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연재 '유산록 따라 가는 산행' | 퇴계 이황의 <유소백산록>] 암자를 동선 삼았지만 흔적 없어.. 무성한 철쭉만 옛 자취 전해

월간산 글 박정원 부장대우 입력 2017. 6. 22.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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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자락길과 중복 코스 많아.. 퇴계 유산거리는 총 30km 넘을 듯

‘세 봉우리(석름봉 · 자개봉 · 국망봉)가 8, 9리쯤 떨어져 있다. 그 사이 철쭉이 숲을 이루어, 바야흐로 활짝 피어 있다. 꽃이 한창 무르익어 화사하게 흐드러져 마치 비단 장막 사이를 거니는 듯하다. 축융祝融의 잔치에서 취한 것 같기도 하고 매우 즐거웠다. 국망봉 정상에서 술 석 잔에 시 일곱 수를 쓰는데 해가 이미 기울었다. (후략)’ ― 퇴계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에서.

퇴계 이황(1501~1570)은 1549년(명종 4) 소백산에 처음 올랐다. 그 감흥을 고스란히 <유소백산록>에 담았다. 그게 지금까지 전하는 최초의 소백산 유산록이다. 퇴계보다 조금 앞선 인물인 신재 주세붕(1494~1554)도 소백산 유산을 하면서 시와 유산록을 남겼지만 현재 전하지 않는다. 일부 시詩만 몇 수 전할 뿐이다. 따라서 퇴계의 유산록은 이후 소백산을 오르는 많은 선비들의 교본이 되어 비슷한 형태의 유산록이 잇달아 등장하는 계기가 된다.

퇴계는 어릴 때부터 영주와 풍기를 자주 왕래했으나 산에 오를 기회가 없었다. 1549년 드디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실행에 옮긴다. 그게 4월 신유일이다. 현재의 양력으로 환산하면 5월 17일이다.

‘5월의 꽃’ 철쭉이 만개하는 계절이다. 활짝 핀 철쭉꽃을 보기 위해 퇴계 이황이 유산했던 468년 전 길을 따라 가본다. 배용호 영주문화연구회 전 회장과 김덕우 영주문화 전 편집국장(영주여고 국어교사), 소백산국립공원사무소 자원보전과 박훈진씨와 탐방시설과 윤지현씨가 동행하며 길 안내와 유적지 설명을 곁들였다.

퇴계는 백운동서원에서 하룻밤을 자고, 초암사→석륜사(1박)→국망봉→석륜사(1박)→석성→죽암폭포→관음굴(1박)→박달현→비로사→욱금 쪽으로 하산하면서 총 4박5일간의 전체 일정을 끝낸다.

출발은 백운동서원.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며 신재 주세붕이 세웠다. 조선시대 왕으로부터 편액扁額‧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이다.

국내 주자학의 효시인 고려 학자 안향安珦을 배향하고 유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설립했다. 명종이 1550년 친필로 ‘소수서원’으로 쓴 액을 하사하면서 이름을 바꿔 지금에 이른다.

퇴계는 여기서 유생들과 함께 1박을 한 뒤 죽계구곡을 따라 국망봉으로 접근한다. 죽계구곡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계속된다. 퇴계는 소수서원에 있는 취한대翠寒臺를 1곡으로 하고, 위로 올라가면서 9곡까지 하나씩 이름을 붙였다. 주세붕과 신필하도 같은 과정을 거친다.

반면 후대 인물인 하계 이가순(1768~1844)은 위에서 내려오면서 1곡부터 9곡까지 명명하면서 바위에 글자를 아예 새겨 버렸다. 그게 지금까지 전하면서 죽계구곡을 혼동하는 사례가 발생한다. 지금 공단에서 안내판을 세운 죽계4곡이 대표적이다. 용추폭포는 퇴계는 7곡, 이가순은 4곡으로 칭했는데, 안내판에는 퇴계가 4곡으로 붙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가순이 석각으로 남겼기 때문에 생긴 혼란이다.

구곡의 유래가 된 중국 무위의 구곡도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붙였다. 60개 남짓 되는 우리나라 구곡 대부분 아래에서 위로 번호를 매겼다고 한다. 이가순이 석각으로 남겨 혼란을 부추긴 꼴이다.

<소백산 유산록>은 1549년 퇴계가 최초

어쨌든 소수서원 취한대가 퇴계의 죽계1곡이다. 취한대는 중국의 옛 시 ‘송취한계松翠寒溪’에서 따온 것으로, 푸른 산의 기운과 시원한 물빛에 취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의미다. 취한대 옆 바위에 주세붕이 새긴 ‘敬’자가 아직 그대로 전한다. 공경과 근신의 자세로 학문에 매진하라는 의미로 새겼다고 안내판에 설명한다. 퇴계는 죽계구곡을 따라 국망봉으로 접근했지만 지금은 계곡 옆으로 길도 없고 중간에 저수지도 생겼다. 소백산자락길 중 선비길과 구곡길이 죽계구곡을 최대한 따라가게 조성돼 있다.

퇴계 2곡은 금성반석金城盤石. 후세에 단종 복위를 꾀한 금성대군의 한이 서린 곳이다. 지금 순흥향교 자리다. 3곡은 백자담柏子潭. 송림순흥저수지 안에 잠겨 있다. 4곡은 이화동梨花洞. 퇴계의 평민 제자 배순이 살던 마을과 가깝고, 배나무가 많았다.

5곡 목욕담沐浴潭부터는 제대로 된 계곡으로 따라 올라갈 수 있다. 6곡은 청련동애靑蓮東崖. 푸른 연꽃이 있고, 그 동쪽엔 바위 벼랑이 있는 곳이다. 퇴계 유산록에 나오는 안간교 인근이다. 안간교는 지금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나 청련동애 바로 옆에 석축 흔적이 어렴풋이 보인다. 7곡은 용추폭포龍湫瀑布. 용이 구름과 비를 삼키는 듯한 폭포다. 초암사 바로 앞에 있다.

퇴계는 초암草庵: 지금 초암사을 원적봉의 동쪽과 월명봉의 서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금 위 계곡에는 평평한 바위가 있다. 퇴계는 ‘제법 평평한 자리로 이뤄져 여러 사람이 둘러앉을 만했다. 그곳에 앉아서 남쪽으로 산문을 바라보며 맑게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니 참으로 비할 데 없는 운치가 느껴졌다’고 했다. 이어 그는 ‘옛날 주세붕은 이곳을 백운대白雲臺라고 명명했는데, 이 근처에는 백운동과 백운암이 있으니 백운대라고 하면 이름이 서로 혼동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 백白자를 고쳐 청운대靑雲臺라고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고 소회를 밝히며 석각을 남겼다.

퇴계가 쓴 청운대란 석각이 초암사 앞 계곡에 그대로 보인다. 소수서원에서 초암사까지는 7.1km. 퇴계는 말을 타고 초암사까지 와서 이후부터 걸어 올라갔다. 석륜사까지는 약 4km. ‘한참 걸어가다가 다리가 아파 견여肩輿: 어깨가마를 타고 앉아 아픈 다리를 쉬었다’고 유산록에서 밝히고 있다.

석륜사에서 다시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석륜사가 지금 어디인지 정확하지 않다. 공단에서 대충 짐작으로 봉바위라고 안내한다. 유산록에는 봉두암鳳頭庵이라 나온다.

위치상 봉두암 주변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절이 있을 만한 평평한 장소도 주변에서는 이곳뿐이다. 석륜사 바로 아래쪽에 부도浮屠 한 기가 남아 그 가능성을 더욱 뒷받침한다. 부도는 어느 승려의 것인지 알 수 없다.

2박 한 석륜사도 터만 남아

퇴계는 다음날 ‘걸어서 백운암에 도착했다’고 했다. 그런데 백운암도 어디인지 아무도 모른다. 흔적도 없다. 배용호 회장이 “옛날 유산은 암자끼리 연결된 동선으로 움직였다면 지금은 등산 위주의 탐방로로 구성돼, 과거와 현재의 유산‧등산 개념이 조금 다를 수 있다”며 “흔적도 없고 기록도 없는 암자를 산 위에서 찾기가 정말 쉽지 않다”고 말했다. 백운암은 정말 흔적도 없다. 이어 ‘그 암자를 지나니 길이 더욱 험준했다. 산길을 곧바로 올라가자니 마치 사람이 절벽에 매달린 것 같았다. 힘을 다해 당기고 밀면서 산마루에 올라갔다. 산등성이를 따라 동쪽으로 몇 리쯤 가니 석름봉石凜峯이 있었다’고 나온다.

지금 석륜사 터에서 국망봉 올라가는 등산로도 매우 가파르다. 공단에서 나무 데크로 조성했으나 가파른 길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숨이 턱 밑에까지 차오른다. 퇴계의 표현대로 데크만 없다면 정말 사람이 절벽에 매달린 것 같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헉헉거리며 석름봉과 자개봉을 잇따라 지나 퇴계와 마찬가지로 드디어 국망봉에 도착했다.

‘맑게 갠 날 햇빛이 밝게 비치면 여기서 용문산과 나라의 수도인 서울도 볼 수 있다고 한다. 동쪽으로는 태백산과 청량산, 문수산, 봉황산이 보일 듯 말 듯 늘어서 있다. 남쪽으로는 팔공산과 학가산, 북쪽으로는 오대산과 치악 등 여러 산이 구름 사이에 출몰한다. 그러나 이 날은 산에 운무가 끼어 먼 곳을 볼 수 없었다.’

퇴계가 그러했듯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출발 당시 산 아래는 맑은 날씨는 아니었지만 구름은 없었는데, 산등성에 올라서니 세찬 바람에 구름이 잔뜩 끼어 도저히 앞을 분간할 수 없다.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다. 퇴계는 ‘산에 오르는 맛이란 꼭 눈으로 먼 곳을 보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히고 있다. 아마 그가 나중 청량산에서 남긴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인줄 알았는데, 산에 오르고 보니 유산여독서遊山如讀書더라’고 한 말을 염두에 둔 것 아닌가 짐작해 본다.

마음으로 즐기는 ‘유산의 맛’은 이뿐만 아니다. 국망봉 가면서 만난 ‘철쭉의 향연’에서 퇴계가 표현한 ‘축융의 잔치’에도 무궁무진한 의미가 녹아 있다. 분명 무심코 이 표현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 오악의 남악 형산 정상이 축융봉이다. 무병장수를 상징하고, 남쪽을 가리키며, 불火과 여름을 나타내는 봉우리다. 퇴계는 무엇에 초점을 뒀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무병장수나 봄이 오는 남쪽을 의미하고 싶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짐작해 본다.

또 형산을 중앙에 두고, 그 주변을 동쪽 자개봉또는 화개봉, 서쪽 천주봉, 남쪽 운밀봉, 북쪽 석름봉 등이 에워싸고 있다. 그 봉우리들이 국망봉 가는 길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형산이란 이름에 내포된 저울추같이 균형을 잡고 있는 형국이란 설명이다. 남악 형산같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조선 최고의 유학자 퇴계의 마음속에는 이런 정도의 의미를 두고 유산을 즐겼으리라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국망봉 가는 길에 만난 철쭉은 활짝 피어, 마치 비단 장막 속을 거니는 것 같다고 퇴계는 표현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퇴계가 다녀간 시기는 4월 신유. 지금 양력으로 환산하면 5월 17일쯤. 실제 취재팀이 방문한 날짜는 5월 8~10일. 불과 일주일 차이인데 철쭉은 전혀 개화하지 않았고, 오히려 진달래만 여기저기 흐드러지게 만발해 있다. 철쭉 꽃 봉오리는 곧 터질 것 같이 맺혀 있기는 했다.

영주 소백산 철쭉제가 5월 27~28일, 단양 소백산 철쭉제는 5월 25~28일로 계획돼 있다는 소식이다. 공단 직원은 “개화 시기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500년 전 철쭉은 지금보다 더 늦어야 하는데 훨씬 빨리 개화해 있다. 퇴계의 표현이 과장된 건지, 철쭉의 개화시기가 실제 늦어진 건지 그건 따로 따져봐야 할 사안 같다. 초암사에서 국망봉까지 약 5km. 가파른 비탈길의 연속이다. 힘든 구간이다.

“옛날 유산은 암자끼리 연결한 동선인 듯”

퇴계는 산봉우리에서 술을 서너 잔씩 나눈 뒤 시 7수씩을 짓고 철쭉꽃 숲속을 지나 중백운암으로 내려왔다. 상백운암 앞 제월대 낭떠러지는 내려다보기만 해도 아찔해서, 오래 머물 수 없어 다시 석륜사로 내려와 하루 밤을 묵었다.

영주문화연구회 회원들이 10여 년 전 회원들과 함께 퇴계의 유산록을 따라 길을 찾았지만 중백운암, 상백운암, 제월대 등은 찾지 못했다고 배 회장과 김덕우 선생은 말한다.

이튿날 퇴계는 상가타에 가기로 작정한다. 그런데 상가타는 또 어딘가. 환희봉, 산대암, 백학봉, 백련봉, 백설봉, 동가타 등의 지명이 유산록에 잇달아 등장한다.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진 암자들이고, 봉우리 퍼즐 맞추기도 쉽지 않다. 배 회장의 지적대로 옛날 유산은 암자끼리 연결한 동선을 따라 움직였다는 사실이 딱 들어맞는 듯했다. 하지만 유산록에 등장한 암자는 지금 흔적조차 찾을 수 없으니 어쩌랴.

퇴계는 석륜사에서 하루 밤을 묵고 상가타에 가기 위해 석성을 지났다고 했다. 석륜사지 옆 정규탐방로 반대편서쪽으로는 등산객 출입통제구역이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샛길의 흔적조차 없다. 마루 능선으로 우회해서 가기로 한다. 지금의 백두대간 종주 등산로다.

국망봉에서 능선 따라 정상 비로봉 가는 길에 소백산성이 나온다. 퇴계가 언급한 그 석성石城일 가능성이 있다. 공단 안내판에도 ‘퇴계의 유산록에 나오는 석성이라며 후손들을 위해 문화재로 보존돼야 한다’고 설명한다. 대개 석성은 급경사에 위치한다. 석성 밖으로는 급경사다. 그런데 퇴계는 그 석성을 지금과 같은 마루금이 아닌 석륜사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봤다고 언급했다.

퇴계는 유산록에 ‘이 산의 아름다운 경치가 모두 여기에 있다. 주경유가 이곳에 오지 않아 이처럼 고루한 것인가? 나는 불가불 그 이름부터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곳을 자하대紫霞臺로 명명하고 석성의 이름을 적성赤城이라 했다. 이는 옛날 천태산이 붉은 노을이 낀 것처럼 붉어 보인다고 하여 적성산이라고 한 뜻에서 따온 것이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본 석성은 붉은 성은 아닌 듯하다. 영주문화연구회원들, 즉 소백산 전문가들도 정확히 찾지 못하고 있다. 아쉬울 뿐이다.

보조국사 9년 좌선했다는 동가타 알 수 없어

퇴계는 이곳에서 숲을 뚫고 험준한 산을 넘어 산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바위골짜기가 가장 아름다운 곳은 상가타이고, 또 그 동쪽에 있는 것은 동가타라고 했다. 동행하던 승려 종수는 보조국사가 이곳에서 좌선수도를 9년 동안 했다고 전한다. 그 지눌이 9년간 좌선했으면 제법 알려졌을 법한 절일 텐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더욱이 등산로조차 없다. 숲이 우거져 더더욱 길을 찾기 힘들다.

우리 일행도 소백산 제2연화봉대피소에서 하루 밤을 보낸 뒤 산 아래에서부터 거꾸로 찾아 나서기로 했다. 이날 하루 걸은 거리는 GPS상 총 23km가 나왔다. 그것도 평지가 아닌 산길을. 앱에서는 역대 최고 기록이라고 알린다.

다음날 퇴계가 언급한 중가타 부근 죽암폭포부터 찾으러 나섰다. 산 아래에서부터 역으로 올라가서 찾았다. 하지만 통제구역일 뿐만 아니라 산천도 변한 듯하다. ‘인걸은 간 데 없고 산천은 의구하다’ 했는데, 실상은 인걸도 산천도 완전 달라졌다. 특히 비로사 동쪽, 퇴계가 국망봉에서 내려와 석륜사에서 1박한 뒤 하산한 코스는 전혀 찾을 수 없다. 지금 소백산자락길 첫 자락 달밭길이 일부 중복되거나 유사한 코스로 추정될 뿐이다.

퇴계는 이날 밤 하가타에서 시내를 하나 건너 관음굴에 들러 하루 밤을 묵었다. 이어 박달현 길을 향해 출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박달현은 지금 달밭골로 추정된다고 배 회장은 밝혔다.

유산록에는 ‘아래로 내려가다가 비로전의 옛터 밑으로 흐르는 시냇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욱금동郁錦洞을 지나 군郡으로 돌아왔다. 소백산은 천암만학千巖萬壑의 경치를 가지고 있으나 사람들은 주로 사찰들이 많은 곳으로 왕래한다. 대개 사람들이 통행하는 곳은 세 군데. 저 초암이나 석륜사는 중간골中洞에, 성혈聖穴이나 두타頭陀 등의 절은 동쪽 골東洞에, 상중하의 세 가타암은 서쪽 골西洞에 있다. 산행하는 사람들은 초암과 석륜사를 경유하여 국망봉으로 올라가는 것이 가장 쉬운 길이다’라고 적고 있다. 끝으로 ‘훗날 이 글을 보는 사람도 내가 주경유주세붕의 기록을 보며 감동했던 만큼 감동할지 모르겠다’고 기록하고 있다.

퇴계는 멀리서만 바라보던 소백산을 40여 년 만에 실제로 오르면서 매우 감동을 받은 듯하다. 그 길을 따라 오르며 최대한 찾으려 우왕좌왕 했다. 하지만 지금과 다른 지명이 너무 많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암자들은 더했다. 유산록에 나오는 지명을 제대로 한 번 찾아볼 기회를 마련해야 할 것 같다. 그것도 우리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언제 그런 기회가 생길지 모르겠다. 2박3일 동안 길 안내와 동행을 해준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소백산 산신

시대 따라 죽죽‧선묘‧다자구 할머니‧금성대군 등 다양한 인물 좌정

고대 소백산은 소백산으로서보다는 죽령이 더 알려져 있다.
죽령길을 최초로 개척한 사람은 신라 장군 죽죽竹竹이다.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조에 ‘아달라이사금 3년(156) 계립령의 길을 열었다’가 나오고, 바로 뒤이어 ‘아달라이사금 5년(158) 3월에 죽령을 열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아달라왕은 죽죽 장군을 시켜 죽령을 개척하고, 죽죽 장군은 죽령을 열다가 지쳐서 죽었다고 전한다. 이에 신라에서는 이곳에 사당을 세우고 추모했다고 한다. 죽령에 대한 기록이지만 죽령 산신에 대한 첫 기록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죽령 산신은 죽죽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죽죽이 산신이었는지에 대한 기억과 흔적조차 뚜렷하지 않다. 그에 대한 사당이나 추모 현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죽령이거나 소백산이건 간에 첫 산신의 실체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한반도에 산악신앙이 시작되면서 모든 산에는 유형무형의 신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어떤 산에는 단군과 같이 실체가 있었고, 다른 산에는 실체가 없었다.

소백산도 애초에는 산신의 실체가 없는 듯하다. 이후 시대에 따라 좌정한 산신은 그 실체가 달라진다. 무형의 산신에서 유형의 산신으로 좌정한 첫 산신이 죽죽 장군은 분명하다.

<조선왕조실록> 명종실록에 소백산 산신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명종21년, 단양군 죽령산은 소사小祀이고, 사당의 위판은 죽령산지신竹嶺山之神으로 썼다. 제를 지내던 곳을 죽령산 기슭으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국가 제사인 국행제 때 읽던 축문인‘소백산신 치성문小白山神致誠文’에 따르면 ‘국행제는 매년 원월元月에 조정으로부터 축문과 향을 받아서 1년에 3번 제사를 지냈다.

정월에는 고유제를 지냈다. 죽령 북쪽인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 주민들은 600년 전통의 국행제를 지금도 지내고 있으며, 소백산 철쭉제 때에는 영주시와 단양군에서 소백산산신제를 지낸다’고 기록돼 있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볼 때 최초의 소백산 산신은 죽죽 장군이 분명해 보인다. 이어 등장하는 산신은 다자구 할머니다. 조선시대 도적떼와 관련한 설화에 기반을 둔 내용이다.

죽령고개에 도적떼가 극성을 부리자, 다자구 할머니가 관군과 짜고 아들을 찾는다는 핑계로 산적 소굴로 들어갔다. 산적 두목 생일 날 모두 술에 취해 잠들자 할머니가 “다자구야”라고 외쳐 관군들이 산적 소굴을 급습해서 소탕했다는 설화다. 다자구 할머니가 임금의 꿈에 나타나 자신이 도적 소탕에 공을 세웠다며 신당을 지어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임금은 연을 날려 떨어진 곳에 신당을 지어 산신으로 모셨다. 지금 그곳이 용부원리에 있는 죽령산신당이다.

이곳에서 조선시대에는 관에서 주관하는 산신 국행제를 지냈다. 호랑이나 도적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안녕과 평화에 기반을 둔 산신각과 서낭당 성격이 강하다.

조선 초기에는 단종 복위를 꾀한 금성대군이 소백산 산신으로 또 좌정한다. 단종복위 거사를 도모하다 죽임을 당한 금성대군은 순흥 죽동마을에 사는 이선달이라는 사람의 꿈에 나타나 “내가 흘린 피 묻은 돌(혈석)이 죽동 앞 냇물에 있으니 찾아 거두어 달라”고 당부한다. 이튿날 마을 사람들은 죽동 냇물을 샅샅이 뒤져 그 돌을 발견한다. 그 혈석을 가까운 죽동 서낭당에 안치한다. 그 후 순흥 사람들은 매년 정월 대보름이 되면 정성을 모으고 소를 잡아 제사를 올리는 일을 거르지 않는다.

전형적인 신격화 과정을 거쳐 금성대군은 역사적 사실에서 현재의 신으로 환생한다. 금성대군은 사실과 허구, 다시 사실로 확인되면서 신격화 과정에 방점을 찍고 산신으로 좌정한다. 서민들도 과거에 실재했던 인물과 허구적 신에 대한 이미지를 동일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이 외에도 소백산 산신은 ‘선묘’라는 인물이 거론된다. 선묘는 소백산 산신일 뿐만 아니라 부석사 창건설화와도 관련 있다. 의상이 중국 유학을 떠나 어느 집에 머물 때 그 집 딸인 선묘가 의상을 사모했다. 법복과 용품을 준비한 선묘는 공부를 마친 의상을 따라 가기로 했으나 이미 의상이 탄 배는 떠난 뒤였다. 선묘는 가져온 함을 바다로 던지며 용이 되어 대사를 모시고 불도를 이루게 해달라고 주문을 외웠다. 의상은 왕명으로 절을 창건하기로 했으나 도적떼가 많아 어렵다고 만류했다. 이에 봉황이 나타나 큰 바위를 세 차례나 들었다 놓으며 산적들을 굴복시켰다.

둘이 공중에 떴다고 해서 부석사가 됐고, 봉황이 나타났다고 해서 봉황산이 됐다. 선묘는 석등 밑에 묻혀 절의 수호신이 됐다고 전한다. 그 수호신은 소백산 산신으로 좌정했다고도 전한다.

이와 같이 소백산에는 무형의 산신에서 죽죽, 선묘, 금성대군, 다자구 할머니 같은 유형의 산신이 좌정해 있다. 따라서 산신은 하나의 실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민심이 원하는 대로 신화화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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