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침대 차지한 이상, 그림 보더니 딱 한마디 했다"

입력 2017. 6. 22. 02:16 수정 2017. 7. 23.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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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길을 찾아서】 (24) 박제된 천재 이상 시인

김병기는 일본 문화학원 유학 시절 ‘천재 시인’ 이상(김해경)과도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1936년 10월 도쿄 시내 정수원 아파트에 살고 있던 김병기는 위층 선배 주영섭의 부탁으로 서울에서 막 건너온 이상에게 침대를 내주고 하룻밤을 함께 지냈고 이듬해 4월 이상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사진은 1935~36년 절친 구본웅의 부친이 경영하던 인쇄소 겸 출판사 창문사의 <아동세계> 편집부 시절 이상(맨 왼쪽)으로, 도쿄로 오기 직전 말년의 모습이다. 가운데는 구보 박태원, 오른쪽은 훗날 장례식에서 본 이상의 데스마스크를 증언한 번역가 김소운이다.

“빗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 이상(李箱) 시인의 제일성이었다. 주인이 양보한 침대 위에서 일어나 아침 인사로 건넨 첫마디, 바로 빗방울 소리를 헤아리느라고 잠잘 수 없었다는 것이다. 빗방울 소리 때문에 잠잘 수 없었다! 도쿄 김병기 아파트에서의 일이었다.

-어떻게 이상 시인과 만날 수 있었는가.

“문화학원 시절 나는 신주쿠 근처 정수원(靜修園) 아파트에서 살았다. 거기는 히가시나카노 전철역에서 북쪽으로 10분 정도 떨어진 조용한 동네에 있는 2층짜리 아파트였다. 내 개인적으로는 많은 일을 겪었던 곳이기도 하다. 나는 1층에서 살았고, 주영섭은 2층에서 살았다. 그러니까 정수원 2층은 도쿄학생예술좌 연극운동의 보금자리 같은 곳이었다. 하루는 주영섭이 엽서 한 장을 들고 나한테 왔다. 엽서는 한글도 아니고, 일본어도 아니고, 순한문 문장이었다. 마치 한시(漢詩)처럼 보였다. 깨알 같은 글씨의 내용은, 내가 언제 너의 집을 방문할 테니 숙박 편의를 봐 달라는 것이었다. 엽서를 보낸 이는 바로 시인 이상이었다. 하지만 주영섭의 방은 좁아 두 사람이 잘 수 없었다. 그래서 넓은 방을 쓰고 있는 내게 부탁했다. 1936년 가을이었다.

양자로 들어간 백부의 권유로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다닌 이상은 다재다능한 실력으로 수석졸업해 총독부 소속 건축기사로 일했다. 1929년 고교 졸업 앨범에 이상의 미술실습실 습작 모습이 실려 있을 정도다. 권영민 교수가 2012년 발굴해 공개했다.
이상이 1928년 경성고등공업학교 시절 그린 자화상. 비대칭 구조의 얼굴에 안구가 없는 한쪽 눈, 눈밑에 흐른 눈물 자국, 함몰된 정수리 등이 당대 첨단 예술사조인 표현주의와 맞닿아 있다는 평이다.(<이상평전>, 김민수 지음)

괴짜 시인 이상(1910~37). 그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범승에게 들은 적은 있었지만, 그때만 해도 그렇게 유명한 인물은 아니었다. 이범승은 이상의 이름에 있는 ‘상’(箱) 자를 ‘하코’ 대신 ‘바코’라면서, ‘리바코’라고 불렀다. 김해경이란 본명 대신 스스로 지은 이상이란 필명을 우스개로 비꼬는 호칭이었다. 이상에 대한 이야기는 서울의 ‘3·4문학’ 동인인 이시우나 신백수 등에게도 들은 바 있다. 30년대 서울의 화가들이나 예술가들은 초현실주의 같은 새로운 사조에 대해 관심조차 없었고, 사실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나마 이시우 등 몇 명만이 나의 초현실주의 이론에 대해 경청했다. ‘3·4문학’ 동인으로 소설가 황순원도 들어 있었고, 그는 도쿄로 유학 와 학생예술좌에도 참여했었다. 그러니까 황순원은 이상과도 아는 사이였다. 문학적으로도 서로 영향 관계에 있는 줄 안다.

1936~37년 김병기와 주영섭이 살았던 정수원 아파트는 도쿄 시내 히가시나카노역에 위치한 최신식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아오야기 노부오, 독립전 화가 등 당대 일본의 신진 예술가들이 많이 살았다. 김병기는 1층 가운데 방에, 주영섭은 2층 맞은 편 방에 살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드디어 이상 시인이 왔다. 첫인상으로는 나이 많은 노인이 들어오는 줄 알았다. 실제 나이는 30살도 되지 않았다는데 50살이 넘은 것처럼 보였다. 환자처럼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게다가 몸에서 냄새도 났다. 시인에게 침대를 양보하고 나는 마루 바닥에서 잤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문제의 ‘빗소리’ 이야기를 했다. 하기야 내 방이 1층이었으니 빗소리가 잘 들렸을 것이다. 어쩌면 시인이 살았던 주거 환경과 많이 달라 빗방울 소리에 민감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렇지, 남의 침대를 양보받고 내뱉는 인사말치고는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시인다운 발상인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를 다니면서 추상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마침 방 안에 내 그림이 있었다. 작품 내용은 빨간 바탕에 동그라미 다섯 개를 강조하여 그린 것이었다. 이상은 그 작품을 쓱 보더니 한마디 했다. “동그라미가 있구만.” 단지 그 한마디뿐이었다. 동그라미가 있어 좋다, 나쁘다의 표현이 아니었다. 그냥 ‘동그라미가 있구만’ 했다. 일반적으로 작가들은 남의 작품을 보고 높게 평가하지 않는 습관이 있다. 작품 앞에서는 냉정했다. 그땐 그런 태도가 예술가다운 것이었다. 이상도 어떤 면에서 다다이스트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내 그림에 대해 호기심을 가질 만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입을 다물었다.

1936년 10월 도쿄 집에서 이상을 재워줬을 때 관심을 보였던 그림을 2013년 다시 그린 김병기의 대표작 ‘연대기’, 5개의 동그라미는 작가가 평생 살았던 3개 나라 5개 도시를 상징하기도 한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김병기의 장남 부부 집에 걸려 있다. LA/사진 김경애 기자

2013년 나는 이상 시인과의 추억을 생각하면서, 30년대 도쿄 시절의 작품을 회고하면서, 새로운 유화를 한 점 그렸다. 제목은 <연대기>라 했다. 그림 내용은 전체적으로 붉은색 바탕의 중앙에 하얀 공간을 두었다. 다섯 개의 동그라미를 강조했지만 정확하게 표현하지는 않았다. 흑색의 날카로운 직선들과 겹쳐 있는 다섯 개의 원형 구도, 그것은 내 인생의 족적을 상징하기도 했다. 즉 평양, 도쿄, 뉴욕, 로스앤젤레스, 그리고 서울, 5개 도시의 생활을 함축한 것이다. 삶은 복잡다단했지만 작품은 단순 구도로 요약했다. 나름 내 대표작 수준으로 꼽고 싶을 정도의 작품이다.”

1936년 가을 도쿄 정수원아파트 시절
윗층 주영섭 찾아온 이상 대신 재워줘
“첫인상은 50살 넘은 노인처럼 보여”

방에 있던 김병기 추상화 작품 보고
“동그라미가 있구만…그뿐이었다”
2013년 추억 살려 다시 그린 ‘연대기’ 대표작

1937년 4월17일 부음 듣고 장례식에
“이상 ‘데스마스크’ 떴다는 얘기 들어”
친구 김소운·여동생 김옥희도 ‘증언’
마스크·미발표 유고·유품 등 행방묘연

조선에서 건너온 ‘부인 변동림’ 기억
훗날 ‘김환기 부인 김향안’으로 재회
“장례식때 봤다는 얘기 한번도 안했다”

서울 서촌 동네친구인 ‘꼽추 화가’ 구본웅이 1935년 그린 이상의 초상. 그 무렵 그는 계모(변동숙)의 이복동생이자 이화여전 학생인 변동림을 이상에게 소개해줬다.

오늘날 한국문학사에서 우뚝 솟아 있는 이상. ‘박제된 천재’는 비밀을 많이 남겼다. 하기야 이상은 이런 말을 했다. 비밀이 없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는 ‘나의 종생(終生)은 끝났으되 나의 종생기는 끝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종생기(終生記)는 오늘도 반복되고 있다. 그는 많고도 많은 신화와 전설을 남겼다. 문학가 이상의 초기 시절은 화가 지망생이었다. 그는 <자화상>을 조선미전에 출품하기도 했고, 또 구본웅 등 화가 친구들도 많았다. 그만큼 예술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는 의미다. 그래도 이상 하면, <날개> 같은 소설, <오감도> 같은 시 작품을 연상하게 된다. 우리 문학사에 남는 불후의 명작들이다. 하지만 이상의 생애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부분도 많다. 이상의 말년 몇개월을 함께했던 변동림(김향안)의 증언은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나는 이상하고 결혼했다. 50년 전에. 그 우리의 결혼생활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서울을 떠나서 성 밖에 멀리 나가서 밀월을 지냈기 때문에 3개월 뒤 임시 시내에 머문 것은 이상을 먼저 도쿄로 떠나보내기 위해서고 뒤따라 들어갈 준비로 내가 직장(바)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은 공부하고 싶은 욕망으로 도쿄행을 계획했고 그때 양가 부모의 희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도쿄에 건너간 이상한테서는 도착 소식 이후 편지가 없었다. 두 달도 훨씬 넘었을 무렵 도쿄 간다경찰서 검인이 찍힌 노란 엽서 한 장이 날아왔다. 이상의 필적으로, 구속되어 있는 사실과 시말서를 썼는데 명문이라고 경관들이 감탄한다는 사연뿐의. 김해경이란 본명 이외에 이상이라는 이름을 가졌고 영어와 러시아말을 공부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한 왜경들은 반일(反日) 조선인 지식인이라는 낙인을 찍어 구속했던 거다. 한 달 넘어 갇혀 있는 동안에 이상은 건강을 상했고, 폐병이 재발했다. 그래서 간신히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뒤이어 도쿄대 부속병원에 입원된 통지를 받고 나는 도쿄로 건너갔다.”(1986년)

이상은 니시간다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불령선인(不逞鮮人), 즉 수상한 조선인이라는 이유였다. 유치장에서 결핵이 재발되었고, 가눌 수 없는 육신은 병원에 눕혀야 했다. 그리고 27살의 시인은 도쿄제대 부속병원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어들였다. 비보를 들은 친지들이 모여들었다. 주로 도쿄학생예술좌 동인들이었고, 한 스무명가량이 모였다. 와중에 시인의 데스마스크를 떴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시인이자 번역가 김소운의 증언을 보면, 이상의 데스마스크를 뜬 사람은 화가 길진섭이었다. 석고 작업 과정의 증언은 흥미롭다. “굳은 뒤에 석고를 벗겼더니 얼굴에 바른 기름이 모자랐던지 깎은 지 4, 5일 지난 양쪽 수염이 석고에 묻어서 여남은 개나 뽑혀 나왔다. 그제야 ‘정녕 이상이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1968년)

하지만 이상의 데스마스크는 물론 유품 일체가 사라졌다. 그래서 시인의 여동생(김옥희)은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었다.

“야릇한 것은 오빠가 죽기 하루 전날인 4월16일, 아버님과 큰아버님이 한꺼번에 숨을 거두어 우리 집안은 이틀 사이에 세 어른을 잃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빠는 아버님과 양부나 마찬가지인 큰아버지를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에 여읜 셈이지만 병이 하도 중태라서 그 비보조차 듣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오빠 가신 지 서른 해가 된 오늘날, 유물 중에서 가장 찾고 싶은 것이 있다면 오빠의 미발표 유고와 데스마스크입니다. 오빠가 돌아가신 뒤 임이 언니는 오빠가 살던 방에서 장서와 원고 뭉치, 그리고 그림 등을 손수레로 하나 가득 싣고 나갔다는데 그 행방이 아직도 묘연하며, 오빠의 데스마스크는 도쿄제대 부속병원에서 유학생들이 떠놓은 것을 어떤 친구가 국내로 가져와 어머님에게까지 보인 일이 있다는데 지금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어 아쉽기 짝이 없습니다.”(김옥희의 <오빠 이상>, 1964년)

1936년 함께 유학을 계획했던 이상이 이듬해 도쿄에서 병사하면서 변동림은 불과 3개월 남짓 짧은 결혼생활을 비극으로 끝냈다. 7년 뒤 이혼남 김환기(왼쪽)를 만난 변동림은 남편의 성과 호를 받아 김향안(오른쪽)으로 이름을 바꾸고 1944년 5월1일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는 고희동, 시인 정지용과 화가 길진섭이 사회를 맡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상의 장례식 광경은 어떠했는가?

“이상의 부음을 듣고 달려갔다. 아카사카에 있는 작은 일본식 집이었다. 도쿄제대 병원에서 장례식을 했다는 기록들이 많은데 일본의 대학병원에서는 장례식장을 따로 운영하지 않았다. 주영섭 등 학생예술좌 동인들 중심으로 약 스무명가량이 모였는데 꽉 찼다. 이범승의 친구 조우식도 보였다. 문상객 가운데 시골에서 일하다 달려온 듯한 수수한 ‘조선 여성’도 있었다. 그가 이상의 부인 변동림이라 했다. 하지만 세상 인연은 묘했다.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나게 되니 친구 김환기의 부인이 되어 김향안이라 불렀다. 나는 너무 놀랐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이상의 장례식에서 만났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장례식 풍경을 그가 기억하고 있는지, 아닌지 나는 알 수 없다. 그와는 별개로, 김환기와 나는 가까운 사이로 잘 지냈다. 6·25전쟁 중에는 그의 성북동 집에 초대받아 문학수와 함께 간 적도 있다. 뉴욕 시절에도 우리는 자주 만났다. 김향안과 나는 동갑이다. 김환기가 사망했을 때, 나는 그의 장례식장에서 조사를 했다. 내 아내는, 평생 나의 스피치 가운데 가장 엉성한 내용이라고 평했다.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하여 제대로 정리할 수 없었던가 보다. 김환기 사후에 김향안은 ‘금기사항’이었던 이상에 대하여 증언하기 시작했다. 내용 가운데 하나는 임종 때 이상의 마지막 요구사항에 대한 것이었다. 시인이 요구한 마지막 물건, 기왕에 알려진 것은 ‘레몬’이었다. 하지만 김향안은 이를 ‘멜론’이라고 수정했다. 나는 이 점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멜론이면 어떻고, 레몬이면 어떤가. 김환기가 세상을 뜨자 하는 말이 겨우 ‘멜론’인가. 그 뒤부터 나는 김향안을 만나지 않았다.”

1980년대 필자는 뉴욕에 체류했다. 오랜 기간 동안 김향안과 주말 회동을 했다. <김환기 평전> 작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매주 증언을 청취하면서, 정말 많은 비화를 들었다. 하지만 나의 평전 작업은 그 뒤 ‘오지 여행’ 등 몇 가지 이유로 완성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김향안은 서울에서 발행하는 한 여성잡지와 인터뷰를 했고, 클로즈업된 자신의 얼굴 사진을 비롯 기사 내용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이상 관련 증언을 <문학사상>에 연재하기도 했다. 그때 내가 곁에서 거들었던 내용들이었다. 이상과의 ‘산책’ 장소는 방풍림이 있는 야외라고 기록했지만, 나에게 들려준 증언은 청량리 갈대밭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상의 유품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데스마스크는 물론 유고 등등.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갔던 것이다. 아무튼 김향안은 천재 예술가 두 명의 부인으로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되었다. 이상과 변동림 그리고 김환기와 김향안.

구술·집필/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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