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국뽕'의 향연

2017. 6. 20.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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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대하소설, 영화 곳곳에 스민 국가주의… 역사 부풀리는 선동 멈춰야

고구려 후기를 다룬 SBS 역사드라마 <연개소문>. 드라마에는 ‘중원 역사의 뿌리는 조선’이라는 등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가 나왔다. 한겨레

“진시황이 모든 역사서를 불태워버린 이른바 분서갱유의 진짜 이유가 또한 여기에 분명하게 나와 있어.” “예, 폐하. 진시황이 나라를 통일한 후에 중원의 역사를 살펴보니 그 뿌리가 모두 조선에서 나온 것인지라 이에 경악하고 놀라워 관련 기록을 일제히 수거하여 불태웠다는 내막 또한 명명백백히 밝혀졌사옵니다.”

‘국뽕’ 빼면 사극 못 만드나요?

2006년 7월부터 2007년 6월까지 1년여 동안 100부작으로 방송된 SBS 역사드라마 <연개소문> 대사의 한 토막이다. 역사를 표방하지만, 사실일 가능성은 없는 그야말로 대하(大下) ‘소설’이다. 드라마 <연개소문>은 ‘국뽕’(국가주의+히로뽕) 콘텐츠를 말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사례 중 하나다. 인용한 대사의 설정은 이렇다. 고구려의 국립대학 격이던 태학의 학자들이 중국 최초로 통일제국 진나라를 세운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일으킨 이유를 알아본다. 진시황은 중원의 뿌리가 조선에 있음을 알고 놀라서 모든 관련 서적을 불태울 것을 명했다는 것이다. 드라마 속 영양왕(이효정 분)은 “우리의 고대사를 적은 <천부경>을 상세히 기술하여 후대가 이를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며 “고구려가 세계의 중심”임을 선언한다. <환단고기>의 뿌리가 <천부경>에 있다고 하니 고구려 영양왕도 그 책을 읽은 셈이다.

‘드라마 is 뭔들’이라고 하더라도 그야말로 ‘싱크 빅’한 이런 장면들은 비단 <연개소문>만의 문제가 아니다. 언젠가부터 지상파방송의 모든 역사극이 ‘국뽕’적 요소를 차용하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영국 BBC 관계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한국 지상파방송들은 어떻게 규모가 큰 사극을 이렇게 많이 방송하고 제작할 수 있는지 놀랍다”고 했다. 한국 사람들이 “그 어려운 걸 자꾸 해낸다”며 웃고 말았지만 사실 이유는 간단하다. 민족의 기상이 단박에 웅비하고, 국가적 자부심을 뻐근할 정도로 흔들어주기만 하면 모든 콘텐츠는 어느 정도 팔린다.

그래서 모든 게 비슷하다. <해신>(KBS·2004~2005)은 장보고를 ‘실크로드를 개척한 동아시아의 해상왕’이자 ‘세계 해전사의 전설’로 묘사했다. 장보고의 업적이 훌륭하다고 해도 그가 우리만 몰랐던 ‘신토불이 월드 히어로’일 리는 없지 않은가. 정치적 상황이 결합되면 더 화끈해진다. 예컨대 <선덕여왕>(MBC·2009)은 ‘협잡이 판치는 국내 정치를 결연한 선의만으로 돌파하고, 국제 정세를 활용해 신라 천년 왕국의 기틀을 놓은 태초의 여왕’에 대한 이야기였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역경에 처한 선덕여왕(이요원 분)이 행여 “대전은요?” 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신분마저 대왕에서 태왕으로 업그레이드한 <광개토태왕>(KBS·2011~2012)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제국을 설계한 동양의 알렉산더’로 광개토대왕을 치켜세웠다. <대왕의 꿈>(KBS·2012~2013)에서 김춘추는 당나라로 대변되는 세계 질서를 좌지우지한 세기의 전략가로, ‘나라가 작다고 위대해질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걸 웅변한다.

대하사극은 일부 사실로 볼 만한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사실을 뛰어넘는 찬양의 서사를 만들고, 주인공의 서사를 통해 일방의 ‘애국적 역사관’을 재생산한다는 일관된 경향성을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매우 비관적이고 퇴행적인 변화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런 역사관이 문제라는 얘기를 하는 게 촌스러운 태도가 됐다. 한때 ‘개그는 개그일 뿐 오해하지 말자’는 말이 유행했는데 정말 세상이 그렇게 됐다. 그런 콘텐츠가 범람해서이기도 하지만 ‘재밌으면 됐지, 그게 뭐 어떠냐’는 쇼비니즘(chauvinism)적 정서가 대중을 지배한 탓도 크다. ‘다시는 한국을 무시하지 마라’ 같은 위험한 말이 신조어로 소비되며 ‘제발 한국인이면 맨유 응원 좀 합시다’ 같은 말이 언론에도 횡행하는 사회에서, ‘제발 한국인이면 대중문화에서라도 국뽕 좀 합시다’라는 합의는 전혀 불편하지 않게 됐다.

그렇다면 자발적으로 ‘국뽕’ 하게 된 기묘한 퇴행의 시작은 언제부터였을까. 문화산업적 의미에서 국뽕의 성공은 1993년 ‘문민’으로 대변되던 김영삼 정부에서 탄생했다. 김영삼 정부의 구호는 뜻밖에도 ‘신한국’이었다. ‘창조경제’처럼 그 신한국이 뭔지를 아는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없었다. 하지만 YS를 말릴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그 얘기를 했다. “이(위)대한 대한민국”을 건설하겠다며 ‘세계화’와 ‘역사 바로 세우기’에 앞장섰다. 그를 위해 전국 방방곳곳의 쇠말뚝을 뽑았다.

<무궁화∼>와 <남벌>에서부터 시작

권력의 성격 변화는 정치적 억압의 완화로 이어졌고, 문화의 폭발로 표현됐다. 1990년대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1992)로 시작된 가요의 황금기였고, 홍상수·김기덕·허진호 등으로 대변되는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 초입이었다. 이때 데뷔한 장동건·정우성·이정재·김건모 등은 여전히 한국 대중문화의 지배자다. <리뷰> <키노> <씨네21> 등이 주도한 문화비평과 대중문화 담론 작업도 절정이었다. ‘홍대 앞’이라고 불리는 인디신이 등장한 것도 1990년대 중반이다. 끝도 없는 뉴웨이브의 향연이었으며, 지금까지 이어지는 메인 스트림의 시작이었다. 통칭하면 ‘신한국’을 살아가는 ‘신세대’가 필요했고 마침내 등장한 시기다.

여기까지는 분명 아름다운 기억이다. 정치적 이념에서 탈피해 생이 문화적 욕구로 충만했던 그 세대는 뜻밖에도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김진명·1993), 만화 <남벌>(이현세·1994) 등에 열광했다. 반일 감정을 극한까지 부양해 너도나도 두 주먹 불끈 쥐고 ‘열도 침몰’을 상상케 하던 두 ‘괴작’이 문화 폭발의 시대를 지배한 텍스트였다는 건 여러 의미에서 기념비적이다. 정치 이념의 공백이 일본에 대한 적개심으로 채워졌다. ‘애국과 힘의 논리’로 역사와 세계를 해석한들 문제없다는 파시즘적 광기가 대중의 내면에 자라나기 시작했다.

두 작품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모든 ‘국뽕’ 콘텐츠의 원형질이다. <무궁화∼>는 우리가 제대로 몰랐(다고 상정됐)던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를 비틀어 박정희 시대의 핵개발 이야기를 다룬 역사추리소설이다. 우리는 핵을 통해 국제 질서의 헤게모니를 쥘 수 있는 민족인데, 외세의 방해로 스스로를 검열했다는 인식적 기반은 상징적이다. <남벌>은 군국주의로 돌아선 일본에 대항해 남북이 합작한 전쟁을 벌여 승리한다는 이야기다. 이현세의 많은 작품에서 변주됐던 플롯인데 이 작품 이후 이현세는 <천국의 신화>를 통해 <환단고기>와 ‘환빠’ 자체를 위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무궁화∼>와 <남벌>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닮아 있다. 일단 한번 잡으면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다. 그 카타르시스의 구조는 완벽하게 일치된다. <무궁화∼>의 개화는 남북 합작으로 개발된 핵무기가 일본에 투하되는 것으로 달성된다. <남벌>은 북한 비행기를 남한 특공대가 몰고 가 일본을 폭격해 이룩된다. 두 작품을 관통하는 서사의 바탕은 ‘민족적 원한’이고 이를 해소하는 방식은 우리 민족의 ‘영웅적 보복’이다.

민족 신파극, 그만 봅시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혼이 죽은 민족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역사를 부풀리는 민족은 뭘까. 그것이야말로 혼이 비정상인 건 아닐까. 극단적인 프레이밍으로 놀라운 흥행을 선취한 <무궁화∼>와 <남벌> 이후 어떤 대중문화 작품들은 역사를 지속적으로 부풀려왔다. 그 거품을 감추는 장치로 선악이 취사선택됐고, 폭력의 스펙터클이 동원됐고, 민족적 신파성에 인과응보의 승리를 얹는 방식이 보편화됐다. 그런 작품에 젖어들다보니 대중은 그러려니 하게 됐다. 그 밥에 그 나물이 계속 출연하는 대하사극은 지금도 언제나 재생산이 가능한 안정적 시청률을 확보한다.

박근혜 정부에서 국뽕 계열 영화들이 ‘화이트리스트’를 통해 지원됐다. 이에 대해선 현재 법적 공방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 계열의 작품들은 ‘대작’이란 타이틀을 달고 계속 변주돼왔다. <인천상륙작전>(2016) 이전에 <태극기 휘날리며>(2004)가 있었고, <명량>(2014) 전에 뮤지컬 <영웅>(2009)이 있었다. 정치적으로 불우하던 시절엔 미학적으로 한참 퇴행적인 콘텐츠를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했다. 지금은 다르지 않은가. 이제 그만하자. ‘국뽕’은 선동이다.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유효해서는 안 되는 문화의 퇴행이다.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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