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족 메카'였던 압구정동, 지금은 10곳 중 3곳 빈 가게

김민관 2017. 6. 19.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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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데오거리 80~90년대 패션 1번지
전성기 땐 33㎡에 월세 400만원
인터넷쇼핑·가로수길에 밀려 쇠락
2억~3억원 하던 권리금도 사라져
건물주·상인 임대료 30% 내리기로
18일 오후 서울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의 모습. 한때 젊은이들로 북적였던 이 지역 상점 곳곳에 ‘임대 문의’라고 적힌 안내문이 붙어 있다. 이곳 건물주들은 최근 임대료를 낮추고 있다. [우상조 기자]
“미나리꽝(미나리를 심는 논)에 1980년대 들어 빌딩이 하나둘 생기더니 10년이 지나자 거리는 외제 차와 배우들로 북적였죠. 다시 10년이 흐르니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했고, 또 10년 후엔 상가 곳곳이 비어 버렸어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1세대 건물주인 박종록(72) 신구산업 회장이 70년대부터 최근까지 지켜본 동네 모습은 이랬다.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 사거리에서 학동 사거리 입구까지 이어지는 ‘ㄴ’자 형태의 압구정 로데오 거리는 80~90년대 돈과 젊음이 모여드는 제1의 ‘핫 플레이스’였다. 공실률이 30%에 이르는 지금의 모습은 상상조차 힘들었다.

로데오라는 이름은 80년대 중반 미국 로스앤젤레스 베벌리힐스의 고급 쇼핑가에서 따왔다. 길 건너엔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이 들어섰고, 우측에는 청담동 명품거리가 조성된 이곳은 이른바 ‘패피’(패션 피플)들의 메카였다. 명동의 유명 디자이너부터 동대문 옷가게 사장들까지 그 시절 ‘옷 좀 안다’는 이들이 집결했다. 상점의 70%는 옷가게였고, 유행을 끌고 좇는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을 겨냥한 고급 카페와 레스토랑도 차례로 문을 열었다. 88년 맥도날드 1호점과 한국 최초의 원두커피 전문점 ‘쟈뎅’이 처음 자리를 잡은 곳도 로데오 거리였다.

8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한창때의 로데오 거리는 이른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따지는 곳이 아니었다. 박 회장은 “몇몇 상인들은 동대문에서 만원도 안 되는 티셔츠를 떼와 5만~6만원에 팔았지만 아무 문제가 안 됐다. 이곳 사람들은 돈이 있었고, 무엇보다 ‘압구정에서 옷을 산다’는 특별함이 있었다”고 말했다.

부모가 사 준 고급 외제 차를 타고 길거리에서 여성을 헌팅하는 ‘야타족’, 카페에서 오렌지 주스를 건네며 이성에게 말을 걸었다고 해서 이름 붙은 ‘오렌지족 ’ 등이 모두 로데오 거리에서 파생된 말들이다. 송성원 사단법인 압구정 로데오 이사장은 “전국에 있는 포르셰 10대가 모두 압구정 로데오에 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정말 대단했다”고 기억했다.

최근 치솟은 부동산 시세를 빗대 자조적으로 쓰는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도 로데오 거리에선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70년대 말 3.3㎡(1평)당 70만원에 거래되던 땅값은 90년대 후반부터 실거래가 1억원을 넘어섰고, 월세는 평당 20만원 선으로 뛰었다. 20년 넘게 이 일대에서 활동한 정국진 한양부동산 대표는 “전성기 때는 33㎡ 기준으로 최고 400만원까지 월세가 올랐고, 권리금은 33㎡당 2억~3억원 정도로 치솟았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당시 아무리 사업을 잘해 돈을 많이 벌어도 땅값 오르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땅 주인들도 예상치 못 한 속도였다”고 말했다.

“2005년부터 손님 반토막됐는데 … ”

이렇게 ‘잘나가던’ 로데오 거리의 황금기는 10년 전부터 꺾이기 시작했다. 97년 외환위기 사태를 기점으로 소비심리가 위축됐고, 인터넷 사용이 본격화하면서 ‘가성비’ 좋은 쇼핑몰이 대거 등장했다. 기존 옷가게 주인들도 높은 임대료를 내며 버티는 대신 그 무렵 새로 뜨기 시작한 ‘가로수길’ ‘이태원’ ‘홍대’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연스레 주변 식당이나 카페의 매출도 줄었다.

로데오 거리에서 10년간 힙합 의류를 판 김모(42)씨는 “2005년부터 손님이 반 토막이 됐는데 월세는 그대로였다. 더 이상 남아있을 이유가 없어 3년 전 가게를 정리했다”고 말했다. 건물 세 채를 보유 중인 한 건물주는 “세 곳 모두 6개월째 1층이 공실 상태다. 원래는 모두 옷가게가 있던 곳이다”고 말했다. 18일에 세어 보니 ‘ㄴ’자로 꺾어진 로데오 거리의 꼭지 점에서 볼 수 있는 ‘임대 문의’ 문구가 16개였다. 억원대의 권리금도 대부분 사라졌다.

반전을 꾀하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달 30여 명의 지역 건물주와 상인, 강남구청 관계자가 모여 임대료를 30%가량 낮추기로 합의했다. 이호현 압구정동 동장은 “공실 기간이 길어지면 건물가격도 떨어져 건물주의 불이익이 크다. 아직 버티는 경우도 있지만, 임대료 인하에 합의하는 건물주가 하나둘 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는 지난 17일부터 격주로 신인 아이돌 가수 발굴 프로그램인 ‘윙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등 활기 불어넣기에 나섰다.

■압구정 로데오 거리의 변천 「1970년대 미나리꽝 위에 양옥주택 60여 채 자리잡아 80년대 중반 미국 LA 쇼핑가 딴 ‘로데오 거리’ 탄생 80년대 말 맥도날드 1호점, 커피 전문점 쟈뎅 등 오픈 90년대 초 ‘오렌지족’이라 불린 젊은층 몰려 들어 2000년대 초 33㎡ 당 월세 200만원, 매매 10억 넘어 2000년대 중반 인터넷 쇼핑몰 등으로 쇠락 시작 2017년 지역 건물주들 모여 임대료 30%인하 합의 」

김민관 기자 kim.mink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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