는 시점에서 색다른 비주얼을 가진, 소위 ‘먹힐 만한’ 코믹듀엣이었던 거죠. 하청일은 생김새는 물론, 성격도 취미도 식성도 다 달랐지만 음색의 화음만큼은 기가 막혔어요.”

그렇게 ‘서수남·하청일’ 듀엣이 결성되었고 ‘동물농장’, ‘팔도유람’, ‘수다쟁이’ ‘한 번 만나줘요’ 같은 코믹송이 인기를 끌었다. 부르는 노래들이 경쾌하고 재미있다 보니 코미디프로그램이나 어린이프로, 게임프로 같은 곳에 늘 단골로 출연했다. 

Q 데뷔부터 비교적 탄탄대로였네요.

A

“그랬죠. ‘서수남·하청일’이 뜨니까 그 뒤로 듀엣이 많이 나왔어요. 저희가 듀엣 전성기를 연 셈이었죠. 저희가 20년 가까이 사랑받을 수 있었던 건 저희 노래가 밝고 건전하고 친근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동요 ‘과수원길’은 우리가 불러 국민가요가 됐고, ‘산이 더 좋아’란 노래는 유명한 산노래로 지금도 사랑받고 있어요.”

Q ‘서수남·하청일’을 이야기할 때, ‘팔도유람’을 빼놓을 수 없죠.

A

“원래 있던 외국곡에 제가 가사를 붙였어요. 우리나라에는 예전부터 ‘빈대떡 신사’ 같은 만요漫謠의 전통이 있었거든요. 그걸 신세대풍으로 부른 것이었는데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셨죠. 이 노래 덕분에 ‘서수남·하청일’이 데뷔 때부터 확 떴죠. 우리 팀의 캐릭터처럼 된 곡이라서 정말 많이 부르고 다녔어요.”

Q 혼자 ‘팔도유람’ 부르느라 여러 명 숨 넘어 갈 뻔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죠.

A

“둘이면 괜찮은데 혼자는 좀 벅차죠. 가사도 좀 길어요? 한 번 까먹으면 도저히 수습이 안 되서 다음에 나올 가사 아무거나 부른 적도 있었어요. 경주보문단지 호텔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고 만찬공연을 한 적이 있었어요. 어찌나 긴장했던지 한 절을 똑같이 반복해 부르고 말았어요.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어요. 공연을 마치고 연출자한테 ‘자진납세’했는데 ‘어? 그랬어? 이 노래 틀린 거 아무도 몰라, 나도 몰랐는데’라는 거예요. 하기야 그 가사가 그 가사 같으니 누가 그걸 확인했겠어요.”

Q 저도 어릴 때 ‘서수남·하청일’ 노래 굉장히 많이 불렀어요. 아, 자동펌프 광고 노래도 입에 달고 살았어요. “물 걱정을 마세요, 한일한일자동펌프~”

A

“1976년에 제가 만들어 부른 CM송이에요. 그때 그 회사와 인연을 맺어 1990년까지 짤순이, 선풍기, 믹서기, 석유난로 등 광고모델을 했어요.”  

1980년대 중반까지 최고 인기를 누린 ‘서수남·하청일’이었으나 데뷔 15년 정도 되니 인기가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청일은 스포츠용품 사업을 시작했고 일이 잘 풀려 가수가 부업처럼 되었다. 서수남도 “발표하는 노래도 이 노래가 저 노래 같고 실력이 바닥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월간산]187cm의 큰 키가 트레이드마크인 서수남이 청계산에서 훨씬 더 키 큰 나무 옆에 섰다. 둘 다 키가 크는 동안 숱한 어려움을 이겨냈다는 것이 공통점일까.

Q 각자의 길을 가야 할 시기였네요.

A

“나는 이제 무얼 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생각한 것이 음악학원이었어요. 그런데 당시 음악학원은 클래식을 가르치는 곳이어서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한 사람만이 음악학원을 세울 수 있다더군요. 그래서 ‘나는 대중음악을 가르칠 것이고 이제까지 가수 경력이면 되지 않겠냐’고 설득했죠. 그래서 1988년 ‘서수남 음악학원’을 열게 된 거예요.”

Q 당시 인기가 대단했지요?

A

“학원을 노래교실과 기타교실로 나눠 운영했는데 노래교실 인기가 대단했어요. 처음 3년간은 통기타에 맞춰 노래를 가르쳤어요. 이후 일본에서 가라오케 기계가 들어오고 노래방이 생기면서 누구나 ‘나도 가수다’ 분위기가 됐어요. 노래교실이 ‘대박’이 났죠. 주부들 사이에서 ‘서수남 노래교실에 나가지 않으면 유행에 뒤진다’는 말까지 있었어요. 

‘서수남·하청일’은 1990년에 해체되었지만 그는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수강생 200~300명은 기본이고 많을 땐 1,000명도 거뜬했다. 백화점문화센터에서 노래 강좌 요청도 쇄도해 일주일에 20번 강좌를 나가기도 했다. ‘선생님’ 소리 들으며 돈도 많이 버니 ‘등 따습고 배부르던 시절’이었다.

돈은 많이 벌었지만 쓸 시간이 없을 정도였다. 너무 지쳐서 ‘이제 그만 좀 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주변 사람들이 ‘일 년만 더 하라’고 만류했다. 그렇게 음악학원은 12년째를 맞았고 결국 사달이 났다.

Q 하루아침에 빚쟁이가 되셨다는데.

A

“2000년에 아내가 쪽지 한 장 써놓고 사라졌어요. 그 다음날부터 채권자들이 저를 찾아와 괴롭혔어요. 빚이 16억 원이었어요. 아내가 음악학원 살림을 돌보고 있었는데 부동산 등에 투자하다가 잘못된 거였죠. 저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돈보다는 지난 세월 동안 가수를 하며 쌓은 모든 것, 가정을 지켜나갔던 모든 것들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는 허탈감이 더 컸어요. 음악학원도 다 접었어요. 주부들 보기가 부끄러웠죠. 평소에 ‘이혼하지 마라,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한다’고 말했는데 제가 그런 일을 당했으니….”

Q 정말 힘드셨겠네요.

A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고, 아파트 창문을 열고 밑을 내려다볼 때마다 나쁜 마음을 먹기도 했어요. … 저를 잡아 주신 분이 어머니세요. 당시 나이 84세셨는데 저에게 ‘포기하기엔 아직 젊다. 다시 시작하면 이겨낼 수 있으니 마음 굳세게 먹으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어머니는 매일 제 침대 옆에서 두 시간씩 저를 위해 기도하면서 우셨어요. 결국 마음을 다 잡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 6년 만에 빚을 다 갚았죠.”

Q 어떻게 보면 기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허무했겠네요.

[월간산]고등학생 때 등산반에 들기도 했던 그는 요즘도 산을 즐겨 찾는다.

A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간 느낌이었어요. 아무 것도 없던 옛날로 돌아간 느낌. 내가 가진 것들이 진정한 내 것이 아니었어요. 그냥 내가 쓰는 잠깐 동안만 내 것인 거죠. 돈도, 인기도 마찬가지예요. 이제부터라도 하루하루를 후회 없이 충실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빚을 갚아가며 “이제 인생을 조금씩 정리해 나갈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 경험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004년부터 인터넷 블로그 ‘서수남의 마이 라이프suhsoonam.com’를 만들어 운영했다. 

그가 운영하는 블로그는 2009년부터 2011년까지 파워 블로그에 선정되었으며 현재 그의 블로그 이웃은 1만1,969명이다. 이제까지의 방문자 수는 627만9,282명에 달한다. 

Q 블로그 운영이 쉽지 않았을 듯합니다.

A

“제가 컴퓨터 같은 건 잘 다루는 편이었어요. 한창 때는 일하는 시간을 줄이면서까지 블로그를 운영했어요. 블로그를 보면 그것을 운영하는 이가 사는 모습, 생각하는 것, 인간성이 다 드러나요. 그래서 블로그를 한다는 것은 내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기도 해요. 내 일기장을 다른 사람들에게 당당히 보여 줄 수 있다면 괜찮게 사는 것 아닌가요?”

그의 블로그엔 일상생활부터 방송, 사진, 맛집, 골프, 등산, 노래, 여행, 영화 등 다양한 분야의 글들이 올라 있다. 지금은 좀 뜸하지만 그가 김학래, 이홍렬, 고두심, 전유성 등의 명사를 만나 인터뷰하고 쓴 글도 있다. 그는 “이제까지 인터뷰한 이들은 모두 인생에서 배울 것이 많았던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Q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십니다.

A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제 더불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매년 봉사단체와 함께 아프리카 우간다에 가서 봉사활동을 해요. 고아원, 도서관 등을 지어주고. 8년 정도 되었습니다. 현지 사람들이 저를 ‘한국에서 온 키다리아저씨’라고 불러요. 내 손길이 남에게 희망을 주는 일이니 내 자신에게 오는 기쁨이 다르죠. 국내에서 봉사활동이나 자선공연도 자주 하고 있고요.”

이렇게 요즘도 24시간이 모자라다시피 하는 생활을 하다 보니 건강이 나빠질 만도 한데 74세가 된 지금도 크게 아픈 곳 없이 건강하다고 한다.

Q 운동을 즐기시나요?

A

“허리디스크로 고생하면서 2010년부터 헬스클럽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 외엔 등산을 하거나 골프를 치지요. 한창 산에 다닐 땐 거의 매주 등산을 했던 적도 있었어요.”

Q 이건 의외인데요. 고등학교 때 인수봉에도 올라가셨다고.

[월간산]청계산을 오르는 도중 잠시 쉬는 서수남.

A

“고3 때 등산반을 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올라갔었죠. 어찌어찌 올라가긴 했는데 나중엔 내려오지 못하겠더라고요. 침니 바위를 팔다리로 버티고 내려와야 하는데 도저히 무서워서 안 되는 거예요. 결국 해가 저물 즈음에서야 겨우 내려왔지요. 또 한 번은 등산반 친구들 두 명과 무전여행을 갔어요. 정말 돈을 한 푼도 안 들고 양양까지 간 거예요. 사정해서 버스를 타고 기차를 몰래 타면서 다녔죠. 밥은 민가에서 얻어먹고요. 무전여행이 아니고 그냥 거지였어요. 그러다가 삼척의 한 식당에서 무전취식을 하다가 걸려서 파출소로 끌려가 서울로 돌아왔죠.”

Q 그런 경험들이 ‘팔도유람’이나 ‘산이 더 좋아’에 묻어난 거군요.

A

“그렇죠. 산에 다니고 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삶의 지혜들을 많이 얻었죠. 그런 것들을 노래 가사로 쓰니 더욱 친근하게 받아들이신 것 같아요. ‘산이 더 좋아’라는 노래는 외국곡에 제가 가사를 붙인 거예요. 젊은 시절 산에서 텐트치고 밥 지어 먹던 추억, 그 행복했던 느낌들을 적었어요. 가사도 건전하지만 하모니카와 요들이 잘 어우러져 인기가 좋았죠. 그런데 요즘은 워낙 공기가 안 좋아져서 산에 자주 못 가게 되었어요. 정말 큰일이에요.”

Q 공기가 좋아져야 산도 더 좋아질 텐데요.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A

“퇴보하지 않는 사람으로 계속 살고 싶어요. 항상 감사하며 봉사하며 살고 싶고요. 음악적으로는 새로운 앨범을 준비하고 있어요. 요즘도 계속 작업 중인데 EDMElectronic Dance Music 장르예요. 음악의 유행은 바뀌는 거니까.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도 해봐야겠다 싶었어요. 올해 중순쯤에는 발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그는 우연찮게 음악을 접해 가수가 되어 최고의 인기를 누리다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지만 다시 일어섰다. 그는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더불어 사는 삶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이제는 음악에서도 새로운 도전을 즐기는 그는 아직도 인생의 팔도유람을 즐기고 있는 듯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가 훗날 인생 팔도유람을 모두 마치는 날, 아마도 그는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지만요. 어휴~ 구경 한 번 잘했네!”라고 말하지 않을까.

▶ 실컷 놀았는데도 저녁… '한나절 행복' 찾아 춘천으로, 파주로

▶ 자동차 타이어에 새겨진 숫자의 비밀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