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국민이 'OO충'..막말 난무하는 사회

이현 입력 2017. 6. 19. 18:03 수정 2017. 6. 19.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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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벤치의 남자 하나가 김지영씨를 흘끔 보더니 일행에게 뭔가 말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간간이 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나도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면서 돌아다니고 싶다. 맘충 팔자가 상팔자야. (중략) 김지영씨는 뜨거운 커피를 손등에 왈칵왈칵 쏟으며 급히 공원을 빠져나왔다.' (소설『82년생 김지영』중에서)

매일 육아에 찌들려 살다가 커피 한 잔 사 마시러 유모차를 끌고 나선 아기 엄마가 ‘맘충’으로 표현됐다는 소설의 한 부분이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는 ‘벌레’가 아닌 사람이 드물다는 얘기가 나온다. 명절에 시댁에 먼저 들르자는 남편은 '한남(한국남성)충'이다. 독서실 앞에 모여 재잘재잘 떠드는 중학생은 ‘급식충’,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은 할아버지는 ‘틀딱(틀니 딱딱)충’이다.

공격적인 작명은 일상으로 확대돼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 먹으면 ‘부먹(부어 먹는)충’, 찍어 먹으면 ‘찍먹(찍어먹는)충’으로 불린다. 배경 지식을 상세히 설명하면 ‘설명충’, 다른 사람 이야기에 진지하게 조언을 하면 ‘진지충’이라는 불평이 돌아온다.

‘ㅇㅇ충(蟲)’은 공부벌레나 일벌레처럼 어떤 일에 열중하는 사람들을 장난스럽게 놀리는 온라인 신조어였다. 하지만 이제는 오프라인까지 퍼져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는 표현이 됐다.

거친 말로 상대방을 규정짓고 편을 가르는 듯한 수사법도 확산되고 있다. 주말에 놀러 와 삼촌 책상을 어지럽히고,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는 꼬마는 ‘조카몬’(조카+몬스터의 합성어)으로 불리고, 맘에 들지 않은 기사를 쓴 기자들은 ‘기레기(기자+쓰레기)’라 불리기 십상이다. 국립국어원이 5년마다 실시하는 국민의 언어 의식 조사에 따르면 습관적으로 욕설 및 비속어 등 '막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비중은 2005년 1.2%에서 2015년 21.8%로 증가했다.

배국남 대중문화평론가는 “막말이 ‘인정 투쟁’의 수단으로 동원됐다”고 분석했다. “온라인에서 대중들은 정보 소비자이자 생산자다.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댓글 하나라도 눈길을 끌고 인정을 받으려면 자극적인 막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막말은 마약과 똑같아서, 다음 번에는 더 독한 막말을 해야 관심을 끌게 되는 악순환을 낳았다”고 설명했다.

정치권의 막말은 그 파급력 때문에 막말의 악순환을 불러 온다. 강동호 자유한국당 서울시당위원장은 15일 당사 이전 개소식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현 정부를 향해 "아주 나쁜 놈, 깡패 같은 놈"이라고 발언해 각계에서 비난 받았다. 홍준표 전 경남도지사는 지난달 17일 페이스북에서 "박근혜 탄핵 때는 바퀴벌레처럼 숨어 있더니 감옥가고 난 뒤 슬금슬금 기어나와 당권이나 차지해보려고 설치기 시작했다"며 자유한국당 친박계를 'OO충'도 아닌 진짜 '벌레'에 비유했다.

미국에서도 막말 확산은 우려 대상이다. 제러미 월드론 뉴욕대 로스쿨 교수는 2012년 쓴 그의 저서『혐오표현, 자유는 어떻게 해악이 되는가』에서 혐오 표현의 확장성을 지적했다.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 혼자가 아니다’는 메시지를 전달해 개인의 혐오감을 그룹 차원으로 키우게 만든다는 것이다. 소수의 인종ㆍ종교ㆍ성ㆍ민족ㆍ성적 정체성을 싸잡아 비난해 “소수자들이 정상적인 사회적 지위를 누리며 살아갈 수 없도록 사회 환경을 훼손시킨다”는 것이 제러미 교수의 분석이다.

실제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치러진 미국 대선에서 '막말' 덕을 톡톡히 봤다는 평가를 받았다. 불법 이민자를 받아들여선 안된다는 취지의 연설 도중에 자신에 반대하는 시위대를 향해 “당신들 멕시코에서 왔나? 멕시코에서 왔냐고. 응?”이라고 따져 묻는가 하면, 상대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을 향해 “제 남편도 만족을 못 시키면서 미국을 만족시키겠다고?”라는 발언도 했다. 이민자ㆍ여성에 대한 트럼프의 혐오 발언이, 불황과 소수인종의 증가세로 박탈감을 느끼는 저소득층 백인 유권자들의 표를 결집시켰다는 것이 미국 정치권의 분석 중 하나다.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는 “‘막말’이 그것에 당하는 누군가에게는 물리적 폭력에 비등하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하는데, 사회의 가장 공적인 집단인 정치권에서 막말이 아무렇지 않게 되풀이되고 있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정치인들은 자신의 지지층을 결집시키려는 목적으로 ‘사이다 발언’을 가장한 막말을 쏟아내지만 결국 상대편을 포용하지 못하는, 정치인으로서는 자멸적 행위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홍상지ㆍ이현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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