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강쥐랑 술잔 부딪쳐볼까?

2017. 6. 22.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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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저녁 술모임 걱정되는 반려인 위한 공간… 애견바(Bar)가 뜬다

정용일 기자

티파니는 칵테일을 들이켰다. 달착지근한 우유에 브로콜리와 당근 맛이 느껴졌다. 어두운 조명에 하우스음악이 클럽 분위기를 살린다. 선물로 받은 큐빅 목걸이는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네. 수질 관리 좀 했군….’ 옆자리의 마루는 이온음료에 수박을 넣은 칵테일이 썩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개껌까지 팽개쳐두고 핥아먹는 걸 보니.

반려동물은 칵테일, 주인은 샴페인

분위기 좋은 바에서 한껏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는 티파니와 마루는 반려견이다. 주인을 따라 6월13일 밤 9시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고급 라운지 바(Bar) ‘디브릿지’를 찾았다. 이곳에선 5월23일부터 매주 화요일 밤 반려동물을 데려와 함께 술을 마시며 놀 수 있는 ‘디펫파티’가 열린다. 술집 한쪽 구석에 울타리를 쳐서, 개와 고양이를 풀어놓을 수 있다. 사람을 위한 음식은 물론 반려동물용 음식도 준비돼 있다. 매주 20~30명이 이곳을 찾는다.

디브릿지에선 2만5천원이면 반려동물한테 칵테일을 쏠 수 있다. 4만9천원을 내면 견주용 샴페인과 안주, 반려동물용 칵테일과 간식이 패키지로 나온다. 간식을 보고 침을 꼴딱꼴딱 삼키는 개를 무릎에 앉혀놓고 너 한입, 나 한입, 사이좋게. 영화 <터널>의 하정우처럼 강아지 사료를 탐낼 필요는 없다. 주인을 위한 음식도 넉넉하니까. 예로부터 끼니를 함께해야 진정한 식구(食口)랬다.

애견바(Bar)가 뜨고 있다. 청담동 주변에 사는 직장인 오민영(35)씨는 지난해부터 서울 강남 일대의 애견동반술집을 찾아다녔다. 달빛술담, 쿠데타, 헤이코타, 러스티…. 그동안 실버푸들 ‘마루’와 함께 찾은 식당 목록이다. 그런 그도 디브릿지처럼 고급 라운지가 있는 애견바는 처음이다. 강아지를 데리고 클럽파티 분위기를 즐길 수 있어 신선하다고 했다.

애견식당·애견바의 성장은 ‘반려동물을 키우는 1인 가구’가 증가하는 추세와 연관돼 있다. 김현종 디브릿지 전무는 “1인 가구는 낮에 일하는 동안 반려동물을 집에 혼자 둘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저녁 술모임까지 가면 마음이 불편해진다”고 말했다. 김 전무 역시 1인 가구이며, 포메라니안종인 ‘호두’를 키우고 있다. 본인의 경험을 디펫파티를 기획하는 데 참고했다. 그와 동료들은 디펫파티가 열리는 날이면 집에서 키우는 개와 고양이를 데리고 온다.

그런데 개한테 술을 먹여도 되냐고? 사실 이름만 칵테일이지 개가 먹는 건 비타민 음료다. 우유나 이온음료에 채소와 과일을 섞었다. 알코올은 없다. 그래도 느낌이 묘하다. 몸을 위아래로 바운스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리드미컬한 음악 아래서 여유롭게 칵테일을 마시며 파티를 즐기다니…. 그런 반려동물들을 보니 ‘네가 나보다 문화생활 수준이 낫구나’ 생각하게 된다.

이날 아메리칸불리를 데리고 온 박하나(31)씨도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술집을 열 계획이다. 그는 경쟁력 있는 ‘콘텐츠 확보’를 고민 중이다. 똑같이 술집에서 파티를 열어도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씨는 아이템으로 삼을 ‘영업비밀’을 한 가지만 이야기해줬다. “예를 들어 파티 때 강아지 행동교정 수업을 1시간씩 해준다면 사람들이 좋아하겠죠?”

가게주인 반려인 많아… 검색량 점점 늘어

맥줏집 ‘바네싸’에선 반려견을 풀어놓고 술을 마실 수 있다. 개가 술상을 엎는 등 사고 치는 경우는 드물다. 최근 애견동반 술집이 늘고 있다. 홍대 바네싸 제공

개가 술상 앞에 앉은 모습을 보니 불현듯 아이러니한 느낌이 들었다. 불과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한국인의 술상에 개는 ‘요리’로 올라왔다. 술상에서 내려왔다 다시 올라오는 동안 반려동물의 지위는 극적으로 변했다. 먹히는 존재에서 먹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제 반려동물은 당당히 가족의 일원으로 주인과 겸상을 한다. 훗날 개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가리켜 ‘개천절’이라 기록할 것이다. 개 신세가 천지개벽한 절대 잊으면 안 될 날!

반려동물의 지위 변화는 객관적인 데이터로도 확인된다. 네이버 데이터랩의 검색어 트렌드를 보면 ‘애견동반식당’은 2015년 11월부터, ‘애견동반술집’은 2016년 6월부터 지금까지 검색량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아지는 만큼, 반려동물과 함께 갈 장소를 찾는 사람도 늘어나는 셈이다.

애견동반술집을 경영하는 사람들 가운데 ‘좋은 가게 찾다가 열 받아서 직접 차린’ 이가 많다. 지난 4월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문을 연 맥줏집 ‘바네싸’도 그런 경우다. 주인 최규현 대표는 시베리안허스키 ‘장군이’를 키운다. 종 특성상 외로움을 많이 타서 함께 다녀야 하는데, 개를 데리고 맥주 한잔 편히 마실 수 있는 곳이 없어서 힘들었다. 그는 고민 끝에 직접 애견동반술집을 열었다.

개줄 고정장치와 울타리, 바닥에 고정된 식탁

술상에 개털이 날려 매출도 ‘개털’되면 어떡하지? 다행히 아직 손님에게서 불만을 들은 적은 없다. 청소만 부지런히 하면 된다. 오히려 가게 매상은 장군이 덕을 보고 있다. 단골손님 중에는 강아지를 보기 위해 간식을 사 들고 오는 이들도 있다. 지역 커뮤니티에선 반려견 동반 모임을 열 수 있는 장소로 조금씩 입소문이 나고 있다. 최 대표는 “반려동물을 매개로 지역 사람들과 네트워크가 생겼다”고 말했다.

술집을 하면서 반려동물용품도 같이 팔아 매출을 키운 곳이 있다. 2년 전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문을 연 ‘웨일즈독’이다. 대표인 유지아씨도 반려동물을 키우는 ‘반려인’이다. 체력 좋은 웰시코기를 집에 혼자 두면 온 집안이 난리가 난다. 하루 종일 집에 남겨지는 개를 늘 가까이 두고 일하고 싶어 술집을 냈다. 아사히·산미구엘 등 10여 가지 맥주와 낚지볶음밥·오코노미야키 등 10여 가지 안주를 판매한다. 전체 수익 가운데 음식으로 얻는 게 반, 반려용품을 팔아서 얻는 게 반이다. 가게 안에 반려견 놀이터와 개 목욕 시설도 마련돼 있다. 이곳을 찾는 고객의 70%는 개를 키우는 사람이다.

물론 주의 사항도 있다. 애견술집을 잘 운영하려면 섬세함이 필요하다. 개와 사람이 함께 있는 만큼 사고가 나지 않게 인테리어에 신경 써야 한다. 지난해 9월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 문을 연 술집 ‘vacation’은 식탁과 의자 바로 옆의 벽에 개 목줄 고정장치를 설치했다. 강아지를 의자에 앉혀 목줄을 걸어놓으면 안심하고 파스타와 와인 한잔을 즐길 수 있다.

경기도 안양의 돈가스집 ‘레스토랑 펍피’는 식탁마다 옆에 개를 둘 수 있는 작은 울타리를 마련했다. 바네싸에선 풀어놓은 개들이 밖으로 도망가지 못하게 테라스에 울타리를 쳤다. 웨일즈독의 식탁은 바닥에 단단히 고정돼 개가 뛰어다녀도 넘어지지 않는다. 공격성이 있거나 발정기인 개는 아예 출입을 금지한다. 또 안전사고를 막기 위해 불을 쓰면서 먹는 요리는 내지 않는다.

애견술집 다음은 직장애견집?

애견바는 ‘반려인구 1천만 명’ 시대의 상징이다. 2000년대 들어 애견카페·애묘카페가 퍼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놀랐다. ‘사람 먹을 것도 없는데 세상이 개판 됐다’며 탄식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애견호텔·애견식당 등 관련 산업이 차례로 생겨났고, 최근엔 애견술집이 떠오르고 있다. 이제 개한테 돈 쓴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과거처럼 많지 않다. 다음엔 직장 어린이집처럼 직장 애견집도 생기지 않을까? 혹시 모른다. 2027년쯤 되면 ‘공공부문 직장 애견집 설치’가 대선 공약에 등장할지도!

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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