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 하세요?

입력 2017. 6. 22.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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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한 직장에 소속되지 않은 채 일했던 지난 6년여 동안 “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에 짧은 답을 찾지 못해 늘 곤혹스러웠다. 6년이 넘었으면 적당한 해결책을 찾았을 법도 한데, 해결책은 찾지 못하고 곤혹스러움에만 익숙해졌다. 나는 6년 동안 책을 쓰고 번역을 했으며, 협동조합을 꾸려서 ‘이북’(e-book) 중심 출판업도 했고, 팟캐스트 방송을 진행했고, 투자회사와 컨설팅사에서 일한 전력을 살려 독립 컨설턴트로도 일했다.

여전히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곳에서

얼핏 제각각처럼 보이지만, 이 개별의 일들은 내 머릿속에서 모두 연결돼 하나의 포트폴리오를 이룬다. 어째서 그런지 설명하려면 이 지면을 모조리 허비하게 될 것이다. 내가 쓴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를 읽고 “무슨 일을 하세요?”에 대답하려는 책 같다고 말한 이도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다시 직장인이 되었다(‘퇴사 권장자’라는 오해를 받아온 터였다). 이제는 답변이 좀 쉬워질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 나는 여전히 회사 일만 하는 사람은 아니다.

이런 곤란을 느끼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닌 것 같다. 얼마 전 ‘광화문 1번가’에 발언자로 나선 미디어 스타트업 ‘닷페이스’의 조소담 대표는 자신이 “일자리라고 부를 수 없는 수많은 일을 거쳤”으며 닷페이스를 창업한 뒤에도 여전히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새로운 일의 경계 같은 곳”에서 계속 일한다고 말했다. ‘스타트업’은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유연한 단어 같지만, 정책이 원하는 분류 앞에선 여전히 길을 잃는다고 조소담 대표는 털어놓는다. 기존 틀에 맞춰 업을 설명할 수 있어야 ‘창업지원’ 정책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정책적 지원에 최소한의 기준이 필요하겠으나, 현재와 다른 혁신을 기대하면서 동시에 기존 틀 안에서 사업이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면, 여기에는 분명히 모순이 있다. 조소담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분명한 산업의 이름이나 숫자로 된 지표들을 조금 포기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애매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시도를 조금 더 많이 응원하는 체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직접이든 간접이든 경험한 사례가 많으면, 새로운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그 덕에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어떤 문제를 보아도 지난 사례들 중에서 얼추 비슷한 것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경력자의 미덕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일의 목표가 과거에 본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재생하거나 복제하는 것에 그치기도 한다. 바탕에 깔린 전제가 흔들리는 시대라면, 재생도 복제도 더 이상 가능하지 않고, 가능하다 해도 무의미한 경우가 허다하다.

애매함을 포용해주는 영역

뭘 하고 있느냐 묻고는 “내가 했던(혹은 내가 보았던) ○○ 같은 거구나”라고 말씀하는 분들이 있다. 참고해보면 좋은 사례를 알려주는 경우도 있지만, 가끔 그런 식으로 분류되거나 요약되는 것에 불편한 마음이 든다. 과거의 ○○와 같을 수 없는 지점, 얼핏 큰 의미가 없을 디테일처럼 보이는 지점에서 변화가, 가끔씩 혁신이 일어난다. 너무 많은 사례를 아는 탓에 오히려 이런 지점을 놓치게 된다.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새로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과거에는 명확했던 분류로 더 이상 갈라 넣을 수 없는 사람과 사례가 점점 늘어난다면, 애매함을 포용해주는 영역이 필요하다. 과거 기준으로 보아 단일하고 깔끔한 목표는 의미 있는 차이, 지금 막 일어나는 변화를 억누를 가능성이 크다.

짧지 않은 답변을 듣고, 모호한 차이를 모호한 채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아니라면 “무슨 일을 하세요?”라고 아예 묻지 않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나부터 고쳐 묻는 연습을 해야겠다. 요즘 제일 관심 있는 문제가 뭐예요? 요즘 무슨 일에 가장 많이 시간을 쓰나요?

제현주 일상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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